162화 도원결의(桃園結義)
조운모우(朝雲暮雨).
섹스를 뜻하는 사자성어다.
쉽게 말해서 저 변태 색마 놈은 지금 나와 섹스하자고 말한 것이다.
나는 색마의 손목을 잡았다.
“어머. 벌써 이렇게 적극적으로······.”
“난 당신이랑 운우지락을 나눌 생각이 없어.”
나는 얼굴을 붉히는 색마를 몸에서 떼어내면서 단호하게 제안을 잘라냈다.
색마를 처음 본다면 모를까, 나는 그의 전력을 전부 알고 있다. 애초에 남자였던 놈이었다. 아무리 지금 여인의 신체로 변했다지만, 그런 놈과 운우지락을 나눌 생각은 없다.
물론 내 소중한 동정을 줄 생각도 절대로 없다.
거기에 전생에 놈과 만났을 때 차라리 여자가 되라고 권유했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왜죠? 후후후후. 소녀의 어디가 부족한 것이어요?”
색마가 눈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사내 하나쯤은 벌써 홀리고도 남을 미모.
하지만 나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외면이 아름다워도 내면이 추한 거라면 그건 추한 거다. 눈앞의 색마가 정확히 그랬다.
“내가 원하는 건 육체의 쾌락이 아니다. 서로의 마음이 온전히 합치하는 쾌락. 심신(心身) 모두가 만족하는 운우지락이야말로 진짜 운우지락이자 최고의 쾌락이다. 육체만의 쾌락은 공허할 뿐이야. 이것이 내가 세운 도(道)이다. 하지만 색마 당신은 오로지 육체의 쾌락만 추구하는 상대, 서로의 도(道)가 맞지 않기 때문에 당신과는 운우지락을 나눌 수 없어.”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육체도 소용없다고?”
색마가 슬쩍 가슴 안쪽을 보여주면서 내게 말했다. 색마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달콤한 향기가 진해졌다. 사내를 홀리는 미염공이었다.
천하제일미녀, 사파지존 적사월의 최면 어플도 버텨낸 나였다. 적사월보다 수준이 낮은 색마의 미염공 따위는 아예 통하지도 않는다.
내 양물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
내 눈빛을 본 색마의 눈빛이 나를 향했다. 색마의 눈에서 핑크빛 안광이 번쩍였다. 나는 그의 앞에서도 당당하게 앉아 있었다.
나를 살펴본 색마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호호호호호, 후후후후, 흐흐흐흐,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까의 여자 같은 간드러지는 말투가 아닌, 사내처럼 호탕한 말투.
절세미녀의 모습으로 호탕한 웃음을 짓는 모습이 언밸런스하기 짝이 없었다.
“괴룡 자네 정말 재미있군. 정신과 육체가 조화된 쾌락이 진짜 쾌락이라고.”
색마의 말투가 남자처럼 바뀌었다.
이중인격인가?
하긴 원래 남자였던 놈이니, 남자 말투를 써도 이상할 건 없었다.
색마가 술을 따라서 쭉 들이켰다.
생긴 건 절세미녀인데, 하는 꼴은 아저씨 같은 모습.
탁.
색마가 테이블 위에 잔을 올려놓았다.
“자네가 주장하는 색도(色道)는 인상 깊게 들었네. 마음의 쾌락이라. 확실히 이 색마도 간과했던 관점이었어. 천하의 모든 쾌락을 섭렵했다 자부했건만, 마음의 쾌락이라는 영역이 아직 남아 있었을 줄이야······.”
색마가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구 부인이나 색마나 운우지락의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구 부인과는 다르게 색마는 내 색도의 진가를 바로 눈치챘다.
이래서 색마인가?
방심할 수가 없군.
하지만 내 진의를 알아준 건 색마가 처음이었다. 그러니 나는 색도의 수행 비결을 잠깐 소개하기로 했다.
“서로의 마음이 통한 뒤에, 구름과 비의 즐거움을 나눠야 비로소 최고의 쾌락을 누렸다고 할 수 있지. 마음이 없는 육체적 쾌락은 공허한 반쪽짜리 쾌락일 뿐이야.”
마음이 통하는 섹스가 진짜 섹스다.
이 격언은 현대 의학으로 밝혀진 진실이다. 마음이 통하는 섹스를 할 때, 러브 호르몬인 옥시토신이 분비되어 더 강한 오르가즘과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쾌락만을 추구하는 섹스에서는 옥시토신이 제대로 분비되지 않는다.
보라. 색도는 이렇게나 과학적이다.
“반쪽짜리 쾌락이라, 후후후후. 과격하기는 하지만 아예 일리가 없는 주장은 아니군. 괴룡, 아니 검룡.”
색마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솔직히 아까는 자네를 시험해본 거였네. 아 물론 운우지락을 나누자는 건 거짓은 아니었네. 자네가 수락했다면 정말 이 몸을 바칠 생각이었지. 하지만 동시에 실망했을 걸세. 겨우 이 정도의 유혹으로 흔들릴 사내라면, 괴룡의 이름을 가질 자격도 없었다고. 하지만 자네는 내 유혹을 이겨낸 걸 넘어서, 내게 새로운 도(道)를 설파했네. 마음의 쾌락이라.”
색마가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그가 웃었다.
“이 색마한테 색(色)으로 깨달음을 주는 자가 있을 줄은 몰랐군.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호탕하게 웃는 색마.
그러니까 그게 시험이었다고? 하여간 고수 중에 정상인은 아무도 없다. 어디 나사 한 군데가 빠져야 고수가 될 수 있는 모양.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보이차를 마셨다.
차향은 좋다.
“그래서, 시험은 통과한 거요?”
“물론! 아주 훌륭하게! 이 나의 예상 이상으로 통과해주었지.”
색마는 내가 제창한 색도에 진심으로 감명을 받은 모양.
흥.
그래도 보는 눈은 좀 있는 친구로군.
“자네와 의형제를 맺고 싶을 정도로 말일세.”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말에 나는 입 안에 든 차를 뿜으려다가 간신히 삼켰다.
뭐?
의형제?
내가 색마와 의형제? 그건 절대로 안 된다.
색마와 의형제가 되었다는 소문이 도는 순간, 안 그래도 굳어진 괴룡 이미지는 쐐기가 박혀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불가역적인 영역에 도달할 것이다.
내 손이 살짝 떨렸다.
“농담이겠지?”
“설마? 십 할. 전부 진담일세. 괴룡. 나와 의형제의 맹약을 나누지 않겠나?”
아니 무슨 삼국지 도원결의도 아니고.
왜 의형제를 하자는 거야.
“나는 정파이고, 그대는 마도인이지 않나?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의형제를······.”
“정마의 관계가 의형제 사이를 갈라놓을 수는 없는 법이지.”
에둘러 거절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색마가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렇다고 여기서 거절하는 것도 조금 그랬다.
그렇다면 역시.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걸어서 포기시키는 것밖에 없다.
“천변환음공(天變換廕功)의 구결을 알려준다면 해주지.”
천변환음공.
마교로 흘러들어간, 불완전한 규화보전을 기반으로 색마 본인이 직접 창안한 독문 TS 절학.
나는 그 절학의 구결을 요구했다.
TS하려는 생각은 당연히 아니다. 그런 일은 내게는 있을 수가 없다.
무리한 요구를 통해서 의형제 제안을 거절하기 위해서였다.
강호 무림에서 독문절학의 구결을 알려달라는 말은 금기 중의 금기. 문외자에게 독문 무공을 알려주는 건 통상적인 강호 무림의 도리에서 완전히 어긋나는 일이다.
그러니 색마가 정상인이라면, 아니 정상인이 아니라도 내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뭐? 흐, 흐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내 말을 들은 색마가 웃었다.
좋아.
이제 거절하겠지. 그걸로 된 거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아우님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알려주도록 하지.”
뒤이은 색마의 말에 나는 얼굴을 구겼다.
아니.
알려준다고? 색마 이 새끼 제정신인가?
“왜 그런 표정이지? 후후. 의형제를 맺는다면 괴룡 자네는 남이 아닌 내 아우가 아닌가? 형제한테 무공 구결을 알려주는 것쯤이야, 전혀 어렵지 않지! 후후후후. 원한다면 자네도 여인이 되어 쾌락을 누리는 것도 어떤······.”
“안 할 거다. 그런 건.”
“그럼 왜 알려달라고 한 거지?”
끔찍한 발상에 내가 말허리를 자르자, 색마가 내게 반문했다.
전생에 규화보전을 대성하여 현경의 경지에 오른 고수로서, 솔직히 불완전한 규화보전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TS 절학에 대한 무학적 호기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내가 사실 규화보전을 잘 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환관이 아니니까.
‘······어쩌면, 사형의 석녀(石女) 기질을 고칠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사형이 석녀라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달거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나중에 당영령에게 따로 진실을 전해 듣기도 했기 때문이다.
석녀라는 사실은 사형에게 있어서 콤플렉스일 터이다. 특히 아이를 낳는 것이 의무인 중세 무림 유교 랜드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남자를 완전히 여자로 바꾸는 TS 절학이라면, 사형의 석녀 기질을 고치는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아무튼.
내가 하기 싫다고 던진 걸 이렇게 받아칠 줄은 몰랐다.
“여인에 대해서 좀 더 잘 알기 위해서요.”
“후후. 그렇다면야. 의형제의 잔을 나눈다면 알려주도록 하지.”
색마가 요염하게 웃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색마와 의형제라니. 빌어먹을. 하지만 퇴로는 없다. 본인 독문 절학을 왜 남에게 알려줘? 그걸 알려준다는데 이쪽에서 거절하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색마가 건네는 의형제의 잔을 받아들였다.
“나와 괴룡은 비록 태어난 날은 다르지만, 이제 형제처럼 서로를 아끼고, 한날한시에 함께 죽기를 맹세하겠소이다.”
“나도 마찬가지요.”
복숭아 숲도 아니고 주지육림에서 의형제의 잔을 나눠 먹을 줄이야.
미치겠군.
나는 술잔에 담긴 독주를 들이키면서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뭐.
그래도 마교에 머무르는 동안은 좀 편해지겠지?
*
같은 시각.
천마전 대전.
천마신교의 총단이 내려다보이는 장소. 거기에 천마가 있었다.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를 감지한 천마가 뒤를 돌았다.
천마의 시야에 연소월의 모습을 한 적사월이 들어왔다.
“왔군.”
천마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성이 희박해진 천마였지만, 본인이 천마신교의 수장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그렇기에 적사월의 침입은 중대한 문제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파제일인이었다. 신교의 총단을 어지럽히는 변수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염왕. 네 요청대로 독대를 수락했다. 이제 말해라. 대체 왜 후기지수로 위장해서 본교로 온 거지? 그리고, 괴룡을 감싼 이유는 뭐지?”
천마의 시야에 적사월이 보였다. 같은 경지의 고수이니만큼, 천마신안으로도 적사월의 감정을 읽어내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괴룡.
그 단어를 언급한 순간, 적사월의 얼굴에 동요가 일어나는 것 정도는 당연히 파악할 수 있었다.
거기에 얼굴이 붉어지는 모습까지.
‘설마.’
천마가 속으로 생각했던 가정을 다시 꺼내왔다.
“그건······.”
적사월이 운을 뗐다. 그녀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적사월의 시야에 천마의 모습이 담겼다. 적사월이 두근대는 심장을 가라앉히면서 말했다.
“본녀가 천지회의 지령주이기 때문이지. 천마. 너도 눈이 있으면 알겠지만, 혈교가 다시 암중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너희 마교는 혈교와 가장 깊이 관련된 세력이 아니더냐? 정마대전 때는 아예 혈교한테 장악당한 상태였고. 그러니 지령주인 본녀가 직접 마교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오는 일이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적사월의 침착한 말에 천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천지회.
그 신비세력에 대해서는 천마 역시 알고 있었다. 더불어 적사월이 말한 신교의 치부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혈교와의 연결 고리는 본좌가 천마의 자리에 오르며 전부 정리했다. 남은 간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그런 잔챙이 놈들 따위, 본좌가 전력을 드러내면 전부 쓸려나갈 잔챙이에 불과하다.”
“오마(五魔) 중 한 명이 혈교의 간자라 하더라도?”
적사월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가 마교로 위장 잠입한 이유. 그건 이철수를 따라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마교의 오마(五魔) 중 한 명이 혈교의 협력자라는 극비 첩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적사월의 말을 들은 천마는 웃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래도 본좌는 전혀 상관없다. 본좌가 지배하는 신교에서 본좌를 이길 수 있는 자는 그 누구도 없으니까. 아니, 차라리 혈교 놈들이 오마 전부와 손을 잡고 본교에 반역을 일으켜줬으면 좋겠군. 그렇다면 이 따분한 천마 생활이 약간이나마 재미있어질 터이니 말이야.”
천마의 웃음소리와 함께, 그의 몸에서 흑색 기파가 사방팔방 비산했다.
“고수 중에 기인 아닌 자가 없다더니, 천마. 네놈도 어지간한 기인이로군.”
그 모습을 본 적사월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배신자가 있다면, 색출해야 마땅한 일인데.
그걸 그냥 단순히 재미있다는 이유로 방관하다니. 적사월로서는 천마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역시 정상인이 아니다.
적사월이 혀를 차던 그때.
“염왕. 질문을 하나 더 던지도록 하지.”
천마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말해라.”
“설마 아니겠지만. 혹시 괴룡을 여인으로서 연모하고 있나?”
천마의 질문을 들은 순간.
적사월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의 적색 눈동자가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