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누가 날 부른다고?
천마가 미간을 좁혔다.
아까 적사월 때도 그랬지만, 이철수의 행동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세인들은 너를 괴룡이라고 부르는데, 어째서 검룡이라는 별호를 자처하는 거지? 별호란 본인이 아닌 타인이 붙여주는 법. 아무리 무림맹에서 검룡이라는 별호를 받았다 한들, 그 별호가 쓰이지 않으면 무슨 의미란 말이냐?”
천마의 시선이 이철수를 향했다.
그의 말은 옳았다. 천마 본인만 하더라도 이립이 되기 전에 현경의 경지에 올라 전대 천마의 목을 자르고 스스로 천마의 자리를 쟁취해서 천마라 불리지 않았던가?
“저는 한 사람의 검객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제 별호도 괴룡이 아니라 검룡인 쪽이 이치에 맞습니다. 무림맹주 도황 대협께서 직접 하사한 별호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철수는 천마 본인 앞에서 전혀 당황하지 않고 매끄럽게 혀를 굴렸다.
천마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의 안법인 천마신안(天魔神眼)이 발현되었다. 하지만 천마신안의 통찰로도 이철수의 진의를 파악할 수는 없었다.
이런 경우는 드물었다.
천마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가 없군.’
천마의 시야에 이철수의 모습이 담겼다.
원래는 천무지체인 유진휘 말고 다른 후기지수들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던 천마였다.
사파제일인이 후기지수인 척 위장하고 나왔을 때도 살짝 놀랐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철수.
눈앞의 저 소년은 천마의 흥미를 끌 정도로 특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초절정의 경지에 불과한 소년이, 강제로 의념을 끌어올려 유진휘와 함께 합격진을 펼쳐서 맞섰다.
그때 천마신안으로 살핀 이철수의 내력 수발은 초절정의 수준이 아니었다.
화경, 아니 어쩌면 그 이상.
현경의 심득을 가진 자가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 내력 수발이었다.
거기에 천마인 그조차 본심을 읽을 수 없는 표정에다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두려워하는 천마인 그 앞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본인의 소신을 말하는 대범함까지.
그 모습은 마치.
‘······한 명의 간웅(奸雄)을 보는 것만 같군.’
간신배와 영웅의 풍모가 섞인, 한 마디로 간웅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이라던 조조의 현신을 보는 것만 같은 모습. 거기에 육체와 정신의 경지가 어긋나는 모습까지.
천마의 자리에 오른 백무량이었지만, 이런 상대는 처음이었다.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무저갱의 심연을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전력도, 감정도, 생각도 전혀 알 수 없다. 환영을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그 실체를 드러낼 수밖에 없게 만들어주면 그만이다.
우웅.
천마의 단전에서 천마신공의 내력이 치솟았다. 패도적인 기운이 송곳처럼 이철수를 향했다.
분명 천마신공의 기도를 인지했을 터인데도, 이철수의 표정 변화는 없었다.
그는 오히려 웃었다. 광기와도 가까운 그의 모습에 천마의 미간이 좁혀졌다.
천마신교의 정점에 군림하는 천마인 그였다. 그런데 그마저도 압도하는 듯한 저 기세. 천하를 지배하는 것 같은, 정점에 오른 듯한 간웅의 기도와 천마를 비웃는 얼굴은 열여섯의 소년이 보일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천마신공의 기도가 이철수를 향하던 그때.
“이 소협!”
와락.
연소월이 이철수의 품에 안겼다. 그 모습을 보던 천마의 눈동자가 떨렸다.
“소녀, 무서워요!”
품에 안긴 연소월, 아니 적사월이 이철수의 허리를 끌어안으면서 덜덜 떨었다. 천마는 어이가 하늘로 날아가는 걸 느꼈다.
‘대체 왜 저러는 거지?’
그것도 다른 장소도 아닌, 천마 본인 앞에서 사파제일인이 후기지수에게 매달리는 꼴을 보이다니.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이 따로 없었다.
[천마. 기세를 거둬라. 이 이상 시험을 지속하겠다면, 본녀와 한바탕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겠다.]
천마의 머릿속에 적사월의 전음이 울렸다.
천마는 일단 기세를 거두면서 전음을 날렸다.
[염왕. 그 애송이와 대체 무슨 관계길래 네가 직접 감싸는 거지? 너는 사파고 이철수는 정파지 않느냐? 설마 진짜로 연모하기라도 하는 건가?]
설마.
있을 수 없는 가능성이지만, 연모가 아니라면 설명이 불가능한 것도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후기지수의 품에 안겨 얼굴을 붉히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진심처럼 보였다.
그 철혈의 사파제일인이, 사내를 싫어한다는 천하제일미인이 누군가를 사모한다니.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연모라니? 그, 그그럴리가 있겠느냐? 그저 연기일 뿐이다. 흥. 너는 몰라도 된다. 본녀가 천마 너한테 본녀의 사정까지 일일이 전부 말해줘야 하느냐?]
머릿속에 적사월의 목소리가 울렸다. 천마는 기세를 거뒀다.
어차피 오늘만 날이 아니다. 언젠가는 이철수, 저 정체불명 사내의 진모를 파악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천마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말했다.
[알겠다. 나중에 따로 부를 테니 기다리도록.]
[흥. 진작에 이럴 것이지.]
적사월의 투덜대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천마는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본교에 골칫덩이들이 들어왔구나.’
신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상들이었다.
하지만.
씨익.
천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러니 한층 재미있어지겠군.’
예상 밖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따분하기 짝이 없는 신교의 삶이었다. 신교의 모두가 그의 발아래 조아리며 절대복종했다.
신교를 떠받치는 기둥인 오마(五魔)도, 신교를 오랜 세월 지배해온 마도 명문인 칠대마종(七代魔宗)도 천마인 그를 떠받들기만 했다. 그는 살아 있는 신이었다.
그리고 신의 자리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천마신교는 강자존의 철혈율로 지배된다. 삼류 마인이라도 천마의 목을 따면 천마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 당장 천마 백무량 본인부터 그렇게 천마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가 전대 천마를 죽이고 천마의 자리에 오른 이후, 그 누구도 그에게 도전하지 않았다.
천마 본인도 알고 있었다. 그의 재능은 지나치게 뛰어났다. 숨만 쉬어도 강해지는 수준이었다. 내로라 하는 기재들도 천마 본인에 비하면 범재(凡才)나 다름없었다.
압도적인 재능은 역으로 그를 고립시켰다. 앞으로도 그 누구도 그에게 도전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천마는 교주의 자리에 오른 직후부터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무의미한 삶이었다.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정지된 세계 속에서 무의미한 삶을 반복할 뿐이었다. 차라리 중원 침공이라도 하는 쪽이 좀 더 삶의 흥미를 느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오늘.
천무지체는 물론 괴룡 이철수에, 이상한 위장 신분을 한 사파제일인까지.
모두 오랜만에 느껴보는 삶의 자극이었다. 그렇기에 천마는 이 모든 상황이 즐거웠다.
“좋아. 흑백양도의 후기지수. 즐거운 만남이었다. 다들 배정된 숙소로 돌아가도록. 후기제일을 가리는 천마무제는 보름 뒤에 개최될 예정이니, 그전까지 본교에서 마음껏 머무르도록. 본교 총단 내부라면, 천마비고를 제외하면 어디든 돌아다녀도 좋다. 마음대로 보고, 느껴라. 본교의 저력을.”
천마는 품에서 네 개의 흑옥패를 꺼내 허공섭물로 네 명의 후기지수에게 던졌다.
“누군가 가로막는다면 본좌가 직접 하사한 이 흑옥패를 보여주도록. 그리고 유진휘.”
천마의 부름에 유진휘가 고개를 들었다.
유진휘와 시선을 마주한 천마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래.
바로 저 눈이었다.
범인과는 다른 재능을 지닌 천재의 눈빛. 생기 너머에 감춰진, 불합리한 재능을 타고난, 이 연약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공허함을 지닌 괴물의 눈빛이 천마에게는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천마는 느꼈다. 유진휘는 그와 동류다.
유진휘 또한 그처럼 타인의 감정과 생각에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천마 본인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모든 것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고, 인간성이 희박해진 그와는 달리 유진휘는.
그에게는 아직 인간성이 상당히 남아 있었다.
‘어째서 그런 건지는, 지켜보면 알겠지. 천무지체.’
천마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축객령을 내렸다.
세 명의 후기지수와 사파제일인 적사월이 예를 취하면서 물러났다.
드르륵.
미닫이문이 닫히고, 홀로 남은 천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문 너머로 신교 총단의 전경이 펼쳐졌다.
넓고 척박한 땅, 신강을 남북으로 나누는 천산 산맥, 그 중심에 자리한 천마신교의 총단.
신강의 모든 부가 모이는 도시를 바라보면서 천마는 뒷짐을 지며 웃었다.
그건.
그가 오랜만에 느낀 흥미이자, 삶의 의지를 표현한 웃음이었다.
휘잉.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천마의 흑색 장포가 휘날렸다.
*
천마와의 대면이 끝났다.
그가 나를 바라보는 눈길이 끈적끈적해서 마음에 안 들기는 했지만, 천마 놈의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으니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어휴. 상상하는 것도 끔찍했다.
“이 소협······. 후후후후. 다행이어요.”
옆에 달라붙은 적사월이 내게 말했다. 천마가 기세를 쏘아낼 때, 나는 충분히 맞설 자신이 있었다.
적사월이 끼어들면서 무산됐지만 말이다.
나는 적사월의 팔짱을 풀어내면서 말했다.
“이제 곧 숙소요. 연 소저도, 그리고 우리 동생도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으니 여독을 풀고 푹 쉬시길.”
천마는 친절하게도 천마전 내부에 존재하는 접객용 별원을 우리의 숙소로 내어주었는데, 정파는 정파대로 사파는 사파대로 따로 별원을 배정해줬다.
“우, 우리 동생이라면 나, 날 가리키는 것인가?”
내 말을 들은 위소련이 내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있지?”
“그, 그건······.”
“흥! 이 소협! 너무한 거예요! 왜 소녀는 동생 취급 안 해주는 거예요?!”
위소련이 뭔가 말하려던 그때, 적사월이 그녀의 말허리를 자르며 내게 말했다.
뭐?
동생 취급?
적사월 본인 나이가 얼만데 지금 나에게 동생 취급이라니.
오히려 내가 누나 취급을 해줘야 할 판국이다.
“그럼 저는 사형과 함께 배정받은 별원으로 가보겠습니다. 사형. 가자.”
“응.”
지금 적사월을 상대해봤자 손해다. 나는 사형의 팔목을 잡고 적사월과 위소련에게 빠르게 작별 인사를 건넨 뒤에 우리에게 배정받은 별원으로 향했다.
천마전은 말이 천마전이지 전각이 아닌 성채에 가까운 대규모 건축물. 그런 천마전 내부의 별원은 조그마한 저택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규모가 화려했다.
별원에 도착한 나는 사형의 손을 놓으려 했지만, 사형이 역으로 내 손을 옭아맸다.
“후후. 이제 사제랑 나, 둘뿐이야.”
사형이 웃었다. 절세미녀, 아니 지금은 절세 미소년인 그녀가 웃자 주변이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코 끝에 들꽃 향기가 스쳤다.
“사제, 우리 오랜만에 사형제의 우애를 다져볼래?”
사형이 내 귓가에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애를 나누다니?
모습은 남장 모습인데, 속은 미소녀인 사형이 이런 말을 하니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사형의 입가에 아름다운 미소가 걸렸다.
남자인데, 겉모습은 남자인데.
사형의 진짜 성별을 알고 나니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머리가 하얘졌다.
내가 뭐라 말하려던 그때.
달칵.
별원의 문이 열렸다.
“괴룡님!”
흑색 무복을 입은 마인 하나가 내게 달려왔다.
아니.
분위기 좋았는데.
그리고 나 괴룡 아니라니까.
나는 마인을 바라봤다. 그가 내게 짧게 목례를 취하면서 말했다.
“색마님께서 괴룡님을 뵙고자 하십니다!”
뭐?
누가 날 부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