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연기겠지?
[염왕. 네가 왜 여기 있지?]
연소월, 아니 적사월의 머릿속에 오만한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천마였다.
그가 의념을 통해 직접 말을 전달한 것이다.
적사월의 시야에 천마의 모습이 들어왔다. 태사의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은 채로 그녀를 내려다보는 천마가 보였다. 좁혀진 미간과 은은하게 묻어나는 경멸의 감정이 느껴졌다.
연소월이 살짝 웃었다. 적사월은 속으로 비웃었다.
[역시 천마는 천마로구나. 본녀의 무위를 바로 간파하지 못했다면 실망했을 것이야.]
적사월이 전음을 날렸다. 적사월의 전음에 천마의 손이 살짝 떨렸다.
[염왕. 올해 나이가 진갑이라 들었다. 본좌는 후기지수를 불렀지, 후기지수로 위장한 노괴를 부른 것이 아니다. 정말로 노망이 난 건 아니겠지?]
천마가 연소월을 바라보면서 전음을 던졌다.
그동안 교류를 전면 중단하고 침묵을 지켰던 마교가 처음으로 문호를 개방한 상황이다.
정파와 사파가 수작을 부릴 거라고는 예상했다.
하지만 설마 사파제일인 본인이 직접 수치를 무릅쓰고 마교로 올 줄은 천마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노망이라는 말을 들은 적사월의 마음이 부글부글 끓었다.
‘본녀보다 나이도 한참 어린놈이······. 노망 운운하다니, 광오하기 짝이 없구나!’
올해 천마의 나이는 불혹을 넘은 마흔다섯.
건방진 어린 년인 검후보다도 어린 나이였다.
[물론 아니다. 그리도 본녀가 신경 쓰인다면, 나중에 본녀한테 독대를 청해라. 천마.]
연소월의 모습을 한 적사월의 말에 천마가 미간을 좁혔다.
독대를 청하라니. 사파제일인다운 오만함이었다. 적진이나 다름없는 마교 한복판에서도 적사월은 당당했다.
‘역시 미친 건가······.’
고수 중에서는 기인(奇人)이 많다는 속설이 있었다. 하물며 그 고수들의 정점인 현경의 절대고수라면 기인 중의 기인이라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적사월과 같은 경우는 천마도 처음 보는 사례였다.
그렇다고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다. 사도련주라는 신분에, 현경의 무력까지 지녔다. 천마인 그와도 용호상박(龍虎相搏)을 다툴 무위였다. 물리적으로 제압하기도 어렵고, 다른 수단을 사용하는 것도 여의치 않다.
천마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어쨌거나 사파제일인이다.
독대할 자격은 있었다.
[그러도록 하지.]
[진작 그럴 것이지. 그리고 절대 안전 보장, 정말이겠지?]
염왕 적사월의 질문에 천마 백무량이 답했다.
[물론. 본좌의 이름으로 직접 내린 명령이다. 본교에서 본좌의 명령을 거역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흑백양도 후기지수의 절대 안전 보장.
괴룡 이철수의 요구사항을 직접 들어준 건 천마였다. 천마의 확답을 받은 적사월의 눈이 살짝 가늘게 떠졌다.
[흐응.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더라도 괴룡은 함부로 건드리지 마라. 천마.]
[괴룡? 왜 천무지체도 흑사룡도 아닌 괴룡이지?]
천마의 시선이 괴룡을 향했다. 괴룡 이철수. 용봉지회의 우승자. 천무지체 유진휘의 사제.
그가 알고 있는 정보는 거기까지였다. 물론 정파답지 않게 솔직하고 시원한 기행이 신교의 교도들에게 호감을 사고 있다는 정보도 있었지만, 천마에게는 아무 쓸모 없는 정보였다.
그런데 사파제일인이 대체 왜 괴룡에게?
사파제일인 적사월과 괴룡은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정파와 사파 사이였다. 천마 본인이 억지로 모으지 않았다면, 사실상 만나지도 못했을 사이였다.
옹호할 거라면 차라리 같은 사파인 사파제일 후기지수 흑사룡 위소련을 옹호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어째서?
오랜만에 순수한 호기심이 천마의 마음속에 가득 차올랐다.
천마의 반문을 들은 적사월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가 전음으로 말했다.
[연소월은······. 괴룡 이철수를 사모한다······. 그렇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천마. 더 자세히는 묻지 말도록. 물론 이철수 말고 다른 후기지수 일행도 건드리지 마라. 본녀가 지켜볼 테니.]
적사월은 얼굴의 홍조를 빠르게 가라앉히면서 뒤에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 모습을 본 천마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그렇게 되어있다.
‘대체 무슨 뜻이지, 설마.’
천마는 만약의 가능성을 떠올렸다가 얌전히 가라앉혔다.
그래.
아무리 사파제일인이 기인이라도, 설마 본인보다 한참은 어린 애송이를 마음에 둔 건 아닐 것이다.
신교의 색마(色魔)조차 하지 않는 일이다.
그녀 말대로 그냥 연기겠지.
천마는 그렇게 생각하며 전음을 보냈다.
[마음대로 해라. 잠시 뒤에 부를 테니 기다리고 있도록.]
[흥.]
연기······. 맞겠지?
적사월의 대답을 무시하면서 천마의 눈길이 마지막으로 유진휘를 향했다.
준걸(俊傑)이라는 말이 더없이 잘 어울리는, 그림으로 그린 듯한 정파의 협사가 거기 있었다.
오똑한 이목구비, 송옥과 반안을 연상케하는 미모의 사내였다.
천마의 투명한 눈동자가 유진휘를 훑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기대 이상이군.’
안법을 통해 훑어본 유진휘의 자질은 과거의 천마 본인, 그 이상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천고일재(千古一才). 천년에 한 번 나온다는 기재라는 평을 받을 만했다.
‘열일곱에 화경의 경지를 돌파하다니.’
유진휘는 경지를 숨기고 있었지만, 천마의 시야에는 그의 무위가 훤히 보였다.
올해 나이 열일곱인 유진휘는 화경의 경지에 이른 절세고수였다.
열아홉에 화경의 경지에 오른 본인보다 무려 두 살 어린 나이였다.
천마의 눈동자에 무료함이 사라졌다. 천마의 몸에서 의념이 일어났다. 초대 천마가 창안하고, 역대 천마들이 다듬어 완성한 최상승 마공.
당대 천마 백무량의 천부적인 자질로 또다시 개량된, 천마신교가 보유한 일만 마공의 정점.
천마신공의 진기가 천마의 의념에 반응해 패도적으로 일어났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
단전에서 솟구친 천마신공의 기세가 태사의에 앉은 천마의 몸에서 일어난 그때.
[천마!]
적사월의 목소리가 천마의 귓가에 울려퍼졌다.
[시험이다. 해칠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고, 한 발 물러서도록.]
천마가 적사월을 말 한마디로 물러서게 만들었다. 천마신공의 압도적인 기파가 대전을 짓누르듯 가득 메운 그때.
“······.”
유진휘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투명한 눈동자가 태사의에 앉은 천마를 똑바로 바라봤다.
‘또 시험이야.’
천고의 자질을 지닌 그녀였다. 천무지체. 절세고수들은 천하에 보기 드문 재능을 시험하기를 좋아했다.
서문세가의 진천검왕이 그랬고, 사파제일인 염왕 적사월이 그랬으며, 검마 또한 그러했다.
그러니 천마 역시 당연히 그러할 것이었다.
‘천마라.’
사고 가속으로 느려진 체감 시간 속에서, 유진휘는 시야에 천마를 담았다.
마교.
오십년 전, 정마대전으로 공동파를 급습하여 멸문 직전까지 해를 입힌 사문의 원수.
천마는 그 원수의 우두머리였다. 공동파의 실전된 절학을 내걸지 않았다면, 원수의 땅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천마의 몸에서 폭발적인 기도가 일어나는 모습이, 천마의 체내에서 반응하는 내공의 모습이 유진휘의 기감에 고스란히 잡혔다.
태어날 때부터 타인과 다른, 기(氣)를 눈으로 볼 수 있는 기감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유진휘였다. 체내는 물론 공기 중의 기의 흐름도 유진휘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역혈이로군.’
일만 마공의 정점에 오른, 최상승의 마공. 정파의 신공(神功)과도 비견되는 천마신공의 움직임을 유진휘는 눈에 담았다. 그녀의 뛰어난 오성이 천마신공의 흐름을 역산(逆算)했다.
역혈을 통해 내공의 폭발력을 배가하는 건 공동파의 절학과도 닮았다. 사부의 가르침대로, 마교의 마공과 공동파의 절학은 역혈기공을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하지만 지향하는 바는 달랐다. 역태극을 추구하는 공동 절학과는 달리 마교의 마공은 역천(逆天)을 추구한다. 섭리를 거스르는 마기가 천마의 몸에서 피어올랐다.
‘역천이 아니야.’
하지만 천마신공은 단순한 역천이 아니었다. 파천(破天)이었다. 섭리를 거스르는 게 아니다. 섭리를 무너뜨리는 힘이다. 모든 걸 파괴하는 패도적인 힘의 파도가 그녀를 향해 몰아쳤다.
천마의 안광이 반짝였다.
시험이었다. 하지만 천마의 기도에 담긴 살기는 진짜였다. 그녀가 막지 않으면, 일행이, 나아가 사제가 다칠 것이다. 그렇기에 앞장서야 했다.
언제나 사제를 지키리라 약속했다. 그러기 위해 손에 넣은 힘이었다. 천하제일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그래서 그의 품에 안기리라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천마 따위는 당연히 넘어야 했다. 넘지 못하면, 천하제일도 될 수 없었다.
유진휘가 이를 악물면서 혼원일기공을 일으킨 순간.
덥석.
누군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보지 않고도 알았다. 그 감촉의 주인.
그건 사제.
이철수였다.
*
나는 사형의 손을 잡았다.
사형의 눈이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시야를 앞쪽으로 돌렸다.
하여간.
무림 고수라는 놈들의 행동 패턴은 왜 이렇게 똑같은지 모르겠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전부 시험을 못해서 안달이다.
우리 사형이 실험체냐고.
[사제, 어째서? 내가 지켜줄······.]
머릿속에서 사형의 목소리가 울렸다.
[저는 괜찮습니다.]
나는 사형에게 전음을 보냈다.
천마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나는 오만하게 앉아 있는 천마를 똑바로 바라봤다. 천마.
위험인물이다. 우리 사형을 보기 위해서 후기제일을 가리자는 명분을 내세워 흑백양도의 후기지수를 마교로 불러들인 인물이다.
유일한 호적수가 될 가능성을 보유한 사형을 향한 천마의 집착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어떻게든 분산해야 했다.
그러니 내가 나선다. 나는 사형과 손을 붙잡고 혼원일기공을 같이 끌어올렸다.
천마의 기도가 나를 압박했다. 온몸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이를 악물었다.
[사형. 우제와 함께 합격진을 펼치는 겁니다. 그리고 사형이 언제나 절 지켜줄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저도 이제부터는 밥값 좀 할 생각이니까요.]
둘이서 천마를 상대한다. 내 말을 그대로 알아들은 사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혼원일기공의 기도를 해방해서 나와 파장을 맞췄다.
그녀와 내가 나란히 서면서 일시적으로 합격진이 형성됐다. 나와 사형의 내력이 서로 공명하며 증폭되었다.
나는 혼원일기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그와 함께 현경의 심득으로 의념을 강제로 움직였다. 울컥.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핏덩어리를 삼키면서, 폭발적인 내력을 그대로 체외로 발산했다.
천하를 짓누르며 세계를 파괴할, 압도적인 천마의 내력이 혼원일기공의 기운을 담은 합격진이 그리는 혼원의 묘리와 부딪혀 상쇄되었다.
파츠츠츠츠츠츠츠츳!
스파크와 함께 기파가 사방팔방으로 비산했다. 사형의 눈동자가 안광을 발했다. 그 모습을 본 천마의 눈썹이 꿈틀했다.
“흐, 흐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짝.
천마가 박수를 쳤다.
대전을 메운 압도적인 마기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짝, 짝, 짝, 짝.
천마가 박수를 이어갔다.
그가 유진휘를, 아니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괴룡 이철수.”
천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너, 그냥 단순한 백도의 후기지수가 아니로군?”
천마가 내게 정색하면서 말했다. 그의 몸에서 은은한 기도가 피어올랐다.
나는 천마를 바라보면서 웃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천마 선배. 저는······. 명명백백한 백도 정파 제일의 후기지수, 검룡 이철수니까요. 당연히 단순한 후기지수가 아니지요. 물론, 괴룡은 더더욱 아닙니다.”
내 말을 들은 천마의 얼굴이 이상해졌다.
아니.
뭐 문제 있어? 나 괴룡 아니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