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괴룡(怪龍)
신강(新疆)
옛 당나라 시대에는 서역(西域)으로 불렸던 새외의 대지.
타림 분지, 천산 산맥, 중가리아 등으로 구성된 넓은 땅이자 동서 교역로의 요충지.
옛 흉노(匈奴)가 지배하던 거친 땅.
태조 주원장이 추방한 마교는 옛 흉노의 터전이었던 서역 땅에 정착했고, 그 강력한 세력으로 원주민들과 서역 대지 전체를 정복한 뒤, 이 땅을 새로이 얻은 땅이라는 의미에서 신강(新疆)이라 다시 이름 붙였다.
그 신강 천산에 자리한 마교 총단이야말로 나와 일행들이 가야 할 목적지였다.
일주일 동안 준비 시간이 끝난 뒤, 나는 일행들과 함께 공동파 본산을 출발했다.
일행 구성원은 단 네 명뿐이었다.
사파 무림을 대표하는 연소월, 위소련과 정파 무림을 대표하는 나와 사형.
공동산에는 괴의 당영령과 사매, 그리고 사부가 남아 공동파 본산을 지키고 있었다.
‘의술은 돌팔이지만 당영령의 무위가 화경인 건 사실이니, 유사시에 밥값 정도는 하겠지.’
그게 아니라면 돌팔이를 받아들인 의미가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일행을 데리고 돈황을 지나 마침내 제국의 국경을 넘어 신강에 도착했다.
이제부터 마교의 땅이었다.
마교는 말이 문파지 신강이라는 넓은 지역을 지배하는 국가나 마찬가지였다.
휘이이이이잉.
척박한 대지에 모래바람이 흩날렸다.
“으윽······.”
시야를 가리는 모래바람에 위소련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내 사천에서 살아온 그녀였다. 척박한 신강 땅은 익숙하지 않겠지.
하지만 나와 사형은 이미 척박한 감숙성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신강의 환경에도 익숙했다.
‘천산까지 얼마 안 남았군.’
그렇게 모래바람을 견디며 황무지를 달리고 있던 그때.
“사제. 저 멀리서 누가 오고 있어. 고수야.”
사형이 내게 말했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가 오고 있다고? 내가 기감을 확장한 순간.
저 멀리서 다가오는 강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정파의 고수들과는 다른 패도적이고 거친 기운.
마교의 고수였다.
아마도 우리를 맞이하러 나온 모양. 나는 손을 들어 수신호를 보냈다. 정지의 수신호였다.
달리던 말이 멈춘 그때.
무시무시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휘몰아치던 모래바람이 갑작스럽게 가라앉았다. 명백히 인위적인 현상, 압도적인 기세의 중심에는 한 중년인이 있었다.
“그쪽이 정파와 사파의 애송이들이로군.”
갈색 피풍의에 삿갓을 쓴 채로, 허리에는 한 자루 검을 찬 남자.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얼굴은 낯이 익었다.
전생에 용모파기로 본 적이 있던 얼굴이었다.
‘검마(劍魔)인가.’
천마 아래 마교를 떠받치는 화경의 다섯 고수. 오마(五魔)의 일좌를 차지하는 검마였다.
그의 뒤로 흑색 무복을 입은 마교의 고수들이 보였다.
검마 직속 무력대인 혈천검마대겠지.
안 봐도 뻔하다.
“본좌는 검마라고 한다. 지존께 너희 애송이들을 천산까지 인도하는 중임을 맡았지.”
검마가 오만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했다.
“유진휘요.”
검마의 말에 사형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네놈이 정파에서 공동신협이라 불리는 유진휘로군······.”
검마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의 몸에서 칼날 같은 기세가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본 사형의 몸에서 흑색 기세가 마주 일어났다. 파츠츠츠츠츳!허공에서 두 사람의 기세가 서로 맞부딪히며 기파가 사방팔방으로 비산했다.
검마가 기세를 거뒀다. 그의 말라비틀어진 입술이 비틀렸다.
“정파치고는 제법 쓸 만한 기세를 가진 애송이로군. 그 옆에는 사파의 후기지수인 흑사룡, 휘봉이겠고. 그리고 그쪽이······.”
검마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그의 시선을 받으면서 어깨를 당당하게 폈다.
그렇다.
나는 무려 무림맹 공인 검룡(劍龍)이었다. 흐흐흐. 마교에서조차 이 검룡의 위명을 알아줄 줄이야. 역시 용봉지회는 우승하고 봐야 할 일······.
“······이번 용봉지회에서 우승한 괴룡 이철수인가.”
하지만 검마의 입에서 튀어나온 별호는 검룡이 아닌 괴룡이었다.
아니.
왜 괴룡이지? 나는 검마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검마 선배. 나는 괴룡이 아니라 검룡이오.”
그것도 그냥 검룡이 아니다.
무려 무림맹주 도황이 직접 인증한 정품 검룡인 것이다.
“······하하하하하하하하! 괴룡! 네가 했던 수많은 기행은 이 신강 땅에까지 전부 전해졌다. 매일 밤마다 정파의 유망한 아가씨들을 품고, 비무마다 아가씨들의 옷을 벗겨 희롱했다더군. 본교의 색마(色魔)도 네 소식을 듣고 감탄을 금치 못했어. 그런데 어찌 네가 검룡일 수가 있단 말이더냐?”
검마가 나를 바라보면서 웃었다.
뭐?
대체 마교에는 얼마나 왜곡된 소문이 돌고 있는 거지? 어이가 없네.
게다가 색마라니? 색마(色魔)는 검마와 함께 오마(五魔)의 일좌를 차지하는 색공의 절세고수.
그런 인간이 대체 왜 나에게 관심을?
이러면 안 된다.
마교의 아리따운 소저들에게 색도를 전파하려던 내 원대한 계획이!
내가 뭐라 하려던 그때.
“검마.”
유진휘의 차가운 목소리가 황무지를 울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유진휘의 눈동자에 초점이 없어졌다.
“······내 사제를 모욕하는 말은 용서할 수 없소.”
유진휘의 몸에서 폭발적인 기도가 일어났다. 그녀의 몸에서 일어난 기도가 순식간에 황무지를 장악했다. 휘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기도를 정면으로 받아친 검마가 웃었다.
“단순한 애송이가 아니었군. 유진휘.”
검마의 몸에서 기도가 일어났다. 두 절세고수가 진심으로 피워낸 기파가 사방팔방을 헤집었다.
“지금 여기서 싸울 수는 없지. 마음만 같아서는 지금 당장 검을 뽑고 싶지만, 지존의 명령이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영광으로 알고 지존께 감사하도록. 유진휘.”
먼저 물러난 건 검마였다. 그가 기세를 거두자, 사형도 기세를 거뒀다.
“출발하지.”
검마는 더 이상의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가 지시하자 고수들이 우리를 호위하듯 에워쌌다.
그렇게 우리는 검마를 따라 천산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
신강 천산.
하늘을 향해 뻗은, 새하얗게 물든 만년설 봉우리가 끝없이 이어지는 산맥.
그야말로 십만 대산이라고 불러도 아깝지 않을 풍경이 펼쳐진 고원(高原) 지대에 마교 총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산맥을 배경으로 수없이 들어찬 고루거각(高樓巨閣), 그 아래 있는 집들과 수많은 주루, 객잔들은 문파라기보다는 도시에 가까웠다.
하남성 낙양에 있는 무림맹 총단보다 더 거대한 규모의 마교 총단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를 향했다.
“저쪽이 흑백양도의 후기지수들인가?”
“이번에 본교의 후기지수와 함께 후기제일을 가린다더군!”
“저쪽이 말로만 듣던 괴룡 이철수인가?”
“괴룡이라니! 위선자 같은 정파 무림에도 저런 보기 드문 인재가 있었구만!”
“괴룡은 정파가 아닌 신교의 후기지수라고 해도 믿겠어!”
“색마님께서 괴룡한테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소식도 있네.”
“기대되는구만!”
인파들 사이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절반이 내 이야기였다. 나를 보고 괴룡이니 색룡이니 부르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안 좋은 호칭과는 반대로 마교도들은 나를 제법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정파인데 정파답지 않게 솔직히 욕망을 밝힌다.
정파보다는 마교에 어울린다.
같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평가를 내게 내리고 있었다.
아니 이것들이 내가 왜 마교야? 누가 봐도 나는 정정당당하고 의협(義俠)을 지키는 백도 정파의 자랑스러운 후기지수.
얼마 전 용봉지회에서 승리하여 백도제일 후기지수라는 타이틀까지 따지 않았던가? 나는 마교도가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교 총단의 번화가를 가로질러, 마교 총단에서도 가장 높은 건물.
마천루(摩天樓)라고 해도 될 정도로 위압적이고 웅장한, 전각보다는 내성(內城)에 가까운 곳으로 안내되었다.
천마전(天魔殿).
그렇게 쓰인 정문이 우리가 도착하자 묵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지존께서 너희들을 기다리신다. 의관을 정제하고 목욕재계를 하면서 지존과의 대면을 준비하도록!”
검마는 그런 말만 남기고 우리를 한 명씩 각자 독방으로 배치했다.
독방에는 시비들과 하인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의 시중을 받으면서 눈을 감았다 떴다.
이제 곧.
강호를 삼분하는 세 현경의 고수, 우내삼존의 마지막 일원인 천마 백무량.
그와 만날 수 있다.
나는 천마 백무량의 정보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면서 머리에 동백기름을 발랐다.
*
천마전 최상층.
신교 총단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천마의 권위를 상징하는 대전(大殿).
마(魔)의 형상이 새겨진 거대한 흑색 기둥이 박혀 있는 이곳의 상단에 자리한 태사의에는 무료한 표정을 지은,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자가 앉아 있었다.
천마신교의 교주. 살아 있는 신으로 숭배받는 당대 천마.
백무량이었다.
“천마강림! 만마앙복! 신교천하! 천세 천세 천천세! 지존을 뵙습니다!”
천마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무료한 눈동자를 아래로 내리깔았다.
서쪽에서 수입한 푹신한 양탄자 위에 엎드려 신교의 예법인 오체투지를 하고 있는 사내.
검마가 거기에 있었다.
“흑백양도 후기지수 일행이 지금 천마전에 도착했나이다. 지존을 뵙기 위해 의관을 정제하고 목욕재계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검마의 보고를 들은 천마의 공허한 눈동자에 희미한 총기가 반짝였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렇군.”
사실 검마가 말하지 않아도, 정사의 후기지수들이 도착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현경의 절대고수. 신교의 살아 있는 신으로 등극한 천마였다.
그는 기감을 통해 진작부터 이철수 일행이 천마전에 들어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곧 그들이 올 것입니다.”
“그래. 수고했다. 물러나라.”
“알겠습니다. 지존이시여.”
천마의 축객령을 받은 검마가 종종걸음으로 물러났다. 다시 대전에 홀로 남은 천마가 눈을 감았다.
천무지체.
달리는 천고일재라고 불리는 유진휘. 어쩌면 따분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그의 인생에 유일한 호적수가 될지도 모르는 사내.
그가 어떤 인간인지 보고 싶다. 천마의 마음속에 오랜만에 기대감이라는 낯선 감정이 피어올랐다.
나쁘지 않다.
천마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눈을 뜬 그때.
“지존이시여! 흑백양도의 후기지수가 도착했사옵니다!”
대전 문밖에서 경계를 서는 무인의 목소리가 천마의 귓가에 울렸다.
“들라 하라.”
천마가 오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르륵.
미닫이 문이 열리고, 목욕재계를 끝낸 흑백양도 후기지수 일행이 들어왔다.
탁.
문이 닫혔다.
신교의 교도들과 달리 오체투지를 행하는 일 없이 허리를 꼿꼿이 세운 네 명의 소년소녀들이 천마의 시야에 들어왔다.
천마 역시 미리 용모파기를 숙지해두었기에, 그들이 누군지 잘 알았다.
‘이쪽이 괴룡, 저쪽은 흑사룡, 그리고 저 소녀는······.’
천마의 시선이 연소월과 마주친 순간.
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연소월······. 이 아니군.’
현경의 끝자락에 도달한 천마의 기감이 경종을 울렸다.
눈앞의 소녀는 후기지수 따위가 아니다. 화경의 고수도 아니다.
그 이상······.
어쩌면 천마 본인과 같은 수준의 무위를 지닌 절대고수다. 확실하다. 그리고 천마가 아는 한, 그런 절대고수 중에서 이 자리까지 행차할 위인은 단 한 명뿐이다.
‘설마······. 염왕?’
적사월.
그녀밖에 없었다.
체형도 외모도 다르고, 무위도 숨기고 있지만 절대고수인 천마의 시야에는 전부 보였다.
사파제일인이 왜 여기, 그것도 족히 40년은 더 어린 후기지수들 틈에 끼어서 왔단 말인가?
‘미친 건가?’
천마의 미간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