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환관이 남성을 되찾음-154화 (154/171)

154화 새로운 후기지수

‘이철수라니.’

위소련의 머릿속에 정사지쟁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정사지쟁의 일시를 통보하기 위해 자진해서 공동파 본산으로 향했을 때.

산문 앞에서 그와 만났을 때.

맛없는 차를 먹었을 때.

정사지쟁 당일.

그녀보다 낮은 경지, 하수였던 이철수가 보여줬던 날카로운 일검이 떠올랐다. 아울러 그때 중인환시리에 상의가 찢어졌던 기억도.

내기에서 치욕적으로 패해서 그를 오라버니······.

‘오라버니······. 라니······.’

위소련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를 만나면 다시 오라버니라고 불러야 한다. 잊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잊지 않았다.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의 고백이 아직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강호 무림을, 천하를 아우르는 영웅이 된 뒤에 그녀를 책임지겠다는 이철수의 말이 아직 귓가에 선명했다.

심장이 뛰었다. 사실은 다시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정파고 그녀는 사파.

거기다 정사지쟁에서 패배한 대가로 흑룡방은 감숙성에서 영구 철수했다. 그와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었던 셈이다. 그래서 가슴에 묻어두고 있었다.

사실은 의문도 품고 있었다.

이 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위소련은 그날 이철수의 그 말 이후 매일 같이 그 말을 곱씹었다. 게다가 이철수는 정사지쟁 이후 정파 무림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항산대전 때는 소검후를 이겼고, 용봉지회에서는 정파제일 후기지수인 검룡 진패선을 이기고 새로운 검룡의 자리에 올랐다.

‘정파제일 후기지수라니······.’

검룡 진패선.

자타공인 사파제일기재라 불리던 흑사룡이었다. 호사가들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과 함께 오르내리는 정파제일 후기지수 검룡 진패선은 당연히 알았다. 각각 정파와 사파의 미래를 대표하는 동량지재(棟梁之材)다. 호승심을 안 가질 수가 없는 상대였다. 언젠가 정사의 미래를 걸고 서로 무를 겨룰 날이 오리라 믿었다.

그런 진패선을 완벽히 격파했다 했다. 그것도 서로 알몸이 되어서까지.

‘알몸이라니. 그 망측한 노출 버릇을 아직도······.’

귀를 막으려고 해도, 나날이 이름값이 높아져 가는 이철수의 소식은 계속해서 그녀에게 전해졌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도 없었다.

2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이철수를 향한 감정은 이제 애증이 마구 뒤섞여서,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나 그녀 본인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빌어먹을······.’

그런데 오늘.

그와 동행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혼란스러웠다.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은 세차게 고동치고 있었다.

다시 만날 수 있다.

설마 날 잊은 건 아니겠지? 그렇게 중인들 앞에서 옷을 찢어놓고, 책임지겠다고 말해놓고.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날 이후 그의 주변에는 여인이 더 많아졌다. 하지만 흑사룡 본인은 여전히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여인다운 모습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오히려 사내를 더 닮은 선머슴 같은 여인.

흑사룡 위소련의 시선이 적사월을 향했다. 궁극의 아름다움이 거기 있었다. 그녀처럼 아름다웠다면, 그렇다면 그가······.

“갈 것이냐?”

적사월의 요염한 목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일깨웠다. 위소련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겠습니다.”

천하제일 후기지수.

그런 명분으로 그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갈 수 있다.

그 모습을 본 적사월이 웃었다.

그녀는 흑사룡이 품은 연심을 이미 알고 있었다. 흑사룡이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천산으로 흑사룡을 보내는 것이다. 흑사룡은 사파의 후기지수. 정파의 그 건방진 년들과는 다르게 그녀의 말을 성실하게 따르는 충복이다. 사도련주인 그녀에게 감히 반항할 수도 없었다. 진소소, 그 건방진 년과 맞서려면 검후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흑사룡이 필요했다.

물론 흑사룡만 보낼 생각은 없었다.

‘본녀도 가야겠구나.’

천하제일 후기지수를 가리자.

천마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세 번째 위장 신분인 하오문주 백면암군의 둘째 제자, 연소월의 신분으로 천산으로 향해야 할 때였다.

‘오랜만에 후기지수 노릇 좀 해야겠어.’

40년도 더 전, 후기지수 시절을 떠올리면서 적사월은 웃었다.

진소소도, 검후도 없는 천산에서.

방년(芳年)의 나이로 돌아가 이철수의 마음을 가질 것이다.

적사월의 적안이 반짝였다.

*

소림사 달마동.

나는 그곳에서 공동파로 향하기 전, 마지막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그건 신승과의 만남이었다.

여전히 어두컴컴한 달마동 내부. 황촉(黃燭)의 촛불이 아스라이 어둠을 밝히는 가운데, 나는 여전히 신승이 따라주는 맛없는 엽차를 마시고 있었다.

“천산으로 간다고 들었네.”

“아직 확정된 건 아닙니다.”

“천마한테 절대 안전 보장을 요구했다고 했던가? 허허허허. 천마는 자네의 제안을 받아들일 걸세. 당대 천마는 그런 사람이니까.”

신승이 초탈한 웃음을 지었다.

신승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당대의 천마에게는 천마의 권위도, 어쩌면 천마신교의 존재도 별 의미 없을지도 몰랐다.

나는 신승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들여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가야 할 곳이었으니까요.”

“역시 침착하군. 용봉대회에서 우승했다 들었네. 축하하지. 검룡.”

검룡.

그 말을 들은이 입가가 다시 씰룩댔다.

“물론 세인들은 그대를 검룡이 아닌 괴룡으로 부르겠지만 말일세.”

하지만 신승의 다음 말을 들은 나는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 땡중이?

“감사합니다.”

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누르면서 영혼 없는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때.

스윽.

그가 품에서 비급 하나를 꺼냈다.

낡은 표지에 한자로 법륜성왕기(法輪聖王氣)라 적힌 서책이었다.

“이건······.”

비급을 본 나는 말끝을 흐렸다.

법륜성왕기. 전생에서도 들어본 적 없던 무학이다.

“노납이 오늘 자네를 이 자리에 부른 건, 법륜성왕기를 전해주기 위함일세. 법륜성왕기는 소림의 절학은 아니니 안심하시게. 그저 내 개인적인 심득을 정리해서 만들어낸 잡기일세.”

잡기.

신승은 그렇게 표현했지만, 딱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절학이었다.

이걸 준다고?

물론 소림의 절학은 아니라고 신승이 말했으니, 내가 받아도 상관은 없기는 하다. 그런데 본인 심득을 정리해서 만든 무공이라면서.

“······법륜성왕기는 혈마와 그의 종복들을 상대할 때를 대비하여 얼마 전 완성해낸, 마기, 요기와 상극인 항마법력을 다루는 절학일세. 자네가 처음이기는 하지만, 자네 말고도 천지회의 요인들한테 배포할 생각이었네.”

뒤이어 신승이 설명을 덧붙였다.

처음부터 대(對) 혈교 전용 무공으로 개발되었다면, 신승이 내게 법륜성왕기라는 절학을 넘기는 것도 이해는 갔다.

“천마의 절대 안전 보장 명령이 내려지기는 하겠으나, 그것이 모든 상황에서 그대를 지켜줄 수는 없을 걸세. 더욱이 마교는 혈교와 깊은 연관을 지닌 용담호혈. 마교는 본 회에서도 미지의 영역에 속하는 장소이니, 호신기 하나 정도는 챙겨가는 것이 좋을 걸세.”

마교와 혈교의 관계.

마교의 극단주의 분파가 따로 떨어져 나간 것이 혈교다.

적어도 원말명초에 일어난 혈교의 기원은 그러했다.

태조 주원장이 대명제국 개국 이후 마교를 중원에서 새외(塞外)로 쫓아낸 것도, 혈교와 마교의 연관성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신승의 말에는 틀린 구석이 없었다.

“······정마대전 당시의 마교는······. 혈교한테 조종당하는 괴뢰 조직이었네. 노납의 손으로 직접 처단한 전전대 천마는 혈공을 연성했었고 말일세. 당대의 마교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입에서 정마대전의 비사가 흘러나왔다.

아니.

이건 몰랐다. 정마대전 당시의 마교가 혈교의 괴뢰 조직이었다고?

그렇다면 정마대전의 진짜 흑막도······.

혈교였다는 말인가?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혈교가 마교를 조종해 정마대전을 개전한 목적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혈마가 무림을 일통하고, 나아가 또다시 반역을 일으켜 하늘에 오르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필 마교를 택한 건, 혈교가 마교에서 갈라져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마교는 정파와는 다르다. 마교의 규율은 강자존 약자멸, 금기는 오직 배교(背敎) 하나뿐이다.

정파와는 달리 마교는 무력 그 자체를 숭상한다. 금지된 사술과 마공이라도 마교에서는 아무런 편견 없이 수용되며, 강해질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방법도 전부 허용된다. 인의를 져버린 극악한 마공은 물론 정파의 정종무학이건, 사파의 사공이건, 심지어 혈교의 혈공조차 허용된다. 괜히 마도(魔道)가 아니다.

그러니 혈교의 간자가 숨어들기에 최적화된 장소가 바로 마교다.

하지만 천지회와 신승의 활약으로 정마대전은 마교의 패배, 정파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럼 당대 천마도 혈공을 연성한 혈교의 하수인인 겁니까?”

“그건 아닐세. 당대 천마는 혈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네. 오히려 그 반대일세. 당대 천마는 혈교 잔당을 마교에서 전부 몰아낸 상태네. 하지만 마교 내부에 혈교의 잔당이 남아 있을 가능성은 있네. 전대 천마 때까지만 해도 혈교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으니 말일세.”

확실히 당대 천마는 아웃라이어였다.

아무리 강자존 약자멸의 철혈율로 지배되는 마교라지만, 거기도 결국 인간이 결성한 조직.

당연히 정파의 구파일방 육대세가처럼 마교 내부에서도 상승 마공을 독점해서 강자를 배출하는 무맥(武脈)과 명가(名家) 같은 마도 명문이 존재했다. 마교는 고위 간부부터 천마까지 대부분 마도 명문 출신이었다.

마교에서도 학연 혈연 지연의 꽌시가 없으면 삼류 마인으로 인생이 끝나는 것이다. 실력주의라고는 하지만, 실상은 내부 카르텔이 그들의 절학을 통해 강자를 배출하며 고위직을 사실상 독점하는 형태였다.

하지만 당대 천마는 삼류 마인 출신이며, 그 어떤 마도 명문과도 연이 없었다. 당연히 혈교와도 아무런 연관이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혈교가 청담회 같은 짓까지 해가면서 정파를 장악하려고 용을 쓴 이유를 이제 알겠군.’

당대 천마의 등극으로 마교에 대한 지배력이 약화되었으니, 정파를 지배하려 드는 거겠지.

그나저나 정사마로 대표되는 무림삼세(武林三勢) 중 하나가 혈교의 손아귀에 떨어져 있었다니.

머리 굴리는게 좀 1차원적이긴 해도 무시할 수 없는 포텐을 지닌 흑막 놈들이다.

스윽.

신승이 내게 노리개를 하나 건넸다.

“비상 상황에는 이 노리개를 부수게. 그렇다면 천지회에서 지원 병력이 도착할 걸세.”

“알겠습니다.”

나는 평범해 보이는, 하지만 미약한 기가 느껴지는 노리개를 받아들었다.

특수한 술법 처리라도 되어 있는 모양이다.

“······부디 몸조심하게. 아미타불. 그대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겠네. 무운을 비네.”

신승이 진지한 표정으로 내 무운(武運)을 빌면서 염주를 굴렸다.

“별일 없을 겁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소림사에서 볼일은 전부 끝났다.

다음 행선지인 마교······. 로 향하기 전에 우선 즐거운 나의 집, 공동파 본산으로 향할 때였다.

*

감숙성 공동산 아랫마을.

곤화루 최상층.

그곳에서 막 도착한 전서구에 매달린 서신을 펼쳐본 백면암군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서신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이번에 천마가 주최하는 천하제일 후기지수를 가리는 무림대회에 적사월······. 그러니까 그의 사부가 백면암군 본인의 제자인 연소월의 신분으로 참여하겠다는 일방적인 사부의 통보였다.

스승 대신 공동산을 지키고 있던 백면암군의 가면이 떨렸다.

두통이 치밀어올랐다.

연소월.

백면암군의 둘째 제자라고 세간에 알려진, 적사월의 또다른 위장신분.

그 신분을 이제 와서, 마교로 가는데 활용할 줄은 몰랐다.

사파제일인이 후기지수로 분장하다니.

분명 이것도 이철수 때문이겠지.

“후우. 진정하자. 진정해.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사부님!”

후기지수로 참여하겠다니, 이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사부가 자리를 비우면, 관련 업무는 모조리 제자인 그와 사도련의 총군사에게 떠맡겨진다.

이 이상의 업무 지옥은 사양이었다. 얼마 전 첩으로 들인 미동(美童)과 잠자리 한 번 못해보고 죽어라 일만 하다니,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그런 말을 목구멍 너머로 삼키면서, 백면암군은 떨리는 손으로 답장을 써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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