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아녀자?
[······공동파의 절학을 되찾고 싶다면 천산으로 와서 마교의 후기지수와 겨룰 것.]
편지 내용을 본 내 얼굴이 살짝 굳었다.
마교에 공동파의 절학이 있는 건 알고 있었다. 실제로 1회차에서 입적(入寂)한 신승의 뒤를 이어 백도제일인이 된 사형이 혈혈단신 마교로 쳐들어가서 오마(五魔)를 전부 때려눕히고 천마와 대면, 그와의 대결에서 승리해서 공동파의 절학을 모두 되찾은 건 백도 무림의 전설로 남아 있었다.
이번 회차에서도 마교 쪽에서 흘린 소문으로 추정되는, 공동파의 절학이 마교에 보관되어 있다는 소문을 접한 적 있다.
‘보나마나 천마가 흘린 거겠지.’
당대 천마 백무량.
염왕 적사월, 신승 원극대사와 함께 강호 무림을 삼분(三分)하는 현경의 절대자.
강호 무림의 핵심 인물인 만큼, 당연히 그에 대한 정보는 팬티 색깔까지 전부 기록되어 있었다.
천마지체(天魔之體)의 근골을 타고난 당대 천마 백무량은 사형만큼은 아니지만 초대 천마와 비견될 정도로 마교 역사상 천재 중의 천재.
10대에 화경, 이립이 되기 전에 현경의 경지를 돌파한 그는 전대 교주의 목을 치고 천마의 자리에 올랐다. 사형처럼 태어날 때부터 타인과 다른 근골, 시야, 재능을 타고난 천마는 타인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고독하고 따분한 삶을 살았다.
그가 바란 건 호적수. 전생에서 사형이 혈혈단신으로 마교에 쳐들어와 오마(五魔)를 박살내는 걸 방관한 이유도, 비공개 대결에서 패배한 이후 사형에게 순순히 약속대로 공동파의 비급을 송두리째 내어준 이유도 사형을 본인의 호적수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천마가 유일하게 흥미를 보인 상대는 본인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다던 천무지체의 소유자, 사형이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그가 전생에서 찾은 유일한 호적수가 사형이었던 셈이다.
이번 생에도 사형이 천무지체라는 소리를 듣고 천마가 사형을 꾀어내기 위해 수를 쓴 것일 터.
안 봐도 비디오다.
뭐 소문이야 그냥 씹으면 된다. 그냥 소문이니까. 그것도 마교 쪽이다. 굳이 반응해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천마가 손수 사인한 친필 서한까지 보내서 공개 도발을 하면 그건 다른 문제다. 공동파와 마교는 정마대전 이후 불구대천의 원수 관계. 그런데 이런 도발에 아무 반응 없이 있는다면, 그것 또한 공동파의 체면에 해가 되는 일이다.
마교에게 쫄려서 뒤졌구나 하고 전 무림인들이 우리 공동파를 손가락질할 것이다.
어떤 식이건 리액션을 취해야 했다.
“공동파뿐만이 아니야. 무림맹과 사도련에도 마교 명의로 비슷한 내용의 서찰을 보냈다더군. 천산에서 천하제일 후기지수를 가리자고 말이야.”
뒤이은 도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황의 선글라스가 반짝였다. 호탕한 미소를 짓던 그의 얼굴에 드물게 진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설마하니 그 천마 놈이 이런 식으로 우리 백도 무림을 도발할 줄은 몰랐군.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도황의 질문에 나는 살짝 고민했다.
무림맹과 사도련이야 천마의 친필 서한이 온 것도 아니니 무시해도 상관없겠지만, 공동파에는 하필 천마 놈이 직접 사인한 편지가 와서 문제다.
천마 이 새끼 이 정도로 진심이었나? 전생과는 다르게 사형이 훨씬 일찍 강호 출도를 해서 문제다.
“불구대천의 원수가 감히 본 파에 서신을 보냈으니,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겠지요. 물론 적의 아가리로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천마의 이름으로 절대적 안전 보장을 받아내지 못하면 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어차피 마교는 공동 절학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한 번은 반드시 들러야 할 장소.
이참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천마의 이름으로 완전 안전 보장 정도는 받아야겠지만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안 갈 생각이다.
내가 마교 놈들의 뭘 믿고 순순히 들어간다는 말인가? 돌려 말하자면 사형 얼굴 보고 싶으면 이 정도 성의는 보이라는 뜻이다.
천마 입장에서도 마교와 적대관계에 놓인 정파의 후기지수 따위를 보호하려고 절대 안전 보장 명령을 하달하는 건 본인의 권위를 훼손하는, 마교에서도 상당한 정치적 부담을 지는 일이다.
천마가 걸어온 가불기를 내가 역으로 천마에게 걸어버리는 셈이다.
나야 내 제안을 천마가 안 받으면 그걸 핑계 삼아 마교로 안 가서 좋고, 천마가 내 제안을 받으면 어차피 갈 곳 미리 가서 좋고.
아무 손해도 없는 셈이다.
“맹주님께서는 마교의 서신에 반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천마가 제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저와 사형이 공동파와 백도 무림을 대표해서 천산으로 가겠습니다.”
나는 도황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내 말에 도황이 웃었다.
“후후후후후후. 자네가 그렇게 해준다면야 나야 좋지.”
우리만큼은 아니지만, 도황 역시 마교의 서찰을 받고 난감한 처지에 놓였을 터이다.
백도 무림의 거두로서 마교의 이름으로 온 공식 서찰에 반응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렇다고 정파의 미래인 후기지수를 위험한 마교 한복판에 보낼 수도 없다.
백도 무림의 체면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그런데 내가 백도 무림을 대표해서 마교로 간다면, 맹주인 도황은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다.
물론 공짜로 해줄 생각은 없었다.
“대신 본 파에 대한 맹의 지원을 늘리고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 주십시오.”
마교가 얼마나 위험한 장소인데.
생명 수당도 없이 거기 가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러니 최대한 무림맹에게 유무형의 지원을 뜯어내야 했다.
“이를 말이던가? 당연히 그래야지. 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검룡!”
물론 도황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본인이 하기 곤란한 일을 대신 해준다고 약속한 데다가, 공동파의 영향력이 확대된다면 그만큼 서문세가의 영향력이 축소되니 도황의 입장에서도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무림맹은 백도 무문의 연합기구. 대명제국 시대의 무림맹이 국가 공인 기관이라는 특권 때문에 권위가 강하다고는 하지만, 구파일방 육대세가의 권위를 능가할 수는 없었다.
구파일방 육대세가의 유서 깊은 역사와 강력한 전력 때문도 있고, 현실의 유엔이 강대국의 기부금으로 운영되어 그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무림맹도 재정 절반 이상을 구파일방 육대세가의 기부금으로 충당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따라서 평시의 무림맹과 구파일방 육대세가는 정파 무림의 주도권을 가지고 줄다리기하며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태조 주원장이 무림맹을 상설기구로 만들고 단서철권을 내린 것도 무림이 좋아서가 아니라 무림맹 설립으로 강호 무림을 갈라치기 해서 서로 물어뜯게 만들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공작이었다.
특히 도황은 밑바닥 낭인 출신이었기에 더더욱 구파일방 육대세가의 힘을 약화하여 그들에게 목줄을 채우고 무림맹이 정파 무림의 주도권을 쥐는 걸 원했다. 명분을 쥐자마자 무림맹 집법원을 움직여 모용세가를 뒤집은 것도 그래서였다. 당연히 육대세가의 일좌를 차지하는 서문세가의 세력이 약해지는 건 도황에게 이득이었다.
그러니 이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서로 윈-윈인 거래였다.
탕탕.
도황이 호탕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검룡.
그래 내가 검룡이라는 말이지. 그 호칭을 도황의 입으로 들으니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흐흐흐흐.”
“훗, 후후후후후후후후후!”
나는 도황의 말을 들으면서 아까와는 달리 상남자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도황 역시 선글라스를 고쳐 쓰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후후후후후후후! 검룡 자네! 아까 그 아녀자 같은 호호호 웃음소리보다는 훨씬 낫군! 이제야 사내다운 웃음이야!”
그가 내 어깨를 두드리면서 웃었다.
용봉지회가 제대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
정파 무림의 축제.
용봉지회가 막을 내렸다. 중간에 잠깐 모용세가와 청담회 일로 소란이 있었다. 이 일로 무림맹주 도황이 직접 무림맹 집법원을 움직여 모용세가가 풍비박산나고 청담회에 참여한 후기지수 전부가 용봉지회 출전권을 박탈당할 정도였다.
정파를 떠받치는 기둥인 구파일방 육대세가 후기지수 대부분이 청담회 사건에 엮여 탈락한 탓에 이번 용봉지회는 오히려 정파의 치부만 드러냈다는 우려가 세간에 가득했다.
하지만 그런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몰락 문파인 공동파 소속 이철수의 파죽지세 연승과 전(前) 검룡 진패선과의 화려한 결승전은 역대 용봉지회를 통틀어 최고의 화제를 몰고 왔다.
거기에 이철수의 용봉지회 승리와 공동파의 화려한 부활까지, 마치 한 편의 경극을 연상시키듯 완벽한 서사를 지닌 용봉지회의 기승전결에 천하가 들썩였다.
더불어 이철수와 진패선의 용봉지회 결승에 대한 무용담도 빠르게 중원 전역으로 퍼졌다.
“글쎄 이번 용봉지회에서 공동파가 이겼다고 하는구만!”
“그 소식은 나도 들었네. 화산파의 검룡과 서로 알몸으로 싸웠다면서?”
“그런 망측한 비무는 처음 들어보는군!”
“공동괴협 이 소협이 용봉지회를 우승한 뒤, 도황의 일도를 받아내서 검룡의 별호를 하사받았다던데······!”
“검룡은 무슨! 괴룡이 딱일세!”
이철수의 공식 별호는 검룡(劍龍)이었다. 이번 용봉지회로 정해진 새로운 사룡오봉의 수좌를 차지한, 명실상부한 자타공인 정파제일 후기지수가 된 것이다.
하지만 중인들은 아무도 이철수를 검룡이라 부르지 않았다.
정파제일 후기지수 괴룡 이철수!
그것이 중인들이 이철수에게 붙인 별호였다.
“이번에 소림사가 공동파와 동맹을 맺었다더군.”
“모용세가의 새로운 가주가 공동파에게 대은(大恩)을 입었다고 감사 편지를 보냈다던데?”
“무림맹에서도 공동파를 호의적으로 본다더군! 용봉지회 상금뿐만 아니라 지원금까지 하사했다던데!”
“그뿐인가! 초절정의 신비고수인 일검유희는 물론 화경의 절대고수인 괴의마저 공동파에 식객으로 의탁했다고 하네!”
“이 정도면 공동파가 완전히 부활했다고 봐도 무방하겠군!”
공동파가 다시 강호로 출두한 이후 정사지쟁에서 승리하고, 항산대전에서는 소검후를 상대로 이겼으며, 용봉지회마저 승리했다.
더군다나 정파제일 후기지수로 등극한 괴룡 이철수는 도황의 일도(一刀)를 받아냈다 하지 않았던가?
그야말로 완벽한 공동파의 부활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렇게 강호에 소문이 돌던 그때.
“하지만 부활을 논하기에는 아직 이르네. 천마(天魔)가 공동파에 친필 서한을 보냈으니 말일세.”
“천산에서 천하제일 후기지수를 가리자는 그 서한 말인가?”
“공동의 절학을 되찾고 싶다면 천산으로 오라 했다더군!”
“어허, 공동파가 웅비하려는 순간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따로 없구만!”
“하지만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이네. 자파의 절학을 되찾으려면 원수의 제안이라도 따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공동파 본산과 정사 양쪽으로 보낸 마교의 편지가 천하를 다시 뒤흔들었다.
천하제일 후기지수를 가리자.
마교로 오라.
정마대전 이후 수십 년이 넘게 유지한 대외 침묵을 깨고 낸 마교의 첫 공개 선언은 구주팔황을 뒤흔들 파괴력이 있었다.
그리고 천마의 제안은 당연히 사도련주인 염왕 적사월의 귀에도 흘러 들어갔다.
사천성 중경.
안개로 유명한 도시답게, 오늘도 뿌연 안개가 끼어 있는 중경의 중심에 자리한 흑룡방 총타.
사파를 떠받치는 여덟 기둥, 사도팔문의 일좌를 차지하는 거대 흑도 방파.
흑룡방의 방주 집무실에 있는 태사의에는 지금 방주가 아닌 타인이 앉아 있었다.
검붉은 머리카락과 보석처럼 반짝이는 적안이 인상적인, 묘령(妙齡)의 외관으로 보이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녀.
사파제일인이자 사도련의 련주인 염왕 적사월이 거기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흑룡방주이자 화경의 고수인 광마도군 위천명이 원래 본인 자리를 빼앗긴 채 뒤에 서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광마도군이 아니었다.
적사월의 붉은 시선이 그녀 앞에서 살짝 긴장한 모습을 하고 있는 흑색 단발의 미소녀, 흑사룡 위소련을 향했다.
“네가 흑사룡이구나.”
적사월의 말에 위소련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시야에 적사월의 미모가 담겼다.
천하제일미.
사도련주가 그렇게 불린다고 소문으로 들었다. 미모 하나로 나라를 망국에 이르게 할 수준이라 들었다. 과장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대면한 적사월의 미모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경국지색이라는 사자성어가 적사월의 미모를 전부 형용하지 못할 정도로 폭력적인 미모였다.
무심코.
마음속에서 그녀를 질투하게 될 정도였다.
그녀보다 한참은 어린, 이철수와 동갑인 위소련의 흑색 눈동자에서 질투심을 읽어낸 적사월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그래, 모름지기 본녀를 보는 여인이라면 이래야지.’
용봉지회 참석은 적사월에게 상처만 남겼다. 특히 일검유희, 그 빌어먹을 년은 그녀를 앞에 두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굴욕이었다.
그래, 원래 위소련처럼 일검유희도, 소검후도, 검후도 이랬어야 했다. 여인에게는 질투를, 사내에게는 애욕을 들끓게 만드는 천하제일미. 그게 적사월이었다.
‘일검유희, 그년이 이상한 것이야.’
평소라면 귀찮게 여겼을 여인의 질투심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묘한 만족감을 느끼면서 적사월이 풍만한 가슴골 사이에서 편지를 꺼냈다.
“마교에서 본 련으로 보낸 서신이니라.”
부스럭.
위소련이 예를 갖추면서 적사월에게서 서신을 받아들여 펼쳤다.
마교에서 서신을 보냈다는 소문은 그녀도 들었다. 하지만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서신의 내용을 읽는 그녀의 귓가에 적사월의 말이 들려왔다.
“사파제일룡 위소련. 네가 사파를 대표해서 천산으로 가거라. 가서······.”
적사월이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마교의 동태, 그리고 너와 같은 사정으로 천산으로 향할 검룡 이철수의 정보를 수집하거라.”
적사월의 지시를 들은 순간.
아니,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철수의 이름을 들은 순간.
위소련의 몸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