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도황(刀皇)
무림맹(武林盟)
구파일방 육대세가를 위시한 천하의 백도 무문이 모여 만들어진 연맹.
무림사에는 수많은 무림맹이 존재했지만, 대부분 사마외도와의 무림대전에서 지휘 체계를 일원화하고 소통과 갈등 조정을 원활히 하기 위해 만들어진 임시 기구에 역할이라 권위가 크지 않았었다.
하지만 당대의 무림맹은 상설기구였다.
원말의 혼란기, 혼원검제 무극자를 초대 맹주로 하여 결성된 무림맹은 주원장군과 동맹을 맺고 혈교를 물리치고 혈세신마를 처단하여 대명제국을 개국하였다.
대명제국 태조 주원장은 강호 무림의 개국 공적을 인정하여 무림맹에 관무불가침의 상징으로 단서철권(丹書鐵券)을 하사하였고, 이 단서철권은 역대 무림맹주에게 대대로 전해지면서 무림맹을 상징하는 신물(神物)이 되었다.
이때부터 무림맹은 임시 기구에서 상설기구화되어 대명제국 역사 내내 백도 무문의 연합체 역할을 맡게 되었다.
무림맹은 국가 공인 합법 조직이고, 무림맹에 등록된 문파 역시 자연스럽게 국가 공인 합법 문파가 된 것이다.
이 국가 등록을 거부한 뒤가 구린 놈들이 사파고, 그런 놈들이 모여 만든 불법 사조직이 사도련이고 말이다.
명 건국 이전의 무림맹이 UN이었다면, 지금의 무림맹은 EU에 가까운 조직이라 할 수 있었다.
나름대로 국가 공인을 받은 조직이니만큼, 관부와 무림 사이의 가교 역할도 겸하고 있었기에 그 위세는 구파일방 육대세가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
특히 당대의 무림맹주 도황 임동립은 밑바닥부터 무림맹주까지 올라온 자수성가(自手成家)의 표본 같은 사내. 그만큼 뛰어난 정무 감각을 통해 백도 무문 간의 관계를 조율하며 정파 무림의 실질적인 수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 사내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도황이라.’
전생에서도 만나본 적 있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면서 나는 당천기를 따라 공동파 일행과 함께 무림맹 등봉현 지부로 향했다.
물론 말이 지부지, 실제로 역할은 출장소에 불과했기 때문에 전각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등봉현 지부를 포함한 하남 전역의 무림맹 지부를 총괄하는 무림맹 하남 분타는 등봉현이 아닌 하남에서 손꼽는 대도시 개봉에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맹주님께서는 이 소협과의 독대만을 원하시니, 다른 일행분들께서는 접객당에서 기다려 주시오!”
무림맹을 상징하는, 맹(盟) 자가 적힌 무복을 입은 무사가 이렇게 말했다.
뭐 정파의 한복판인데 별일은 없을 터.
나는 일행과 헤어져 전각 안쪽으로 들어갔다. 가장 큰 전각 앞에 선 무림맹 무사들이 보였다. 그들이 나를 맞이하자 예를 취하며 비켜서면서 문을 열었다.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내 시야에 그가 보였다.
현대와는 다른, 교과서에서나 볼 법한 중세 무림 스타일의 색안경을 착용한 거구의 남자.
도황 임병립이었다.
탁.
문이 닫혔다.
“후후후. 자네가 금번 용봉지회 우승자인 괴룡 이철수로군. 앉게나.”
전생에서 만났을 때와 똑같이 허물없는 모습과 태도로 자리를 권하는 도황.
나는 그와 맞은편에 앉았다.
쪼르르.
도황이 내게 직접 차를 따랐다. 그가 즐기는 싸구려 엽차(葉茶)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차를 들이켰다. 떫은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설마하니 자네가 검룡을 상대로 승리하고 용봉지회의 우승을 차지할 줄은 아무도 몰랐네. 이 나를 제외한다면 말이지. 후후후후후후후! 몰락 문파의 후기지수가 용봉지회를 우승한다니! 그야말로 한 편의 경극 같은 일이 아닌가? 구주팔황이 떠들썩하겠어! 안 그런가? 괴룡.”
도황의 눈동자가 여기로 향했다. 검은색 색안경, 그러니까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가 번뜩했다.
옛 송나라의 관료들은 재판에서 표정을 읽히지 않고 위압감을 주기 위해 선글라스를 착용했다던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했다.
“한 자루 칼로 천하를 평정한, 사해에 이름이 드높은 정파 무림의 거인(巨人), 무림맹주 도황 임 선배님을 만나 영광입니다. 괴룡이라는 별호는 누가 붙인 것입니까?”
“후후후후후, 하하하하하하하! 첫 질문이 별호를 누가 붙였냐니!”
내 말을 들은 도황이 웃었다.
그가 나를 바라보며 답했다.
“이 내가 붙였다! 괴룡이라, 이 소협한테 이보다 더 어울리는 별호가 어디 있으랴!”
그러니까.
그 빌어먹을 괴룡이 무림맹주가 직접 붙인 별호라고?
“괴룡보다는 검룡이 더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나는 뻔뻔해지기로 했다. 별호란 원래 자칭보다는 세인들이 붙여주는 별명.
하지만 용봉지회의 경우에는 조금 특수했다. 우승자를 포함해서 본선에서 두각을 드러낸 후기지수에게 무림맹이 직접 공식 별호를 하사하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공식 별호를 변경하는 것도 가능은 했다. 눈앞의 무림맹주가 승인한다면 말이다.
“검룡이라, 검룡의 별호를 왜 갖고 싶지?”
번뜩.
도황이 착용한 선글라스가 반짝였다.
왜 갖고 싶냐니, 그야 아리따운 소저들을 내 걸로 만들고 나아가 강호 무림에서 인기 많은 사내가 되기 위해서는 검룡의 별호는 필수였다.
검룡.
이 얼마나 듣는 것만으로 소저들의 심금을 울리는 별호란 말인가? 반면에 괴룡? 지나가던 사람마다 쯧쯧 저놈이 괴룡이래. 미친놈 아니야? 용봉지회 우승에서 나체 비무를 했대. 같은 뒷담이나 들을 쓰레기 별호다.
하지만 이런 말을 무림맹주에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미리 생각해둔 명분을 내뱉었다.
“저는 검객입니다. 한 명의 검객으로서 검(劍)이 붙은 별호가 제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문의 재건을 위해서도, 괴룡보다는 검룡의 별호를 받아야 합니다. 공동파에 괴룡이 탄생한 것보다는, 검룡이 탄생한 쪽이 사문의 명성에 더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
내 말을 들은 도황이 호탕하게 웃었다.
헐렁하게 입은 상의 사이로 보이는 탄탄한 가슴 근육이 들썩였다.
“후후후후후후후, 흐하하하하하하하! 그래! 소협의 말이 맞네! 확실히 괴룡보다는 검룡이 더 중인들한테 내세우기 좋은 별호긴 하지! 우승자가 원한다면 해줘야지. 대신.”
도황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이 나의 일도(一刀)를 받아내면 해주겠다. 괴룡.”
도황의 얼굴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어차피 용봉지회 우승 포상 중에 무림맹주의 한 수 가르침이 들어가 있기는 했다.
그래서 무림맹주와 서로 무를 겨뤄보기는 해야 했는데, 뭐 그거 하는 김에 검룡으로 닉변권까지 준다면 나야 마다할 이유가 없다.
“알겠습니다. 맹주님. 그럼 한 수 가르침, 받겠습니다.”
“훗, 후후후후후후후. 말이 잘 통하는 사내라 다행이군! 우선 이거부터 받게나.”
슈욱.
도황이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던졌다. 약간의 경력이 담긴 주머니. 고수가 아니라면 받기 어려울 정도로 미묘하게 혈도를 노리고 날아오는 주머니를 나는 정확하게 손을 뻗어 받아냈다.
이것도 시험인지 뭔지겠지. 하여간 무림인 놈들은 왜 이렇게 내공 가지고 염병을 떨면서 허세를 부리는 걸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주머니를 여니 청량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주머니 안에 있는 건 대환단이었다.
“이번 용봉지회 우승자에게 내리는 상일세.”
용봉지회 우승 상품은 용봉지회를 개최한 문파가 제공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용봉지회가 어디서 열리느냐에 따라서 상품 또한 천차만별이었다.
상품은 개최 문파의 사정에 따라 영단(靈丹)이 될 수도, 아니면 신병이기가 될 수도 있다.
소림사에서 용봉지회가 개최되었으니 대환단을 내놓은 것이다. 만일 무당파에서 용봉지회가 열렸다면 자소단을 내놓았겠지.
뭐 지금의 나에게는 딱히 내공 증진으로도, 정력제로도 별 쓸모가 없기는 하다. 하지만 풍진강호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법. 혹시나 심대한 부상을 당할 때를 대비해서 대환단 하나 쯤 비상약으로 챙겨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감사합니다.”
나는 대환단을 품에 쑤셔넣었다. 아마 소림사 대환단 재고는 내가 다 털어가지 않았을까? 그 모습을 본 도황이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첫 번째 포상은 주었으니, 이제 두 번째 포상을 내려야겠군.”
한 수 가르침.
고수, 그것도 그냥 고수가 아닌 화경의 절대고수 무림맹주 도황이 내리는 가르침이다.
명문 정파의 후기지수라도 제발 내려달라고 부탁해야 할 수준의 가르침을 공짜로 내려주는 거니 강호 무림 업계에서는 포상이라고 할 만했다.
현경의 정신을 가진 내게는 딱히 포상은 아니었지만, 중요했다.
내 별호를 괴룡에서 검룡으로 세탁할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오게나.”
나는 도황의 뒤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서서 전각을 나섰다. 전각 뒤에는 연무장이 있었다. 돈 많은 무림맹답게 청석이 바닥에 깔려 있는 연무장에 선 도황이 도를 뽑아 들었다.
“약조대로, 본좌의 일도를 받아낸다면 소협의 별호를 괴룡에서 검룡으로 변경해주겠네. 후후후후후후, 흐흐흐하하하하하하하하!!”
미친 듯이 웃는 도황의 몸에서 압도적인 기세가 피어올랐다.
도황이 무림과 전장에서 수없이 사선을 넘나들며 정립한 독문무공인 혼천파황기(渾天破荒氣)의 기도가 피어올랐다.
경박한 목소리와는 반대로 화경의 절대고수다운 기도가 텅 빈 연무장을 꽉 채웠다. 압박감이 온몸에 밀려들었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도황의 무복 자락이 펄럭였다. 그의 도에서 회색 검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더니 줄기줄기 유형화되어 허공으로 뻗치기 시작했다
검사였다.
나는 혼원일기공을 운용했다. 굳어진 몸이 어느 정도 풀렸다. 스르릉. 철검을 뽑아들었다. 흑색 검기가 검을 휘감으면서 늘어지며 검사로 변했다.
“내력은 자네 수준에 맞춰줄 테니, 뒷말하면 안 되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도황의 말이 연무장을 쩌렁쩌렁 울린 순간.
번쩍.
회백색 섬광이 허공을 수놓았다. 뒤이어 흐릿한 도영 수십 개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어디가 허초고 어디가 실초인지 알 수 없는 공격. 찰나의 순간, 나는 사고를 가속하고 기감을 극대화했다.
나를 향해 쏘아지는 수십 개의 실선이 슬로 모션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뽑아든 검으로 복마검법을 펼치며 그중 딱 하나, 실체가 느껴지는 실선을 받아쳤다.
깡!반탄력에 손아귀가 찢어질 듯 아팠다. 깨문 입술에서 피가 쏟아졌다. 사고 가속이 풀리자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콰과과과과과과과!
폭음과 함께 나머지 실선들이 비무대를 헤집었다. 비싼 청석 바닥이 산산 조각났다. 기껏 차려입은 새 무복이 여기저기 찢겨 흩날렸다. 다행이 알몸 수준은 아니었지만.
“후우.”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검을 집어넣었다. 일도를 막아냈다. 도황의 표정이 일순간 멍해졌다. 그가 웃었다.
“정말 막아낼 줄은 몰랐군. 방금은 검룡, 아니 이제는 전(前) 검룡인 진 소협도 막지 못할 일격이었거늘······.”
그가 도를 집어넣었다. 도황이 선글라스를 만지면서 말했다.
“사나이로서 약조를 안 지킬 수는 없지. 이제부터 자네는 괴룡이 아닌 검룡일세! 전 검룡인 진 소협은, 뭐 얼굴이 제법 반반하게 생겼으니 옥룡(玉龍) 정도로 붙이면 되겠지! 하하하하하하하하!”
그가 내 곁에 다가와 어깨를 탕탕하고 치면서 말했다. 아니 별호를 이렇게 대충 정해도 되는 거야?
나는 검을 집어넣으면서 고개를 숙이며 예를 취했다.
“감사합니다! 맹주님!”
마침내.
수많은 억까를 물리치고, 드디어 검룡의 별호를 손에 넣었다. 이제 내 앞에는 장밋빛 미래, 미소녀들의 팬레터가 공동파 산문에 가득 쌓이는 꿈 같은 해피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 터.
벌써 기대된다. 정파 무림의 검룡인 이 나를 연모하는 수많은 정파 무림의 미녀들이!
“호호호호.”
나는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기쁨의 웃음을 내뱉었다.
그때.
“아, 물론. 맹에서 용봉지회를 통해 하사한 공식 별호는 그렇다는 것일세. 중인들이 자네를 검룡이라고 불러줄지는, 본좌도 장담은 못하겠군! 중인들의 입까지 전부 단속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니.
이 양반이, 좋은 날에 왜 이렇게 초를 쳐.
무림맹주라서 뭐라할 수도 없고 확.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그가 품에서 꼬깃꼬깃한 종이 하나를 꺼냈다.
“아, 그리고 자네한테 전해줄 첩보가 하나 있네.”
첩보?
나는 그가 꺼낸 종이를 펼쳤다.
거기에는 내 눈을 의심케 할 만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천마(天魔)가 공동파 본산에 친필 서한을 보냄. 내용은······.]
뭐?
누가 친필 편지를 보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