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새로운 식객
커플링?
이라는 생각이 순간 들었지만, 나는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런 생각을 했겠지만, 상대는 황상이다.
내 딸이자 동생 같은 존재였다. 그런 눈으로 볼 수 있을 리가. 황상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황상의 신분이 신분이다 보니, 1회차처럼 나랑 계속 24시간 붙어있을 수 없어서 반지를 건네준 거겠지.
게다가 전생에도 나와 같은 반지를 맞추지 않았던가? 반지뿐만 아니다. 팔찌, 목걸이 등등 수많은 아이템을 그녀와 같은 걸로 맞췄었다.
전생에 비하면 반지 정도야.
그렇게 생각하니 황상이 귀여워 보였다. 전생처럼 그렇게 하고 싶은 거겠지.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노야.”
덥석.
황상이 내 손을 잡았다. 그녀의 왼손 약지에 착용된, 나와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내 반지와 부딪혔다. 황상이 웃었다.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그녀가 전생에서도 종종 보여주던, 초점 없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반지를 보면서 언제건 짐을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 짐도······. 항상 노야를 생각하겠습니다.”
황상이 고혹적인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서로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언제나 함께입니다.”
코 끝에 화려한 꽃향기가 맴돌았다.
사형의 은은한 들꽃 향기와는 대조적으로 코를 찌를 것처럼 선명한 향기. 전생에서부터 맡은 익숙한 향이었다. 초점 없는 황상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날 속일 수는 없다.
아무리 황상이라도, 나와 떨어지기 싫은 거겠지. 전생에서 수십 년을 함께 24시간 동안 붙어 지내던 사이였다. 안 그러는 게 더 이상하다.
그러니까
떨어지기 싫은 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지금은 환관이 아니니까 어쩔 수 없다.
덥석.
나는 양 손으로 황상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알겠습니다. 꼭 기억하겠습니다.”
내 말을 들은 황상이 수줍게 웃었다.
그녀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이제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헤어질 시간······.”
황상이 말끝을 흐렸다.
나는 그녀의 손을 놓았다. 아, 하고 황상이 안타까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소신, 오랜만에 폐하를 뵐 수 있어서 즐거웠나이다. 폐하의 말씀대로 몸은 떨어져도 마음은 언제나 함께 있으니, 강호 무림에서도 폐하를 잊지 않겠습니다.”
나는 황상에게 예를 갖추면서 말했다.
“알겠습니다. 노야. 짐도······. 이제 어린아이는 아닙니다. 그러니······. 같은 하늘 아래 있다면 잠시 떨어져 있어도 괜찮습니다. 언제나 노야를 생각하겠습니다.”
황상이 다시 내 손을 잡아 일으켜주면서 말했다.
그녀가 웃었다.
[태화전의 보좌를 되찾을 그 날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황상이 전음을 보냈다.
태화전의 보좌. 황제의 자리에 오르겠다 선언한 황상. 놀랍지는 않았다. 그 자리는 원래 그녀의 자리였으니까.
[알겠습니다. 폐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내 말에 황상은 대답 대신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그날, 황상과의 만남은 마무리됐다.
*
황상과의 만남이 끝난 직후.
나는 현청에서 나왔다. 현청 대문 앞에는 일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하린, 서문청하, 당영령, 그리고 사형.
항상 같이 다니던 공동파 일행이었는데, 저 돌팔이는 왜 있는 거야?
“당 선배는 안 가십니까?”
용봉지회 메인 행사는 이미 끝났다. 남은 건 뒤처리 정도인데, 당영령이 동행할 필요는 없다.
아무리 그녀가 천하를 떠도는 돌팔이라지만, 어디까지나 사천당문 소속이 아닌가?
“영령이, 오늘부터 공동파 식객하기로 했어!”
내 말을 들은 당영령이 손을 흔들흔들 흔들면서 웃었다. 그녀의 트윈테일이 흔들렸다.
뭐?
공동파 식객?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어이가 하늘로 날아가는 기분을 맛봤다.
식객(食客). 현대 한국에서는 하는 일 없이 집에 빌붙어 먹고 사는 식충이를 뜻하는 부정적인 단어지만, 중세 무림에서는 다른 뜻으로 사용된다.
이세계 중세 무림에서 식객이란, 문도가 아닌 외부 무인이 문파에 머무르면서 평시에는 밥을 얻어먹고 문파의 후광에 힘입어 지내다가 전시에는 힘을 보태주는 일종의 용병 고수를 말하는 단어였다.
구파일방 육대세가쯤 되면 절정 이상의 고수도 식객으로 들어오기는 하지만, 화경의 절대고수가 식객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다.
화경의 절대고수면 굳이 문파에 식객 따위로 의지할 필요가 없다. 일가(一家)를 이뤄도 될 정도로 명성과 실력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영령이 식객이 된다면 환영을 해야 하지만.
내 눈에는 어째 저 빌어먹을 돌팔이가 현대 한국에서의 식객, 밥만 얻어먹고 빌붙어 다니는 식충이처럼 보였다.
“오빠. 영령이 왜 그런 눈으로 봐? 흥. 영령이가 얼마나 쓸모 있는데!
”“당가에서는 아무 말 없습니까?”
“응! 영령이도 이제는 과년(瓜年)의 처녀니까! 다 큰 소녀가 하는 일을 천기가 막을 수는 없지!”
내 말을 들은 당영령이 신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천기라는 이름은 현 당가주인 독절 당천기를 가리키는 거겠지.
당가에서도 이걸 허락해줬다고? 아이고 머리가 아파라.
“알겠습니다. 당 선배.”
내가 고개를 끄덕인 순간.
“누님!”
저 멀리서 우렁찬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당가 특유의 어두운 녹색 무복을 입은 중년인이 수염을 휘날리며 이쪽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누님! 본가를 내버려 두고 공동파에 식객으로 들어가겠다니요!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입니까!”
딱 봐도 불혹(不惑)은 훨씬 넘어 보이는 중년 사내가 당영령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 뒤로 녹의를 입은 무인들이 호위하듯 뒤따랐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당영령을 누님이라고 부를 사람이야 수도 없이 많지만, 중년인 중에서는 드물었다.
게다가 전생에서 본 용모파기와도 일치한다.
틀림없다. 눈앞의 저 남자야말로.
“뭐야? 누구 맘대로 누님이라고 부르래! 부르지 말랬잖아!”
당영령의 하나뿐인 남동생이자 사천당가의 가주.
암기공과 독공 양쪽 모두 초절정의 경지까지 연마한 초고수.
독절 당천기였다.
“아이고. 누님. 천하를 유랑하는 건 좋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공동입니까! 정착하려면 본가로 오셔야지요! 누님! 보고 싶습니다!”
당천기가 당영령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중년 사내가 겉보기 나이로는 15세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소녀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진다니.
보기 조금 민망한 광경이다.
“보고 싶다니, 흥. 거짓말하는거 다 알거든?! 이거나 받고 가버려! 영령이는 공동파 무조건 들어갈 거니까!”
스윽.
당영령이 품 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서 당천기에게 건넸다.
“누님, 이건······.”
“그동안 천하를 유람하며 연구한 의술과 독술 자료야. 흥. 이 정도면 됐지? 더 방해하면······. 알지?”
그녀의 몸에서 녹색 기파가 피어올랐다. 당영령의 트윈테일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당천기가 종이뭉치를 살폈다. 그의 눈동자가 떨렸다.
꽤 쓸 만한 자료인 모양이다.
“네, 넵. 하지만 그래도 누님, 보고 싶으니······.”
“흥. 그리고 영령이는 이 오빠 옆에 있기로 결심했거든!”
스윽.
당영령이 기척 없이 내 곁에 다가와 팔짱을 꼈다. 그 모습을 본 당천기의 표정이 황망해졌다.
아니 이 돌팔이가 누구 마음대로 달라붙어? 나는 떼어 내려고 용을 썼지만, 당영령은 집요하게 내 팔뚝을 구속하며 매달렸다. 화경의 고수가 전력을 다한 매달리기였다
초절정인 나로서는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실제 나이 50세, 겉보기 나이 15세에 불과한 그녀의 신체보다 큰 가슴이 내 팔뚝에 뭉개졌다.
현대 기준으로는 별 거 아닌 스킨십이지만, 중세 무림 기준으로는 음란하다고 해도 모자랄 남사스러운 광경을 본 당천기가 손을 부르르 떨었다.
“후우. 좋습니다. 괴룡 이 소협. 나는 사천 무림의 동도들한테 독절이라는 허명으로 불리는 당천기라고 하네. 부족하지만 사천당가의 가주를 맡고 있지.”
당천기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그의 몸에서 기파가 피어올랐다.
자기소개를 끝낸 그가 내게 말했다.
“우리 누님 눈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게 한다면, 그때는 자네가 전부 책임져야 할 걸세!”
당천기의 눈빛이 이글이글거렸다.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열 배로 갚는다는 사천당가의 독심(毒心)이 그의 눈에 서려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저 돌팔이가 눈물 흘릴 일이 뭐가 있겠냐만은.
나는 일단 알았다고 답했다. 내 말을 들은 당천기가 말했다.
“좋네. 사천당가는 은원(恩怨)을 잊지 않는다는 말, 명심하길 바라네.”
“알겠습니다. 당 선배.”
뭐.
별일 없겠지.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무려 화경의 고수가 둘이나 공동파에 머무르는 것이다.
웬만한 구대문파보다 고수 전력이 더 강력해지는 셈이고, 돌팔이기는 하지만 동네 의원보다는 의술이 괜찮은 수준이니 여러모로 쓸모가 많겠지.
“흥. 천기야! 왜 우리 이 오빠한테 그렇게 겁줘! 겁주면 못쓴다고 내가 말했지!”
내가 그렇게 장점을 생각하고 있을 때. 당영령이 내 팔뚝에 매달린 채로 당천기를 째려보면서 말했다.
“아, 아니. 거, 겁을 준 건 아닙니다. 누님.”
“흥! 천기가 그러니까 영령이가 본가에 별로 안 머무르고 싶은 거야. 누님이라고 부르지도 마! 영령이는 과년(瓜年)인데 불혹을 넘은 천기가 날 누님이라고 부르면 중인들이 뭐라 생각하겠어?! 영령이는 공동파에 살 거야!”
“그, 그건······.”
“아무튼 겁주지 마! 협박도 하지 마! 우리 오빠가 무서워하잖아!”
아니.
무서워한 적은 없는데. 뭐, 돌팔이기는 해도 내 편을 들어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누님.”
“오빠한테도 사과해!”
“······흠흠. 본 가주가 살짝 결례를 저지른 것 같군. 미안하네.”
“아닙니다. 선배.”
그렇게 어색한 화해 타임이 끝나자 당영령이 우쭐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오빠, 나 잘했지? 응? 잘했지?”
이 미친 돌팔이가 대체 왜 저러는 건지 모르겠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적인 용무는 이쯤 하고, 이제 공적인 이야기로 들어가지.”
당천기가 내게 말했다.
뭐야.
당영령 이야기하려고 나에게 온 게 아니었단 말이야?
“괴룡 이철수!”
당천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아니, 근데 아까부터 거슬렸지만 괴룡? 정녕 내 별호가 검룡이 아닌 괴룡이 되었단 말인가?
대체 어떤 놈이 내 화려한 검무(劍舞)를 보고 괴룡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별호를 붙였단 말인가?
어이가 없다.
내가 속으로 혀를 차고 있던 그때.
“무림맹주께서 그대를 찾는다! 맹주께서 용봉지회 우승자인 그대한테 포상과 함께 한 수 가르침을 내릴 것이니, 괴룡 이 소협은 지금 즉시 무림맹 등봉현 지부로 오라!”
당천기가 내게 전언을 전했다.
무림맹주.
이 직위가 가리키는 인물은 단 한 명뿐이다.
칼 한 자루를 가슴에 품고, 밑바닥 삼류 낭인부터 무림맹 말단 무사를 거쳐 화경의 경지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고수.
정파 무림의 정신적 지주인 신승의 협조 아래 실질적으로 정파 무림을 이끌어가는 리더 역할을 맡은 거인(巨人).
무림맹주 도황(刀皇) 임동립.
그가 나를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