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광룡(狂龍)
용봉지회 결승전.
정파제일 후기지수를 가리는 축제의 장답게 결승전이 열리는 비무대는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을 연상케 할 정도로 거대했다.
나무로 만들어진 임시 가건물이 맞나 싶을 정도.
“사제, 긴장하지 마. 사제라면 이길 수 있을 거야.”
“사형. 힘내십시오.”
“흥. 기왕 결승전에 올라왔으니, 공동파의 이름에 먹칠이나 하지 말고 무조건 이겨요. 아시겠나요?!”
공동파 측 배정 좌석에 앉은 사형, 서하린, 그리고 서문청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부 전영은 본산을 지키느라 여기 오지는 않았지만, 지금쯤 내가 용봉지회에서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첩보 정도는 듣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들의 응원을 받으면서 비무대 위로 올라섰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공동괴협! 이철수다!”
“오늘은 또 어떤 기행을 보여줄지 궁금하구려.”
“이번에도 검을 안 꺼내는 건 아니겠지?”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함성. 관중석에 콩나물 시루처럼 빽빽하게 들어찬 관중들.
그리고 귀빈석에는 언제나 그렇듯 검후와 황상이 앉아 있었다.
다른 때와의 차이점이라면 그녀들을 제외하고도 정파 무림의 명숙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구파일방 육대세가의 장문인, 가주들은 물론이요. 무림맹주 도황(刀皇) 임동립까지 있었다.
도황(刀皇).
한 자루 칼로 낭인에서 화경의 절대고수가 되어 무림맹주의 자리까지 오른 일대도객.
그의 부리부리한 시선이 내게 향했다.
그야말로 정파 무림을 이끄는 주요 요인들이 전부 모인 셈이다.
그중에는 나와도 구면인 서문세가의 가주, 진천검왕 서문현천도 있었다.
모두가 나를 주목하고 있다.
정사지쟁, 항산대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인파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참여한 무림고수와 명사의 면면도 비교할 수 없다. 용봉지회는 정파 무림의 미래를 맡길 동량지재(棟梁之材)를 선발하는 무림대회.
정파 무림을 이끌어가는 실세들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검룡(劍龍)의 별호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용봉지회의 승리를 황상께 바치리라.
[황상. 소신을 지켜봐주시옵소서. 소신이 반드시 황상께 승리를 보여드리겠나이다.]
나는 황상에게 전음을 보냈다. 내 전음을 들은 황상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보였다.
역시 귀여운 우리 황상이군. 딸을 보는 것 같다. 아니 이미 딸인가?
뭐 어쨌거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비무대 저편을 봤다
거기에는 그가 있었다. 화산파의 검룡 진패선. 근육과 지구력을 단련하는 상남자 문파인 종남파와는 반대로 매화 따위나 탐닉하는 하남자 문파답게 알로하 셔츠 뺨치는 꽃무늬가 새겨진 핑크빛 무복을 입은 미남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화산파의 진패선이요. 부족하지만 강호의 동도들한테 검룡(劍龍)이라는 허명으로 불리고 있소이다.”
“공동파의 이철수요. 강호의 동도들한테는 공동괴협이라는 허명으로 불리고 있소.”
진패선의 말에 나는 포권하면서 답했다.
그와 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검룡 진패선.
현(現) 자타공인 정파제일 후기지수.
화산파의 미래를 책임질 동량지재(棟梁之材).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을 논할 만한 검재(劍才)를 타고난 일대기재.
나는 그가 1회차 미래에서 맞이했던 결말을 알고 있었다.
미래에 화경의 경지에 도달한 그가 받은 별호는 매화검선(梅花劍仙). 화산파의 최고수에 오른 진패선이지만, 후기지수 때와는 달리 천하제일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사실 진패선이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는 능히 천하제일검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검재는 그 정도로 뛰어났다. 하지만 당대에는 아니었다.
하필 당대에는 검으로 강호의 정점에 오른 천고일재, 검성 유진휘가 있었다. 유진휘가 살아있는 한, 진패선은 죽었다 깨어나도 천하제이검(天下第二劍)에만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진패선은 유진휘에 대한 열등감을 항상 품고 있었다. 그 열등감을 자극한 것이 청담회, 아니 미래의 구 부인이었고.
거기에 넘어간 진패선은 남궁세가의 창천검황 남궁청, 점창파와 청성파의 최고수를 끌어들여 사형을 무한 목란산에서 급습하게 된다. 당연히 급습은 실패했고, 이후 진패선은 스스로 단전을 부수고 화산파 본산의 참회동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물론 이번 생에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그가 말했다.
“공동파의 이 소협이구려. 그대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은 바 있소. 정사지쟁에서 공동파의 승리에 기여하였으며, 사파제일 후기지수 흑사룡한테 불의의 일격을 적중시키고, 항산대전에서는 소검후와의 비무에서 승리하였으며, 용봉지회에서는 본신절학인 검공을 쓰지 않고 수공과 지법만으로 전승(全勝)을 기록했다고 들었소.”
진패선의 입에서 내 행적이 줄줄 흘러나왔다.
“게다가 그대의 사형인 공동신협 유 소협도······. 나와의 비무에서 공동의 검으로 가볍게 승리를 가져간 전적이 있소.”
그렇게 말하는 진패선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러고 보니 사형이 비무행에서 가장 먼저 쓰러뜨린 상대가 검룡이었지.
스르릉.
검룡이 검을 뽑았다. 그의 몸에서 은은한 매화 향기가 흘러나왔다. 사내놈 몸에서 매화 향기라니. 하남자가 따로 없군.
그가 말했다.
“······듣자 하니 이 소협께서는 자격 없는 상대한테는 검을 뽑지 않는다고 들었소.”
검룡의 칼날에 핑크색 검기가 맺히며 매화 향기가 디퓨저처럼 비무대 전체를 장악했다.
검기가 핑크색이라니. 끔찍하다.
아무리 매화검법이 현대 한국과 중세 무림 양쪽에 그 이름이 드높은 상승절학이라지만, 결국은 꽃향기 풀풀 뿌리고 꽃잎이나 흩날리는 하남자의 절학. 알파메일을 지향하는 나로서는 절대 사양하고 싶은 무공이었다.
역시 화산파에 입문 안 하기를 잘했다. 검룡의 칼끝에 매화가 한 송이 피어났다.
“소협께 묻겠소. 소인의 검은 어떻소. 공동의 검을 견식할 자격이 있소이까?”
멋있는 목소리로 묻는 검룡.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검을 뽑았다.
스르릉.
제법 질 좋은 철검이 뽑히면서 태양빛을 받아 맑은 빛을 뿌렸다.
“물론. 화산파의 검룡이라면, 이 나의 검을 견식할 자격이 충분하지.”
나는 검룡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덤벼도 좋다. 와라.”
“좋소. 그렇다면······.”
검룡의 눈이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펄럭.
그의 무복 자락이 강풍이라도 맞은 듯 펄럭거렸다. 그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매화향이 한층 진해졌다. 마치 매화꽃이 만발한 매화나무 숲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
“유 소협한테 패한 이후 절치부심(切齒腐心)하여 절차탁마(切磋琢磨)한 화산의 매화검을 지금, 이 소협한테 보여주겠소!”
검룡이 그리 말하며 검을 휘둘렀다. 검룡의 칼날에서 매화가 한 송이, 두 송이, 세 송이, 수없이 많이 피어올라 만발했다. 그의 칼날에서 피어오른 매화 향기가 비무대를 넘어 관중석을 가득 메웠다.
사뿐.
검룡이 일보를 내뱉었다. 화산파 비전의 보신경인 암향표(暗香飄)였다. 그가 일보를 내디딜 때마다 매화 꽃잎이 흩날렸다.
화산파의 검공은 환검(幻劍)의 극한. 빠른 움직임과 현란한 발놀림, 허초와 실초를 구분하기 어렵게 휘두르는 검초가 화산 절학의 핵심이다. 빠르고 현란하고 화려한 화산의 초식을 상징하는 것이 매화(梅花)이다. 매화꽃처럼 화려한 검무가 화산의 시그니처인 것이다.
매화 향기도 그냥 나는 것이 아니다. 검에서,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매화 향기와 매화꽃은 상대의 후각(嗅覺)과 시각을 교란한다. 그래서 화산의 무공을 대성한 고수는 매화 향기의 강도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다.
지금도 그렇다. 온통 시야 가득 만발한 매화꽃, 수십 개로 분열된 칼날과 그 끝에서 피어오르는 매화향까지.
보통의 고수였다면 검룡의 어떤 검초가 허초이고, 어떤 검초가 실초인지 분간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허초라고는 해도 일정 내력을 실어둬서 방어하지 않으면 피해를 입게 만들어놔서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우웅. 혼원일기공을 끌어올렸다. 음양이기가 기혈을 거꾸로 도는 역혈의 경로로 흐르면서 폭발적인 힘이 솟아올랐다.
화산의 절학과는 반대로 공동의 절학은 투박하고 직선적이며 실전적이다. 서융(西戎), 그리고 마교와 드잡이질하며 발전한 공동의 절학은 사마외도의 무학처럼 패도적이며 심후한 공력이 뒷받침되어야만 제대로 된 위력을 낼 수 있다.
그리고 내게는 심후한 정력, 아니 내력과 초절정에 이른 무위가 전부 다 있었다. 내 예민한 기감에는 허초와 실초가 전부 구분되어 보였다. 아울러 매화꽃 너머에서 존재감을 숨기고 있던 검룡의 본체도 보였다. 흑색 검기가 칼날을 타올라 휘감기던 순간.
일검.
단 일검만에 검룡과의 승부를 마무리한다. 그래야 임팩트 있는 승리가 되고, 검룡의 호칭을 받아올 수 있다.
나는 그런 일념을 검에 담아 그대로 복마검법의 최후절초를 내질렀다.
위타복마.
공방일체의 묘리를 담은 흑색 검기가 휘감긴 검이 현란하게 피어오른 매화 꽃밭을 그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콰-과-과-광!
흑색과 핑크색의 검기가 부딪히며 기파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만발했던 꽃밭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수많은 허초가 허깨비처럼 사라지고, 매화 향기가 삽시간에 사그라들었다.
그 너머.
검룡의 본체가 느껴지는 곳으로 나는 검을 찔렀던 그때.
“?!”
간발.
아주 간발의 차이로 검룡이 암향표의 보신경을 밟아 내 위타복마를 회피했다. 가공할 공력이 담긴 흑색 검기가 굉음과 함께 애꿎은 비무대 바닥을 부수며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후우.”
내 공격을 회피한 검룡의 입가에 한 줄기 피가 흘렀다.
그와 함께.
파스스스스스.
그가 걸친 핑크색 무복이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백주 대낮,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 아래 검룡의 탄탄하고 오밀조밀한 근육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렇다. 놈은 옷과 다소의 내상을 희생해서 내 공격을 피한 것이다.
그 대가로 검룡은 지금 알몸이 되어 있었다. 호리호리하지만 잔근육과 식스팩은 확실히 있는 그의 몸이 보였다. 더불어 나보다 작은 그의 물건도.
“꺄아아아아아아아아!”
“공동괴협, 기어코 일검탈의를 선보이다니!”
“차라리 검이 아니라 평소처럼 수공과 지법으로 상대했으면 좋았으련만.”
“용봉지회 결승이라는 축제날에 이게 무슨 남사스러운 일이란 말인가!”
“거, 검룡 소협의 나, 나신이라니!”
“어, 어머 남사스럽지만, 나, 나쁘지 않을지도······.”
관중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번에는 진짜 억울하다니까.
내가 당황한 그때.
내 기감이 경종을 울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행운유수의 보신경을 밟았다.
파츠츠츠츠츳!
핑크색 매화꽃 검기가 방금까지 내가 있었던 자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 머리카락이 한 움쿰 잘려 허공으로 흩어졌다.
내 시선이 검기가 날아온 쪽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검룡이 있었다. 알몸의 검룡이 나를 바라보면서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하, 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정말로 재미있는 비무로소이다! 이 소협! 이렇게 소인을 즐겁게 해줄 줄은 몰랐소이다!!”
홀딱 벗은 그가 앙천대소(仰天大笑)를 터뜨리면서 나를 바라봤다. 그의 잔근육 가득한 하얀 피부의 전신에서 매화 향기가 피어올랐다.
“더, 조금 더 나를 즐겁게 해주시오! 이 소협!”
그의 눈에서 핑크빛 안광이 불타올랐다.
아니.
사내새끼가 지금 공석에서 다 벗고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이거 검룡(劍龍)이 아니라 광룡(狂龍)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