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동상이몽(同床異夢)
이철수의 말을 들은 관중석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공동파의 주력 무학은 검이다. 공동파의 상징은 복마검이다. 그래서 공동파 재건에서 가장 먼저 선행된 것이 복마검법의 복원 아니었던가?
검공이 주력인건 공동괴협 이철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록 별호에 미친놈이라는 뜻의 괴(怪) 자가 붙기는 했지만, 이철수의 검법 실력이 후기지수 중에 손꼽을 수준으로 고절하다는 사실은 강호 무림의 모두가 인정하는 바였다.
기행이 아니었다면 공동괴협이 아닌 공동검협이라는 별호가 붙었을 정도.
그런데 지금 검이 아닌 다른 무공으로, 하북팽가의 도(刀)를 상대하겠다니.
“광오하기 짝이 없는 선언이요.”
“검공이 아닌 무학으로 팽가의 이공자를 상대한다니!”
“패왕도 팽무진이라면 이미 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 아무리 공동괴협이라 하지만 검을 쓰지 않으면 필패일 터인데······.”
어지간히 검에 자신 있는 검객도 저런 선언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 고수이기는 하지만 아직 후기지수인 이철수가 그렇게 말한 것이다.
광오하다.
오만하기 짝이 없다. 관중들이 술렁거렸다.
반면에 관중석에 앉은 공동파 일행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사제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어.’
천무지체를 보유한 유진휘는 어렵지 않게 승부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사제가 매일매일, 뼈를 깎는 수행을 한다는 사실을. 오로지 천고의 기재인 그녀의 옆에 서기 위해서.
유진휘만큼은 아니지만, 서하린도 이철수의 승리를 확신했다.
반면에 서문청하의 표정은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저 바보가 대체 무슨······. 헛소리를 또 내뱉은 건가요?!’
육대세가의 일좌를 차지하는 서문세가의 막내딸인 만큼, 이철수가 내뱉은 말의 파장을 예측한 서문청하였다. 이겨도 문제고 져도 문제다.
지면 공동파의 체면이 땅에 떨어지고, 이긴다면 이철수를 상대하려 강호 무림의 고수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것이다. 어느 쪽이건 별로 긍정적인 결과는 아니었다.
‘꺄아, 상공. 너무 멋있어요!’
반면에 귀빈석에 앉은 검후는 속으로 이철수를 보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진정한 검객이 상대가 아니라면 검을 뽑지 않는다니.
‘후후. 소첩 같은 진정한 상대가 아니라면 함부로 검을 뽑지 않는다니······. 소첩의 심장, 터져버릴 것 같아요······.’
검후의 하얀 뺨이 옅은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검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대에게는 뽑지 않겠다.
그 말을 거꾸로 하면 그의 검을 알아보는 상대에게는 검을 뽑겠다는 뜻이다.
검을 알아보는 상대······. 그게 검후 본인이 아니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검후가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헤실헤실 웃던 그때.
‘······서, 설마 일검유희도 포함되는 건 아니겠죠?’
그녀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일검유희 진소소. 유 아주버님과의 친분으로 감히 공동파 본산에 식객이라는 신분으로 비집고 들어와 상공을 노리는 불여우.
그녀 또한 화경의 검객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던 것이다. 검후의 얼굴에 떠오른 홍조가 식었다. 그녀의 손이 살짝 떨렸다.
‘······역시 일검유희 따위에게 지지 않으려면······.’
상공께서 인정할 수 있는 진정한 검객이 되려면, 조금 더 검을 수련해야 한다. 검후는 그렇게 다짐했다.
태평공주의 시선이 그런 검후의 얼굴에 짧게 머물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시선은 서문청하, 서하린까지 훑었다.
‘이 여자들이 노야께서 첩으로 삼으려는 여인들이로군.’
주가율은 전생의 지식과 현생의 동창 수집 정보를 통해 이미 이철수 주변의 모든 여인 관련 정보를 파악한지 오래였다.
검후. 건방지게 감히 노야의 청혼을 받은 여인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그녀보다 신분도 낮은 미천한 무인에 불과하다. 크게 신경 쓸 것 없다.
서문청하도 마찬가지다. 강호 무림에서나 명가의 아가씨로 취급받지, 진짜 명가인 북경의 사대부나 황실에 비하면 비루한 신분에 불과하다. 서하린은 더 볼 것도 없다.
문제는.
‘검성······.’
유진휘다.
노야가 환생 대법을 실행한 이후 수십 년 동안 상복을 입고 노야의 무덤에서 국정을 돌보면서 주가율이 가장 경계한 건 혈교의 준동이었다.
그래서 주가율은 동창과 서창을 통해 무림과 자주 소통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유진휘라는 인간을 많이 접했다.
강호 무림에서는 유진휘를 천하에 다시 없을 의인이자 대협객, 천하제일인이라 칭했다.
하지만 그녀가 실제로 마주한 검성 유진휘는 천하제일인은 맞지만, 의인이자 대협객은 아니었다.
오히려······.
‘타인의 감정과 생각에 제대로······.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지.’
그녀가 엿본 검성 유진휘의 실체는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제대로 공감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한 협행과 사문 재건도 진심이라기보다는 의무, 사부가 가르친 강박 때문에 이행하는 거였다.
하늘이 내린 무재를 지니고, 범인과는 다른 세상과 시야를 지닌 덕분에 유진휘는 타인의 삶과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협의를 숭상하는 백도 무문이 아닌, 사마외도의 손에 자랐으면 천하를 위협할 살성(殺星)으로 자라났을 위험인물. 그것이 유진휘라는 인물상에 대한 그녀의 평가였다.
거기다가 그녀가 직접 만난 유진휘는······. 사내로 알려져 있었지만, 사내가 아닌 남장 여자로 보였다. 확신하기에는 물증이 없었지만, 의심할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유진휘는······. 그녀가 만난 미래의 피도 눈물도 없는 유진휘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거기에 전생에 없었던 일검유희라는, 유진휘와 행적이 겹치는 신비 여고수의 등장이라는 정황 증거까지 합친다면······.
‘······검성, 그대가 일검유희고, 남장여자는 아니겠지요?’
충분히 의심할 수 있었다. 주가율의 눈빛이 유진휘를 향했다. 언젠가 그분의 정실부인이 될 몸으로서 첩들 관리는 필수였다. 그것이 유진휘 같은 위험인물이라면 더더욱.
주가율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랑하는 노야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심장이 뛰었다. 입가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두 눈에 담긴 노야의 모습, 상의를 탈의한 그의 근육이 주가율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이철수가 대웅보전에서 했던 말이 맴돌았다.
용봉지회의 승리를 바치겠노라고.
그 말을 기억하면서 주가율은 웃었다. 전생에 피도 눈물도 없는 폭군이라 불렸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따뜻한 미소였다.
*
“검객 주제에 감히 팽가의 도를 검을 쓰지 않고 상대한다고 말하다니! 광오하기 짝이 없구나!! 공동괴협!!”
팽무진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그의 팔뚝이 우람하게 부풀었다.
광오하다.
관중석에서도 종종 나오는 목소리다. 뭐 상관 없다. 원래 그런 반응을 유도한 거니까.
실력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광오한 허세 컨셉충이요, 내가 실력을 증명한다면 고독하고 멋진 검객이 되는 거니까.
당연히 나는 후자가 될 것이다. 진정한 상대가 아니면 검을 안 뽑는 검객이라니? 이 얼마나 여인의 심금을 울리는 컨셉이란 말인가?
“내 오늘 네놈의 오만함을 팽가의 도로 고치리라!”
팽무진이 붉어진 얼굴로 내게 달려왔다. 쿠웅! 내력이 실린 일보에 비무대가 뒤흔들렸다. 절정의 고수답게 고절한 내력이 깃든 도가 도명을 토해냈다.
우우우우우우우우웅!
그와 함께 도풍이 사방으로 휘몰이치면서 그의 도에 도기(刀氣)가 맺혔다. 팽가를 대표하는 상승절학. 오호단문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조용히 양손을 들어 사형이 완성한 혼원일기공을 운용했다. 단전에서 두 줄기 음양이기가 치솟았다.
혼원일기공의 통제 아래 치솟은 음한지기를 왼손, 양강지기를 오른손으로 보냈다. 오른손 끝에는 양기를 상징하는 백색, 왼손 끝에는 음기를 상징하는 흑색 기가 맺혔다.
내가 가장 열심히 수행한 절학은 검공이다. 하지만 지법 못지않게 열심히 수련했다.
자고로 운우지락에서는 삽입도 중요한 편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전초전도 중요하다 하지 않았던가?
이 전초전을 담당하는 것이 혀와 손가락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훗날의 운우지락을 위해 손가락을 단련하는 지법과 손 전체를 다루는 수법의 수행을 거르지 않고 매일 해왔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내 지법과 수공의 성취를 천하에 보여줄 때가 왔다.
나는 음기와 양기가 깃든 왼손과 오른손을 들어 그대로 놈의 도를 붙잡았다.
파츠츠츠츠츠츠츠츠츳!
음양이기가 부딪히며 일어나는 폭발적인 반발력으로 일어난 기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놈의 도가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내 양 손바닥에 정확히 붙잡혔다. 팽무진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공수탈백인(空手奪白刃)의 수법이라니!”
“팽가의 오호단문도를 손으로 붙잡았다고?”
“공동괴협이 수공(手功)에도 정통했다는 말인가?”
공수탈백인(空手奪白刃). 내력이 실린 손으로 칼날을 잡는 기예를 선보이자 관중들이 술렁거렸다.
그것도 그냥 도도 아닌, 도기가 맺힌 도를 잡은 것이다. 수공이 절정에 이르지 않았다면 행할 수 없는 기예다. 세상이 놀랄 만했다. 팽무진도 경악했다.
그래.
이게 쇼맨십이지. 방금 좀 멋졌던 거 같은데. 후후. 공동파 산문에 쌓일, 소저들이 한땀 한땀 예쁘게 써 내려간 팬레터가 기대되는군.
나는 경악한 팽무진을 보면서 보신경을 밟으면서 바닥을 박차 뛰어오르며 칼날을 뿌리치면서, 그대로 칼날 위에 올라타 팽무진의 턱주가리를 내력을 실어 걷어찼다.
“컥!”
팽무진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울렸다. 그와 함께 놈의 거구가 허공을 날아 장외(場外)로 떨어졌다.
장외로 떨어진 팽무진의 얼굴에 황당한 감정이 떠올랐다. 어이없게 패배했다고 느껴진 건가? 그가 씩씩거렸다.
생사결이었다면 여기서 반격이 가능했겠지만, 용봉지회는 어디까지나 비무.
승리는 나의 것이다.
“스, 승자 공동파의 이철수!”
심판 역할을 하는 무인의 목소리와 함께 나는 용봉지회의 일승을 따냈다.
팽무진 이후에도 나는 검을 쓰지 않고 오로지 수공과 지법만으로 용봉지회 상대를 한 명도 남김없이 장외로 날려 보냈다.
“검을 쓰지 않는다니, 이리 고절한 수공과 지법을 사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군!”
“하지만 모든 승리가 장외 승이지 않소! 이런 승부는 인정할 수 없소!”
“아녀자나 쓸 법한 지법이나 쓰면서 유세를 부리다니, 공동괴협의 성정이 이리 광오할 줄은 몰랐군!”
“별호에 괴(怪)가 붙을 때부터 내 알아봤어야 했소!”
“하지만 그래도 공동괴협은 결승에 진출하여 용봉지회의 우승을 다투고 있으니, 그의 무위는 인정해줘야 할 것 같구려.”
나를 두고 무성한 소문이 돌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마침내.
결승전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와 용봉지회의 우승을 놓고 다툴 결승전 상대는······.
“화산파의 진패선이요. 부족하지만 강호의 동도들한테 검룡(劍龍)이라는 허명으로 불리고 있소이다.”
나보다 더 호리호리한 체구, 여자처럼 예쁜 미모에 잘 어울리는 매화가 새겨진 핑크빛 무공을 입은 미남자.
화산파의 진패선.
앞으로 내 이름 앞에 붙을 별호인 검룡(劍龍)의 현 소유자였다.
흐흐흐.
검룡 진패선.
네가 그 별호를 달고 다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오늘 이 승부 이후부터는 이 내가 여자에게 인기 많은 검룡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