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아녀자의 몸
“사형.”
“응?”
나는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달빛을 담은 듯한 초롱초롱한 눈동자였다.
“방금 멈추신 연유가 무엇입니까?”
아까 잠깐 사형이 발걸음을 멈췄었다. 마치 뭔가를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 기감을 넓혀서 주변을 탐지해봤는데, 아무런 기척도 걸리지 않았다.
화경의 고수만이 탐지할 수 있는 뭔가라도 발견한 걸까?
내 말을 들은 사형이 웃었다. 그녀의 눈빛이 살짝 탁해졌다.
“으응. 저 멀리······. 아주 무서운 맹수의 기척이 느껴져서 말이야.”
“맹수 말입니까?”
인간에게 해가 되는 맹수는 최대한 퇴치해서 산을 인간의 영역으로 만든 현대와는 달리 중세 무림의 산에는 맹수가 득실득실했다.
괜히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의 고사가 전해지는 게 아니다.
특히 숭산 정도 되는 영산(靈山)이라면 영기를 흡수해서 영물로 진화 중인 맹수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맹수가 내 기감 탐지 범위 밖에서 접근했다면, 내가 감지하지 못하고 사형은 감지한 것이 말이 된다.
“그래. 아주 늙고, 노회하고 상처 입은······. 지금은 내가 기파를 쏴서 쫓아 보냈으니까 신경 안 써도 돼.”
늙고 노회한, 이라는 단어에 힘을 준 사형이 배시시 웃었다.
뭐,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꽈악.
사형이 내 손을 놓지 않을 것처럼, 구속하면서 쥐었다.
“가자. 사매가 기다리겠다.”
“알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사형과 함께 걸어서 일주문을 통과해 공동파 일행에게 배정받은 객원으로 향했다.
객원에 도착해서야 사형은 내 손을 놓아주었다.
사형의 손에서 드디어 풀려난 나는 사매의 방으로 향했다. 내가 사매의 방 문 앞에 선 순간.
“무슨 일이십니까? 이 사형.”
문 너머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매였다. 아직 안 자고 깨어있었던 건가?
“사형이 긴히 할 말이 있다고 전해달라 하여 너를 불렀다. 야밤에 미안하구나.”“아닙니다. 달이 밝아 좀처럼 잠을 청하지 못하고 있던 참입니다.”
달이 밝다니?
오늘은 초승달인데?
“곧 나가겠습니다. 기다려 주시길.”
스르륵, 사르륵.
옷가지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문이 열렸다. 하얀 달빛이 내려앉은 백금발이 인상적인 미소녀가 나왔다. 서하린이었다.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시지요. 이 사형.”
나는 서하린을 데리고 전각 내부를 걸었다. 당영령은 당연히 외박이고, 서문청하는 자는 중이었다. 그렇게 서하린을 데리고 객원 마당으로 나온 나는 사형과 마주했다.
사형과 마주한 순간.
서하린의 눈동자가 굳었다.
그런 서하린을 보면서 사형이 말했다.
“오랜만이야. 사매. 유 사형이야. 그동안 숨겨서 미안해.”
*
눈앞의 절세미녀가 한 말이 서하린의 귓전을 울렸다.
원래 공허했던 서하린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 사형이 오지 않아 기다리던 참이었다. 유 사형까지 사라진 건 우연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유 사형이 사실 사내가 아니라 여인이었다고?
서하린의 텅 빈 눈동자가 본인이 유진휘라고 주장하는 미녀의 전신을 훑었다. 그녀의 벽안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손이 저절로 가슴으로 향했다.
가슴이라면 몰라도, 다른 부분에서 그녀가 사형보다 앞서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제법 미소녀라 자부하던 얼굴의 미모마저 사형과 비교하면 부족했다. 추녀와 마찬가지였다.
사형의 미모는 그만큼 압도적이었다. 분명 시간은 깊은 밤인데 낮이라고 착각될 정도로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사문의 재건을 위해서 입문 직후부터 쭈욱 대외적으로 사내를 가장해서 살아왔어. 하지만 동문(同門)인 사제와 사매한테 언제까지고 숨기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지금 말하려고 결심했어. 미안해.”
눈앞의 사형, 아니 사저가 살짝 눈물을 글썽이면서 처연한 말투로 말했다.
‘사형이 사실 사저였다면······.’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녀가 품고 있던 많은 의구심이 한꺼번에 풀렸다.
유 사형이 사내인데도, 사형제의 우애(友愛) 이상으로 지나치게, 남색가로 보일 정도로 이 사형에게 집착하던 이유는 역시 유 사형이 여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형 앞에서만 풀어지던 모습도 그녀가 여인이라면 모두 설명이 가능했다.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르겠어.’
서하린은 유진휘를 남색가라고 의심하던 상황. 하지만 그녀가 남장여자였다니,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말했다.
“······조금 당황스럽지만, 괜찮습니다. 사형이 어떤 사람이건······. 소녀에게 사형은 사형입니다.”
“고마워! 사매!”
와락.
유진휘가 서하린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코 끝에 들꽃 향기가 스쳤다.
서하린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행이야, 사매도······. 나를 받아줘서······.”
“아, 아닙니다······.”
훌쩍이는 유진휘의 목소리에 서하린이 당황했다. 서하린은 수치를 느꼈다.
사형이 여자에다, 천하제일미와 비견되는 미모의 미녀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서하린은 사형을 질투했다. 그녀보다 더 오랜 시간을 이 사형과 함께 보낸 유진휘였다. 거기에 미녀라니.
강력한 연적이 새로 생긴 거나 다름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사형은 사형이었다. 어쨌거나 계속 공동파에 몸담으려면 사형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인정했다.
그러나 순진하기 짝이 없는 사형은, 그녀가 받아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하고 있었다.
‘질투하고 미워하고 싶어도, 사형은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서하린은 그렇게 품에 안긴 유진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생각했다.
이 사형을 좋아하는 건 맞다. 하지만 유 사형도 싫지는 않다. 서하린에게 있어서는 둘다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존재다.
그러니 영원히, 앞으로 이대로 함께하고 싶었다.
아니, 그렇게 만들 것이다.
‘유 사형과 저, 둘 다 이 사형의 배필이 되는 겁니다.’
서하린의 눈동자가 차갑게 반짝였다.
*
다행히 사매는 별말 없이 사형의 성별 커밍아웃을 받아줬다.
이후 우리 셋은 사형의 성별은 대외적으로 사내로, 사형이 여자라는 사실은 공동파 동문만 알고 있기로 합의를 봤다.
그렇게 그날의 일은 끝나고 마침내.
용봉지회 당일이 밝아왔다.
청담회 연회 때 일어난 불의의 사고로 상당수 명문정파 후기지수가 탈락하고 옥기린 남궁청이 본인 몫의 출전권을 내게 양보해준 덕분에 나는 구파일방 육대세가의 후기지수처럼 예선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본선으로 직행할 수 있었다.
얼마 전 일어난 불미스러운 청담회 사건을 덮기라도 하겠다는 듯, 용봉지회는 평시보다 한층 화려하게 개최되었다.
그리고 용봉지회 본선에서 내 영광스러운 첫 상대는······.
“하하하하하! 그대가 바로 공동파의 괴협인 이철수로군! 난 하북팽가의 팽무진이라고 한다!”
나보다 더 떡 벌어진 어깨, 키가 이 미터에 육박하는 근육질 거한.
하북팽가의 이공자 팽무진이었다.
“패왕도(霸王刀) 팽무진!”
“하북팽가의 이공자가 등장하다니!”
“역시 본선부터는 질이 다르구만!”
패왕도라는 별호대로 놈은 십 대 답지 않은, 그리스의 조각상을 닮은 탄탄한 근육질 거구를 지니고 있었다. 얼굴도 이십 대 중반처럼 보이는 노안.
“공동괴협이 패왕도를 이길 수 있을까?”
“체구부터 차이가 심하군!
”“패왕도는 천생신력의 소유자라던데, 괴협의 저 비쩍 마른 몸으로 상대는 쉽지 않겠어.”
“하지만 공동괴협도 소검후, 옥기린을 격파한 실력자. 신력(身力)의 차이로 승패를 논하는 건 무의미해.”
뭐? 내가 비쩍 마른 몸이라고?
물론 키는 이 미터인 팽무진보다 내가 작기는 했다. 하지만 내 키는 여인들이 가장 선호한다는 180cm! 키에 좋다는 보약이란 보약은 전부 먹은 결과였다.
거기에 내 근육은 또 어떻고.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혹독한 외공 수련의 결과로 내 전신은 탄탄한 말근육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다. 나야말로 상남자 알파메일인 것이다. 그런데 뭐? 비실거린다고?
그렇다면 보여줄 수밖에 없겠군, 내 상남자의 매력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웃옷을 벗어 던졌다.
펄럭.
흑의가 펄럭이면서 내 탄탄한 근육이 햇빛 아래 드러났다. 나는 오늘을 위해 연습한 멋있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공동파의 이철수다. 만나서 반갑군.”
꿈틀.
나는 몸에 내력을 보내 근육을 한껏 부풀렸다. 그 모습을 본 관중들이 수군댔다.
“패왕도 팽무진이랑 비교하면 어린아이나 다름없는 몸매로군!”
“옷을 벗으니 더 왜소해 보이는군.”
“아녀자의 몸과도 같네. 피부가 뽀얀 걸 보니 평소에 못 먹고 사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어마마마마맛!”
뭐?
내 몸이 아녀자의 몸과 같다고?
지금까지 뼈를 깎는 수행으로 단련한, 이 탄탄한 가슴근육과 식스팩을 보도고 그런 말을 하다니!
이게 전부 눈앞의 저 장비 닮은 거한과 내가 비교되기 때문이다.
하북팽가는 강호 무림에서도 천생신력으로 유명한 무림세가. 하북팽가 출신은 하나같이 기골이 장대하고 근육이 남달랐다.
역시 타고난 피지컬은 후천적인 노력으로 극복하기 힘들다는 것인가?
속이 부글부글 끓던 그때.
“공주 전하 납시오!”
“예를 갖추시오!”
비무장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는, 익숙하면서 불쾌한 내시 목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동창의 고수들이 나타나 관중석의 상석을 정리했다.
공주 전하.
그 말에 나와 팽무진을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상석으로 향했다.
‘황상께서 온다고!?’
황상이 용봉지회에 참관한다는 이야기 정도는 들었다.
하지만 그 정도 귀빈은 보통은 결승전, 잘 가봤자 준결승부터 참관하는 것이 관례다.
용봉지회 본선이 확실히 중요하기는 했지만, 공주나 무림맹주 같은 귀빈이 참관할 만한 자리는 아니었다.
지금 상석에 앉아 있는 검후가 이례적인 경우였다.
그런데 황상이라니?
내가 살짝 당황한 그때.
사뿐.
저 멀리서 동창 무사들의 호위와 함께, 붉은 공주 의복을 입은 황상이 상석에 착석했다.
그녀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황상이 살짝 웃었다.
[힘내세요. 노야. 짐은 노야가 패하지 않을 거라 믿고 있습니다.]
내 귓가에 그녀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날 응원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건가. 좋아. 그렇다면.
보여줘야겠지.
[알겠습니다. 황상.]
나의 황상에게, 2회차의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비무를 속행하시오!”
동창 무사의 내력이 실린 목소리가 비무대를 강타했다.
그와 함께 관중의 시선이 우리에게 모두 모였다. 팽무진의 눈빛이 나를 향했다.
“하하하하하하하하! 공동괴협! 네가 남궁의 옥기린을 검으로 꺾었다 들었다! 내게도 보여봐라! 남궁의 제왕을 꺾은 공동의 복마검을!”
팽무진의 목소리가 사방을 쩌렁쩌렁 울렸다.
복마검을 보여달라니?
물론 복마검으로 상대를 일수에 제압하는 것도 충분히 멋진 모습이긴 하지만, 뭔가 2% 부족했다.
단순히 충분히 멋진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검룡, 아니 그 이상의 인기남이 되기 위해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멋짐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컨셉이 필요했다. 강호 무림의 모든 아녀자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완벽하게 멋진 컨셉이.
그리고 나는 이미 그 컨셉을 용봉지회를 준비하던 1년 동안 심사숙고한 끝에 결정해놓은 상황이었다.
한 발짝.
나는 거인처럼 보이는 팽무진 앞으로 보무당당하게 나아가 말했다.
“······나는 내 검의 진가를 알아보는 자한테만 검을 사용한다. 보아하니 너는······.”
나는 멋진 미소를 지으면서 팽무진을 훑어보며 말했다.
“······내 검의 진가를 알지도 못하는 까막눈이로군.”
“뭐라고?!”
내 말을 들은 팽무진이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래.
이거야말로 완벽한 ‘진짜 강자에게만 검을 뽑는 고독한 멋진 검객’의 컨셉.
전 강호 무림의 아녀자를 반하게 만들 컨셉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양 손을 치켜들었다.
이제 그동안 강호 무림의 골드 핑거가 되기 위해 수없이 연마한 지법을 사용할 때였다.
*
같은 시각.
신강 천산.
천마신교 총단. 천마전.
천마신교의 지배자이자 현 강호 무림을 삼분(三分)하는 현경의 절대고수, 우내삼존의 일좌를 차지하는 괴물.
흑발 청년처럼 보이는 사내, 천마 백무량이 태사의에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오질 않는군······.”
백무량의 말에 마교의 총군사, 마뇌가 오체투지하면서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지존이시여!”
“아니, 되었다. 공동의 무공이 마교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천무지체의 흥미를 끌 수 없다는 뜻이겠지.”
천마 백무량이 나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날 때부터 하늘이 내린 재능을 지니고 태어나,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무패(無敗)의 전적과 최연소 현경의 경지를 돌파하여 전대 교주의 목을 치고 신교의 정상에 오른 사내.
천마 백무량.
압도적인 재능을 타고난 그에게 있어서 세상이란······. 아무런 여흥이 없는, 원하면 뭐든 이루어지는 무의미한 세계일 뿐이었다. 너무나 뛰어난 재능 탓에 제대로 된 호적수조차 없었다. 같은 우내삼존인 적사월과 신승도 호적수가 될 수 없었다.
적공(積功)의 차이 때문에 반 수 앞설 뿐, 실질적인 재능으로는 신승과 염왕 모두 그의 발 아래였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난다면 신승과 염왕 모두 능가하리라. 이미 확정된 미래였다.
그랬기에 무료했다. 이 세상이, 시간이 의미가 없다 생각했다.
그래서였다. 천마가 천무지체의 존재에 집착하기 시작한 건. 하늘이 내린 기재, 천고일재(千古一才)라 불리는 공동신협 유진휘라면.
본인의 호적수가, 나아가 무료한 삶의 의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를 자극해서 마교로 꾀어내기 위해 공동의 절학을 마교가 보유하고 있다는 소문을 강호에 흘린 천마였다.
하지만 유진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천산으로 오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드는 수밖에.
천마의 무료한 눈동자에 섬뜩한 총기가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