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소녀전선(少女戰線)
손을 잡자.
그 말을 들은 검후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녀를 나이 먹었다고 공격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손을 잡자니?
검후 은설란이 맞은편에 앉았다.
탁자 위에는 이미 과자가 놓여 있었다.
쪼르르.
적사월이 은설란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랐다. 질 좋은 고급 차였다. 검후는 차에 입을 대지 않은 채로 적사월을 바라보며 말했다.
“방금 능 소저의 말씀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는 사실은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터. 그런데도 능 소저께서 소녀한테 협조를 청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검후는 소녀라는 말을 유달리 강조하면서 적사월에게 질문했다.
검후의 말을 들은 적사월은 속으로 혀를 찼다. 소녀라니. 이제 상수(桑壽), 마흔여덟 살이나 된 주제에 주책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 진소소를 이기려면 검후의 협조가 필요했다.
적사월은 능월향의 얼굴로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설명을 시작했다.
“······소녀는 오늘 등봉현에 나들이를 갔다가 우연히 이 소협과 일검유희 진 소저가 동행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요?”
일검유희 진소소.
그녀에 대해서는 검후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아주버님 뻘인 유진휘와 친분이 있는 신비 여고수.
유 아주버님의 주선으로 이번 용봉지연에 이철수와 함께 참여한다고만 들었다.
검후가 알고 있는 건 거기까지. 그 이상은 알지 못했다. 굳이 더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신경 쓸 상대는 능월향이지 일검유희가 아니었으니까.
“일검유희 진 소저의 미모를 보셨습니까? 천하제일미, 아니 천하제일요녀 적사월과 비견되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이더군요.”
하지만 능월향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은 순간, 검후의 마음이 살짝 동요했다.
천하제일요녀 적사월.
다르게는 천하제일미인. 그녀의 미모에 대한 소문은 검후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천하제일을 넘어 고금제일을 논할 정도의 절세미녀.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모를 지닌 적사월의 요사스러운 미모는 이미 인세의 미(美)를 뛰어넘어, 요물의 영역에 다다랐다고 전해졌다.
정파의 수많은 준걸이 적사월의 미모에 반해 사문을 배신해서 사파의 세작이 되거나, 사도련에 투신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런 적사월과 같은 경지에 이른 미모라니.
그런 천하절색이 이철수의 곁에 붙어 있다니. 검후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혔다.
아무리 천하절색이 옆에 있다 하더라도 그녀의 낭군님인 이철수는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철수가 그녀를 안심시켜줬기 때문이다.
“그래서요? 진 소저는 유 공자님과의 친분으로 이 소협과 용봉지연에 동행했을 뿐입니다.”“진 소저는 소녀한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적사월이 검후의 말허리를 자르면서, 붉은 눈동자로 검후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유 공자가 진 소저 본인을 이 소협의 배필로 점찍어뒀다고 말입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순간, 검후의 은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하얀 손이 파르르 떨렸다.
‘유 아주버님이······. 상공께 여인을 소개했다고······? 그것도 경국지색의 젊은 미녀를······? 배필로······?!’
검후의 머릿속이 혼란에 빠졌다.
검후는 상공을 믿었다. 그는 다른 여인에게 몸을 줄지언정 마음은 주지 않는다.
하지만 유 아주버님이라면 달랐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유 아주버님과는 가깝게 지낸 기억이 없었다.
‘설마 아주버님께서 소첩을?!’
그럴 리는 없다. 검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시야에 능월향이 들어왔다. 이것도 저 요녀가 상공과 그녀를 갈라놓으려는 이간질일 수도······.
“소녀의 말을 신뢰하지 못하겠다면, 여협께서 직접 확인 후 다시 돌아와도 좋습니다.”
적사월이 검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가 속으로 웃었다. 검후가 그녀를 신뢰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 정도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검후도 일검유희를 보면 그녀와 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적사월은 그렇게 장담했다.
능월향의 말을 들은 검후의 미간이 좁혀졌다. 마음을 읽힌 듯한 섬뜩한 기분. 능월향에게 조종당하는 기분 나쁜 느낌.
하지만 확인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검후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 인사도 남기지 않고 방을 나섰다.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객당 건물을 벗어난 순간, 검후는 화경의 고절한 보신경을 운용해 소림사 일주문으로 향했다.
그녀의 넓은 기감 끝에 이철수의 기척이 잡혔다. 검후가 은밀하게 움직였다. 스윽. 그녀의 발걸음이 숭산의 산길로 향했다.
그 자리에서 검후는 발견했다.
달밤 아래 산길을 걷는 이철수와 옆에서 그의 손을 잡은 묘령(妙齡)의 미녀를.
화경의 경지에 오른 검후였다. 그녀가 기척을 감추고자 한다면 초절정인 이철수는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이철수에게 들키지 않게 기척을 죽인 채로 몰래 이철수와 그의 곁에 있는 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검후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달빛을 받아 빛나는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하얗게 빛나는 눈 같은 피부와 완벽한 이목구비가 보였다. 능월향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디 가서 미모로는 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검후였다.
정파제일미녀라는 별명은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실제로 그녀는 정파의 수많은 미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미녀였다. 하지만 일검유희를 마주한 순간.
지금까지 그녀가 갖고 있던 미모에 대한 자부심이 무너졌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여인인 그녀마저 일순간 혹할 정도의 미모다. 인세의 미모라 할 수 없었다. 월궁(月宮)에 산다는 전설의 미녀인 항아(姮娥)를 보는 것만 같았다.
‘저런 미녀가 인세에 존재하다니······.’
더군다나 이철수와 꽤 친한 듯, 그녀는 이철수의 손을 잡고 있었다. 검후가 입술을 깨물었다.
저 미녀가 일검유희 진소소라고?
게다가 나이도 그녀보다 족히 이십 년은 더 어렸다.
그런 주제에 미모도······.
검후가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검후의 눈과 일검유희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우연이다. 검후는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지금은 기척을 숨기고 있었다. 따라서 들킬 염려는 없다······.
하지만 아니었다. 일검유희의 시선은 정확히 검후가 기척을 숨긴 쪽으로 향했다. 그녀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이쯤 되면 아무리 둔한 검후라도 의도를 모를 리 없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검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검후 선배. 이런 곳에서 뵐 줄은 몰랐군요.]
거기에 먼저 전음까지 걸다니.
‘일검유희······. 초절정이 아니라 화경의 고수였던가?’
세간에 알려진 일검유희는 초절정의 신비 여고수.
하지만 지금 그녀가 느낀 일검유희의 경지는 그 이상이었다.
화경의 고수인 그녀의 은신을 정확히 알아차린 것도 모자라 전음까지 보내올 정도라면 단순한 초절정이라 할 수 없다.
기척 감지에 특화된 특수한 무학을 배운 게 아니라면, 같은 화경의 고수로밖에 볼 수 없다.
하지만 그녀가 알기로 일검유희는 방년(芳年)의 후기지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화경의 무인이라니. 방년의 나이에 화경의 경지에 오르는 건 하늘이 내린 기재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했다. 설마.
‘나이를 속인 건가?’
환골탈태를 겪은, 불혹(不惑)의 나이 이상의 신비고수가 나이를 속이고 동행한 걸지도 모른다.
검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신원도 나이도 경지도 숨긴 정체불명의 고수가 유 아주버님과 상공 옆에 붙어 있다니. 자칫 잘못하면 공동파의 안녕을 위협할 일이 될지도 몰랐다.
[소저는 누군데 은공의 옆에 그렇게 있는 건가요?]
검후가 전음을 보냈다. 그녀의 전음을 받은 유진휘의 입에 요염한 미소가 걸렸다.
[인사드리죠. 유 공자님의 주선으로 앞으로 공동파에 식객으로 신세 질 예정인 무림말학 진소소라고 합니다.]
[화경의 경지에 이른 고수가 무림말학과 후기지수를 자처하며 나이를 속이다니, 어이가 없습니다. 나이를 속이고 은공의 곁에 붙어서 아양을 떠는 모습, 부끄럽지도 않나요?]
[자처가 아닙니다. 나이를 속인 적도 없습니다. 소녀의 나이는 묘령(妙齡)이니까요. 믿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검후 선배님께 인정받고자 한 말은 아니니까요. 그저 진실을 알려드리려 했을 뿐이지요.]
진소소의 전음을 들은 순간.
검후의 은빛 눈동자가 멍하니 풀렸다. 나이가 정말 묘령이라고? 화경의 고수라면서? 거짓을 말한다기에는 너무나 당당한 눈빛과 말투였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거기에 그 영악한 능월향이 굳이 손을 잡자고 먼저 말한 것도 걸렸다. 정말 나이를 숨긴 화경의 고수였다면 아직 이십 대인 능월향이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녀는 이제 지천명에 가까운 본인과는 달리 꽃다운 나이의 처녀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이길 수 없다. 나이도, 젊음도, 미모도 모두 그녀가 아래다. 게다가 무위도 같지 않은가?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전음을 보냈다.
[그런데 왜 은공의 손을 잡은 건가요? 설마 유 공자님께서 진 소저를 은공의 배필로 추천했다는 소문이 사실인 건가요?!]
[글쎄요. 후후. 그나저나 검후 선배님께서는 이 공자와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사는 나누지 않을 생각인가요?]
말을 얼버무리면서 화제를 전환하는 진소소.
그녀의 대답을 들은 검후의 손이 떨렸다. 배필 추천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상관없었다. 지금의 진소소의 태도와 그녀를 놀리는 듯한 얄미운 미소만 봐도 진소소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는 분명했다.
‘저 어린 년이 감히 상공한테 꼬리를 흔들어······!’
그렇다.
진소소는 지금 상공을 유혹하고 있었다. 손을 잡은 것도 유 공자와의 친분을 내세운 결과겠지. 상공께서는 고아 출신. 사형인 유 아주버님은 가족이나 다름없으니, 그 약점을 파고든 것이다.
영악하기가 짝이 없다. 그와 함께 검후는 능월향이 왜 그녀와의 동맹을 제안했는지 깨달았다.
분하게도 지금의 그녀로서는 진소소를 혼자서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철수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어쨌거나 몰래 기척을 숨기고 상공을 훔쳐본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진소소가 상공에게 말해봤자 의혹 수준에서 끝날 것이다. 하지만 직접 드러낸다면 몰래 훔쳐봤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그렇게 된다면 상공에게 미움받을지도 몰랐다.
그건 싫었다. 상공에게 미움받을까 두렵다. 그러니 물증을 남기지 않고 지금 물러가야 했다.
[······지금은 바쁩니다. 나중에 인사하러 들를 것이니, 진 소저가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나중에 다시, 정식 만남 기대 하겠습니다. 검후 선배.]
그렇다고 제자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디까지나 대외적으로 검후인 그녀는 이철수를 연모해서는 안 되었으니까.
그러니 남는 건.
‘능월향 뿐인가. 마음에는 안 들지만······.’
어쩔 수 없다.검후는 진한 패배감을 안고 몸을 날렸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정처 없이 보신경을 운용한 그녀가 도착한 곳은 능월향의 방이었다.
검후의 시야에 능월향의 요염한 미소가 보였다.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여유 넘치는 표정도 보였다.
검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보고 오셨습니까?”
능월향의 질문에, 검후는 자리에 앉아 이제는 다 식어버린 능월향이 탄 차를 후루룩 마신 뒤, 찻잔을 탁하고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월동주(吳越同舟)라도 좋다면, 당신의 제안. 수락하죠.”
“소녀의 제안을 수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은 여협.”
검후의 말을 들은 적사월이 웃었다.
깊은 밤, 소림사 객당에서 정사를 대표하는 두 소녀의 은밀한 동맹이 결성되는 순간이었다.
*
검후를 쫓아보낸 유진휘는 웃었다.
‘내가 이겼어.’
유진휘는 승리감을 만끽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그동안 힘이 없어 사제를 지켜주지 못했던 치욕의 순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검후가 사제에게 가르침을 내렸을 때도, 검후가 사제와 함께 비동와 전대 검후의 유산을 찾았을 때도.
유진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힘이 없기 때문이었다. 화경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녀는 비로소 검후와 같은 경지에 올라, 같은 눈높이로 마주볼 수 있게 되었다.
비로소, 외인(外人)에 의지하지 않고도 사제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실이 너무 기뻐서.
유진휘는 웃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졌다.
하지만 화경의 경지에 만족할 수는 없다. 현경, 어쩌면 불임 극복 가능성이 있는 생사경의 경지까지 올라야 했다. 고금제일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하늘에 올라 법도를 바꾸어야 했다. 사제를 위해서라면 설령 천하가 적이 되더라도 모조리 멸할 압도적인 무력이 그녀에게 필요했다.
‘사제는 내가 지킬 거야.’
영원히.
나만이.
유진휘는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하늘에 걸린 달빛이 그녀의 어깨에 조용히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