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사형이 아니었다?!
툭.
혈도를 제압당해 온몸이 굳은 구 부인이 바닥에 쓰러지며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호각도 불었으니 이제 곧 천지회가 와서 상황을 수습할 것이다. 아무리 봐도 구 부인의 고절한 색공과 섭혼술은 단순히 호신용으로 무공을 익혔다는 대외적인 구 부인의 이미지와 괴리되어 있었으니까.
진실의 방에서 면담 좀 하면 정보가 술술 뽑혀 나오겠지.
상황이 좀 허무하게 끝나기는 했지만, 오히려 이게 낫다. 괜히 일 터져서 사형이나 내가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게다가 곧 용봉지회가 아닌가? 검룡(劍龍)의 별호를 받기 위해서는 컨디션 관리를 확실히 해야 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그때.
“흐윽······!”
등을 돌리고 있던 사형의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건······.
무언가 욕망을 억누르고 있는 듯한 야릇한 신음이었다. 잠깐 신음?
갑자기 왜? 내가 당황한 순간.
사형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기도가 불안정해졌다. 아까의 위압적인 무형지기와는 다른, 끈적하면서도 퇴폐적인 기도가 사형의 몸에서 불규칙하게 흘러 나왔다.
잘 정제된, 날카로운 칼 같은 사형의 평소 기도와는 완전히 다른, 굳이 따지자면 색공의 고수인 적사월과 비슷한 기도였다.
적사월과 비슷한 기도라고?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사형이 춘약에 당한 건 아니겠지?’
춘약(春藥).
춘기(春機)라고도 부르는, 남녀의 정욕(情慾)을 증폭시키는 약이다. 현대식으로 하자면 비아그라 같은 약. 비아그라와 차이점이라면 비아그라는 남자의 성기능 강화에만 효능이 있지만, 춘약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효과가 있다는 점이었다.
말하자면 비아그라와 여성용 성기능 강화 약물인 플리반세린를 합친 것보다 효과가 더 뛰어난, 현대 의학을 능가하는 중세 무림의 신비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같은 춘약이라는 이름이 붙은 약물이라도 원료가 되는 약재와 순도, 농도, 레시피에 따라 급과 효능이 천차만별이었다.
약간의 성적 흥분과 성욕 증진을 일으키는 하급 춘약에서부터, 피부에 닿자마자 온몸에 스며들어 이성을 잃고 정욕에 미친 짐승으로 변하게 만드는 최상급의 춘약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고수의 경지에 오르면 하급의 춘약은 주독(酒毒)을 해독하는 것처럼 내력의 운용으로 자연스러운 해독이 가능했다.
하지만 최상급의 춘약은 달랐다. 최상급의 춘약은 고수라도 꼼짝없이 정욕에 미친 괴물로 만들었다. 이세계 중세 무림의 최상급 춘약은 옛 구무협 시절 색협지에서 나오던 만능물질 춘약과 거의 같은 성능을 지니고 있었다.
최상급 춘약은 강력한 효능만큼 가격도 더럽게 비싸고, 제조도 더럽게 어려워서 희귀했지만 말이다.
물론 나는 육체의 교합이 아닌 심신의 조화를 이루는 운우지락을 지향하는 색도의 일대종사. 춘약을 사용한 운우지락은 심(心)을 배제한 신(身)만의 교접. 올바른 운우지락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는 춘약도, 춘약을 이용한 섹스에도 아무 관심이 없었다.
“흐으윽, 흐으으으······.”
사형이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경국지색(傾國之色), 천하제일미의 아름다움을 지닌 사형의 얼굴은 분홍색으로 예쁘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이성을 잃고 초점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사형의 몸에서 폭발적인 기도가 피어올랐다. 아무리 봐도 최상급 춘약, 그것도 혈교의 비전으로 만들어낸 아주 지독한 물건으로 당한 게 틀림없었다.
빌어먹을.
“흐으으읏······.”
사형이 몸을 배배 꼬면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곧바로 보신경을 사용해 움직이려 했다.
정말 사형이 혈교 비전의 최상급 춘약에 당했다면, 그렇다면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이대로라면 정욕에 미친 사형이 나를 덮칠 것이다.
지금의 사형은 천하절색의 여인처럼 보이지만, 그의 본래 성별이 남자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물론 성별에 약간의 의심이 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사형이 사내가 아닌 여인이라고 확정지을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춘약을 먹은 사형이 정욕에 폭주해 한 마리의 짐승이 되어 나를 덮친다?
나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걸 느꼈다.
소중하게 간직한 동정이었다. 내 동정을 약물에 바칠 수는 없다. 무조건 좋은 분위기, 최고의 침대와 숙소에서 최고의 상대와 마음이 통하는 진정한 섹스를 해야 했다.
약에 취한 섹스가 아니라. 거기에 상대는 여인도 아니고 사내지 않는가?
머릿속에 남색을 권하던 사대부와 내시 놈들이 떠올랐다. 심지어 어떤 미친 금의위 위사놈은 나를 제압해서 범하려고 했다. 그때 숨겨둔 암기통이 없었다면 그대로 내 순결을 잃었을 것이다.
그때의 끔찍한 과거가 떠올랐다.
생각만 해도 두렵다. 남색은 안 돼!
그러니 벗어나야 했다. 그리고 천하제일 돌팔이 당영령을 찾아와야 했다. 설마 신의를 자처하면서 춘약 하나 해독 못 하는 건 아니겠지?
“사제에······. 가면······. 안 돼······.”
그렇게 내가 자리에서 벗어나려던 그때.
사형의 몸에서 압도적인 검은 기도가 피어올랐다. 번쩍.
이성을 잃은 사형의 몸이 흐릿해졌다. 우당탕탕!
일순간 나는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사형에게 덮쳐져 바닥을 뒹굴었다. 바닥에 부딪힌 머리가 아팠다.
사형이 충혈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내 손목을 꽉 잡았다.
“사제느은, 벗어날 수 없어어······.”
얼굴을 붉힌 사형이 헤실헤실 웃었다.
경국지색의 미녀 모습을 한 사형의 웃음은 그야말로 천상의 미소. 순간 넋이 나갈 뻔했다.
하지만 사내다. 사내에게 내 뒤쪽을 개통당할 수는 없다. 나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화경의 경지에 이른 절대고수인 사형의 폭주를 막을 수는 없었다.
춘약은 독이 아니다. 따라서 춘약에 당했다고 해서 공력이 흩어지거나, 내력 수발이 어려워지는 부작용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정욕이 폭주하면서 내력도 같이 폭주해서 평소보다 더 강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마치 도핑한 것처럼 말이다. 지금의 사형이 그랬다.
“사제······. 하아······. 하아······. 사제······. 나만의 사제······. 나의 소중한 사제······.”
사형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내 바로 앞에서 내 뺨을 쓰다듬으면서 웃었다.
나는 몸을 움찔했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내 정신은 현경의 경지지만, 신체는 초절정에 불과했다.
천무지체이자 화경의 고수인 사형에게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이대로 남색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안 돼······! 사형에게 첫 포옹, 첫 어깨 키스까지 내준 나였다.
하지만 동정은 다른 이야기다. 이런 식으로 아무리 예쁘다지만, 아무리 사형이라지만, 사내에게 동정을 내줄 수는······!
내가 다시 한 번 발악하려던 그때.
“하아······, 하아아······. 하으으읏······. 사제······. 나······. 너무 더워어어······.”
사형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내 귓가에 달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르륵.
그와 함께 사형의 옷가지가 바닥에 하나둘 떨어졌다.
그리고 내 눈앞에······.
사형의 나체가 드러났다.
어슴푸레한 황촉(黃燭)의 불빛 아래 흔들리는 달덩이 같은 거유, 세류요(細柳腰)를 닮은 잘록하고 요염한 허리와 11자 복근, 그리고 그 아래로 보이는······. 수풀 하나 없이 매끈한 꽃잎과 탐스러운 꿀벅지.
잠깐.
안 달려 있다고?
사형의 국부를 확인한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그러니까······.
사형이······. 정말 여자라고? 사형이······. 사형이 아니라 사저였다고?
검성 유진휘가······. 남장······. 여자였다고?
여자······.
아니 정말로? 사형의 성별을 직접 확인한 순간, 내 머리가 멍해졌다.
생각해보니 공동파 입문 후부터 지금까지 사형의 알몸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사내 따위와 같이 목욕하고 같이 잠자는 건 딱 질색이었기에 나로서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하지만 사형은? 동성 사형제끼리 같이 목욕하고 잠자는 것 정도는 친목을 다지는 좋은 수단이라 때때로 권장되는 것이 강호 무림이었다.
그런데 사형은 내게 단 한 번도 같이 목욕하자 말한 적 없었다.
방도 매번 따로 썼다. 공동파의 재정 형편이 그리 좋지 않은데도······. 사형은 각방을 고집한 것이다.
나는 사형의 성별을 사내라고 생각했다. 서창과 동창의 검증도 거쳤을뿐더러 사내만 타고나는 천무지체의 자질에 달거리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형이 달거리를 했다면, 후각에 예민한 내가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하지만 사형이 여인이었다면? 공동파의 재건을 위해 성별을 사내로 위장했다면? 사내에게만 나타난다는 천무지체를 여인의 몸으로 타고난 부작용으로 달거리를 하지 않은 거였다면?
그렇다면 모든 것이 설명이 되었다.
그렇다.
사형은 여인이었다. 무협소설 국룰 여캐인 남장여자말이다.
“사형······.”
사형과 그동안 공동파에서 함께 보냈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할 수 있는 세월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회귀 이전에 황상이 내 가족 같은 존재였다면, 회귀 이후에는 사형이 그랬다.
사실 처음에는 사형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절세미남인 사형이다. 거기에 1회차 때는 여인들에게 인기가 하늘을 찔렀던 인물이었다. 내 영웅호색 십년대계에 걸림돌이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형을 멀리할 수도 없었다. 미래의 검성, 천하제일인의 사제라는 지위는 내 대계에 반드시 필요했으니까.
그래서 비즈니스 파트너로 대하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는 나도 모르게 사형에게 정을 붙여왔다. 호구처럼 쓸데없이 착한 모습, 나에 대해 아무런 의심 없이 그냥 무조건 나를 신뢰하는 모습이 바보 같아서.
회귀 이후 가장 오랜 시간 부대끼면서 정을 들인 걸지도 몰랐다. 어쩌면 나는 사형을 가족처럼 생각할지도 몰랐다. 그래, 말 잘 듣는 동생 하나 생겼다고 생각하자.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런 말 잘 듣는 동생이 사실 남동생이 아니라 여자, 그것도 내 이상형의 미모를 지닌 천하제일미녀라고?
믿을 수 없었다. 그럼 그때 내 어깨에 강렬하게 키스하고, 울던 나를 틈만 나면 끌어안았던 건?
사실 내가 미녀의 품에 안겨서 미녀의 키스 마크를 어깨에 받고, 미녀의 포옹을 심심하면 받았었단 말인가?
‘미친!’
사형과 함께했던 옛날 일을 떠올리자 얼굴이 붉어졌다. 심장이 나도 모르게 뛰었다. 미치겠군. 사형이 여자였다면 그때의 모든 행동들은, 시발.
돌겠다.
아니,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스윽.
사형, 아니 이제 사저라고 불러야 하나? 아무튼 유진휘의 고운 손이 내 가슴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탐스러운 흑발이 폭포수처럼 내 가슴 위에 쏟아졌다.
유진휘가 뜨거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사제에······.”
“······여인이셨습니까?”
내 말을 들은 사형의 흐리멍덩한 눈동자에 한 줄기 이성의 빛이 돌아왔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사형의 뺨이 떨렸다. 그녀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 그······. 그······. 사제······. 그······.”
내 말에 이성이 돌아온 사형이 얼굴을 붉혔다. 내 손목을 잡은 손을 그녀가 놓았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사형이 감싸며 마른세수를 했다.
“사제, 그, 그러니까······. 미······. 미안해······!!”
사형이 내 몸 위에서 빠르게 일어났다. 그녀가 방을 뛰쳐나가려던 순간.
덥석.
나는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