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최신 유행
구 부인.
다른 이름은 구옥련. 모용세가주 효성검군(曉星劍君) 모용백이 늘그막에 들인 애첩으로, 대부인 사후 사실상 모용세가의 안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여자.
그것뿐이라면 흔한 세가 내부 여인 암투의 승리자일 뿐일 터. 하지만 구 부인의 권력은 모용세가의 안방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옛 진(秦)의 환관 조고가 이세 황제 호해를 유흥에 중독시켜 꼭두각시로 만들고 본인이 권력을 장악한 것처럼, 모용백을 여색의 쾌락에 중독시켜 그녀의 허수아비로 만들고, 모용백의 권위를 빌려 실질적으로 모용세가를 지배하는 비선실세였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모용백이 가주였지만 말이다.
비선실세 구 부인이 나를 보고 싶어 한다니.
의례적인 말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의례적인 말이었다면 굳이 전음을 보낼 필요가 없었다. 그냥 육성으로 말하면 그만이었다.
‘모용세가의 비선실세가 날 보고 싶어 한다고.’
청담회의 배후에는 모용세가가 있다.
그리고 모용세가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건 구 부인이다. 전생 동창에서도 파악하고 있던 정보였다. 물론 비선조직으로 성장한 청담회의 주축 멤버는 정파 무림의 권력자들. 모용세가의 비선실세 따위에게 휘둘릴 위인들은 아니었다.
모용세가가 육대세가의 일좌를 차지하는 거대 세가라고는 하지만, 중원의 변방인 요녕성에 있어 영향력은 제한적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초기인 지금이라면 다르다. 청담회 초기, 주축 멤버들이 아직 후기지수인 지금이라면 구 부인이 사실상 청담회의 수장이라 할 만하다.
게다가 더 중요한 사실은.
‘······춘약 공급책이 구 부인이었지······.’
청담회 약물 난교 파티에서 사용된 춘약의 출처가 구 부인이라는 거다.
그리고 구 부인에게 춘약을 공급한 공급책은 암상(暗商)이었다. 암상과 암시장이야 넓은 중원에 수없이 많아서 그 당시에는 거기서 더 파고들지 않았다.
하지만 2회차에서 혈교의 존재를 알게 된 지금은 다르다.
‘춘약의 공급책이 혈교였다면? 구 부인이 혈교의 끄나풀이었다면?’
혈교.
놈들은 강시는 물론 각종 약물 제조에도 능통했다. 강시 제조 과정에는 특수 약물이 필수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놈들의 자금원은 약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만일 그 약물을 통해 의도적으로 모용세가주와 가솔들을 중독시키고 모용세가를 지배했다면? 거기에서 나아가 청담회 멤버들에게 약물을 퍼뜨려 중독시키고, 정파 무림 전체를 장악하려 했다면?
전생에 있던, 사형을 남궁, 화산, 점창, 청성의 네 초고수가 호북성 무한 목란산(木蘭山) 일대에서 급습해서 합공했던 목란의 변(木蘭之變)이 실은 정파 무림을 장악하려던 혈교의 계획에 예상치 못하게 나타난 사형이 방해하자 그를 제거하기 위해 꾸민 차도살인계획이었다면?
모든 게 가정일 뿐이지만, 무섭도록 앞뒤가 맞아떨어졌다.
만일.
만일 구 부인이 정말 혈교의 끄나풀이고, 청담회의 배후에 혈교가 있었다면.
그렇다면 지금 구 부인과 청담회를 미리 뿌리 뽑아야 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모용위에게 전음을 보냈다.
[잊지 않았습니다. 꼭 참석하도록 하죠.]
내 말을 들은 모용위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그가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축하주라도 한잔······.”
“금주 중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차라도 한잔하시죠.”
모용위가 내 빈 찻잔에 쪼르르 차를 따랐다.
역시.
저 곱상한 인상, 사내답지 못한 중성적인 몸매에 여자 같은 목소리와 기생오라비 같은 얼굴까지.
내가 아니라 쟤가 기생오라비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고로 남자라면 나처럼 태평양처럼 떡 벌어진 어깨에 우락부락하고 우람한 근육을 지녀야 알파 메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모용위와 함께 차를 들이켰다.
[회에 동행할 여인은 정했습니까?]
모용위가 내게 전음을 걸어왔다.
[일검유희 진 소저가 내 동행자요.]
내 말을 들은 모용위의 시선이 사형을 향했다. 끈적한 눈으로 사형을 훑어보는 모용위.
그래봤자 사형은 일단 사내긴 한데, 기분이 좋지 않다.
사내라고 해도 사내에게 욕망을 품지 말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었다.
전생에 날 끈적한 눈으로 바라봤던 조정 대신들이 떠올랐다.
‘빌어먹을 게이 새끼들······.’
이 시대 선비와 사대부들에게 최신 유행 문화란 바로 미소년 시동과의 남색이었다. 대명제국 10대 황제였던 무종 정덕제(武宗 正德帝)부터가 미소년들과 남색을 즐긴 변태였는데, 그런 무종의 남색 행각을 선비들이 따라 하며 독버섯처럼 번진 것이다.
그렇게 지금 시대에 와서는 최고의 쾌락은 여색이 아닌 미소년과의 남색이라고 사대부들이 공공연히 떠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심지어 북경에는 사대부들을 상대로 미소년 남창을 내세워 영업하는 남색 전용 기루가 일반 기루보다 더 성업할 정도.
그야말로 소돔과 고모라가 따로 없었다.
내가 과거 급제를 통해 벼슬아치로 출세가도를 달리는 루트를 포기한 이유도 그렇다. 유교 규율도 규율이지만 연줄도 뭐도 없는 내가 출세하려면 사대부들과 고관대작에게 줄을 대야 했다. 그런데 그 빌어먹을 사대부들의 이너 써클에 들어가려면 남색이 사실상 필수인데 난 그걸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당연히 선비 놈들은 내가 어차피 사내도 여인도 아니니 한번 지고의 쾌락을 느껴보지 않겠냐고 은밀히 접근하는 일이 허다했다.
스윽.
나는 사형과 모용위 앞을 자연스럽게 가로막았다. 저 변태가 자꾸 사형을 보며 입맛을 다시니 기분이 나빠졌다.
[공동괴협 이 소협께서 풍류에 정통한 사내라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구려. 하하하하. 이런 천하절색의 미녀를 본 회의 연회에 동행할 줄은 꿈에도 몰랐소.]
음흉하게 웃는 모용위.
그의 눈에서 끈적이는 욕망을 보니 이건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약물 난교 파티는 청담회 첫 연회부터 있었나 보군.’
그게 자발적인 난교 파티건, 비자발적 난교 파티건 간에 말이다.
이 시대의 파티에 여인과 동행하는 것까지는 상관없다. 풍류에는 당연히 주색(酒色), 즉 술과 여자가 뒤따라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이 시대에서는 당연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 약물이 끼어들면 다르다.
대비를 해야겠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모용위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럼 추후에 청담회에서 뵙도록 하겠소.”
“알겠습니다.”
사형을 가로막은 채, 모용위와 인사를 나눈 나는 그를 떠나보냈다.
그때.
“이 공자님······.”
스윽.
사형이 내 등 뒤에서 나왔다.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소녀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형이 새하얀 섬섬옥수로 옆머리를 넘겼다. 그가 배시시 웃자 연회장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미치겠군.
사형은 남자다. 그리고 나는 게이가 아니다. 그렇게 내가 스스로를 세뇌하려던 그때.
“이봐요!”
연회장을 울리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흑발과 은발 투톤헤어가 인상적인 미소녀, 소검후 천소빈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뚜벅, 뚜벅.
그녀가 보신경까지 밟아가면서 빠르게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내 앞에서 정확히 멈춘 소검후가 나를 바라보면서 입술을 우물거리더니 전음을 보냈다.
[도저히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서요. 대체 왜 절 도와준 거죠?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으면서, 순순히 이용당해준 이유가 뭐죠? 설마 당신 정말로 저를······.]
소검후의 붉어진 얼굴이 보였다. 대체 이 아가씨가 뭘 착각하고 있는 거지?
나는 소검후를 바라보며 전음을 보냈다.
[네가 좋아서가 아니야.]
[그럼요?]
[네가 검후 님의 하나뿐인 제자니까, 이용당해준 거야. 어쨌거나 미래에 검후 선배가 내 여자가 된다면, 검후 선배의 제자인 너도 내가 사부(師夫)로서 책임져야 할 테니까. 그뿐이야.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마음에 품은 건 검후 선배지 네가 아니야.]
내 말을 들은 소검후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이 정도 했으면 좀 알아먹었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흥.”
내 말을 들은 소검후가 다시 뛰쳐 나갔다. 아니 왜 자꾸 나가고 난리야.
뭐 좋다.
이제 곧 용봉지연도 파할 시간이니, 사형과 함께 청담회 잠입 작전을 준비해야 했다.
*
소검후는 용봉지연이 열리는 장원에서 빠져나왔다. 정파 무림의 동량지재와 교류하는 중요한 연회였다. 아무리 구파일방의 장문제자인 소검후라도 함부로 도중에 퇴장하면 안 된다. 하지만 그런 사실까지 무시할 정도로 소검후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방금 이철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부님을 위해서라니······.’
널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모든 건 검후 님, 사부님을 위해서 한 일이라 했다. 모든 걸 처음부터 알았으면서 소검후인 그녀에게 이용당해준 것도, 사부님의 하나뿐인 제자라 일부러 그랬다고 했다.
소검후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정처 없는 걸음이 닿은 곳은 숭산 산자락이었다. 그녀가 바위에 걸터앉았다.
이철수가 나서서 남궁청을 제압했을 때만 하더라도, 솔직히 소검후는 설렜다. 마음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나아가 그가 모든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말했을 때는 수치를 느꼈다. 그런데도 곤경에 처한 그녀를 외면할 수 없어 도와줬다고 말했을 때는.
심장이 뛰었다.
얼굴이 붉어졌다. 부끄러웠다. 복잡한 감정이었다. 그때부터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는 색마였다. 그러니 몸을 줘도 마음은 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 체면을 깎아가면서까지 이철수의 부인이 되기를 자청한 상태였다.
어차피 지아비가 될 사내고 몸을 바칠 상대라면, 그렇다면 이왕이면······. 그녀에게 마음을 준 사내인 쪽이 좋지 않을까?
소검후는 그리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철수의 행동은 누가 봐도 그녀를 사모하는 사내의 행동이었다. 좋아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다 알면서도 이용당해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대놓고 전음으로 물었다.
좋아하냐고.
그가 그녀를 사모한다면, 그렇다면······. 천소빈 본인도 진짜 제대로 된 정인이 되어줄 생각이 조금은 있었다. 몸이 아닌 마음을 조금은 허락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품고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뭐가 사부님을 위해서라는 건가요?!”
그녀의 예상과는 반대였다. 사부님을 위해서란다. 그녀가 아닌, 사부님을 위해서.
천소빈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분했다. 비참했다.
그것도 모르고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 착각했다. 마음을 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가 소문의 색마가 아닌 제법 괜찮은 사내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철수는 그녀가 아닌 그녀의 뒤에 있는 사부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그는 일관적이었다. 사부님과의 첫 대면 이후 정사지쟁에서 공개 고백을 했을 때부터 그는 줄곧 사부님을 본인의 여자로 만들 거라고 떠들고 다녔다.
언행에서부터 그는 이미 사부님만 바라보고, 사부님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단지 그녀가 믿지 않았을 뿐이었다. 진지한 연정이 아닌, 색욕에 불과하다 착각했을 뿐이었다.
그는 언제나 사부님에게, 검후 님에게 진심이었다.
사부님이 이철수에게 진심으로 반한 것처럼, 그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아니.
‘이렇게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내한테······. 사부님이 안 반하는 게 이상해요.’
좋아하지도 않는 그녀가 고작 사부님의 제자라는 이유로 순순히 이용당해줄 정도로 검후를 진심으로 대한 이철수였다.
사내를 대한 경험이 부족한 사부님이 그에게 안 반하는 것이 더 이상했다.
그의 외모가 보통이라면 모를까, 기생오라비나 여인 혹은 여인을 홀리는 색마들처럼 선이 가늘고 야비하게 생기기는 했어도 일단은 제법 용모가 뛰어났으니.
그 사실을 천소빈은 잔인하게도, 그에게 반하고 난 뒤에야 깨달았다.
천소빈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렀다.
“왜 하필 사부님인 거죠? 다른 여인도 아닌, 사부님이 왜······.”
가슴에 비수가 꽂힌 것처럼 아팠다.
그녀가 사부님보다 더 어렸다. 그녀는 이철수와 또래였다. 좋아한다 고백도 했다. 체면을 깎아가면서까지 그에게 매달렸다. 그런데 왜.
대체 왜.
그는 사부님을 선택한 것일까.
사부님은 여전히 존경하고 동경했다. 하지만······.
하지만 그가 사부님을 선택하는 건 죽는 것보다 싫었다.
천소빈이 흐르던 눈물을 소맷자락으로 닦아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절대 사부님한테 당신을 넘기지 않겠어요.’
사부님을 위해서라도.
‘당신을 내 지아비로 만들겠어요.’
그를 내 사내로 만들리라.
소검후는 그렇게 다짐하면서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
용봉지연이 파한 뒤.
나는 서문청하와 남궁청을 돌려보낸 후, 사형과 함께 2차 행사이자 오늘의 메인 행사인 청담회 연회가 열리는, 모용세가가 통째로 빌린 주루로 향했다.
시간은 어느새 훌쩍 지나 달이 떠오른 밤.
주루 앞에서 나는 모용위를 다시 만났다.
“하하하하, 어서 오시오. 이 소협, 그리고 진 소저. 구 부인과 다른 분들이 두 분을 기다리고 계시오. 후후후후.”
모용위가 음흉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사형이 내 팔에 더 찰싹 달라붙었다. 이제는 익숙한 사형의 가슴 감촉이 팔 너머로 느껴졌다.
“여기, 배첩이요.”
“이 소협과 동행자 진 소저. 이 모용 모가 확인했소이다. 그럼 모시겠소.”
모용위의 답변과 함께 끼이익하고 주루 문이 열렸다.
그렇게 열린 문 너머에서 내가 본 광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