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소녀지쟁(少女之爭)
같은 시각.
소림사 객당.
염희 능월향, 아니 적사월은 소림사를 떠나지 않고 객당에 계속 머무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년들이······.’
정파제일문파 천년소림. 천하공부 출소림으로 유명한 정종 무학의 종가.
그 소림사에 사파제일인인 그녀가 무려 숙박씩이나 하다니.
그것도 신승과 직접 대면해서 양해까지 구하면서 말이다.
치욕이었다.
‘그 빌어먹을 땡중 놈. 왜 쓸데없이 웃고 난리야.’
적사월의 손이 벌벌 떨렸다.
어제저녁, 소림에 좀 더 머무르기 위해 신승에게 양해를 구하러 갔을 때 신승이 지은 미소가 떠올랐다. 속세에 해탈한 것처럼 초연한 신승의 미소가 그렇게 얄밉게 보일 수가 없었다.
[사찰이 손님을 가려 받을 수는 없는 법. 시주의 마음이 다할 때까지 머물러도 좋소. 아미타불. 부디 적 시주의 마음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내 부처님께 기원하도록 하겠소.]
거기에 직접 염주를 굴리며 반장하는 모습까지.
신승의 얼굴이 떠오르니 괜히 더 약이 오르는 적사월이었다.
그런데도 적사월은 소림을 떠날 수 없었다.
‘그 나쁜 놈만 아니었더라면······!’
적사월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어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적사월로 치욕을 겪었다. 능월향으로는 치욕을 넘어 외면당했다.
적사월의 손이 떨렸다. 그녀의 뺨이 흔들렸다.
‘부탁······.’
이철수의 말이 적사월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래. 그의 부탁은 화정현을 지켜달라는 거였다. 그래서 그녀의 제자인 백면암군을 호출해서 그녀가 부재한 동안 화정현을 지키라 명했다.
사파제일인인 그녀가 백도 무문 공동파를 신경 쓰는 것도 우스운 일이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경을 쓰지 않을 수도 없었다.
혹시라도 자리를 비운 동안 공동파에 무슨 변고라도 생기면 왠지 마음이 찝찝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철수는 그녀에게 부탁을 어겼다 말했다. 그 말에 적사월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제자인 백면암군을 대신 앉히고 왔노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백면암군은 하오문의 문주이자 화경의 고수.
염희 능월향의 명목상 상관이다. 능월향이 함부로 움직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니 백면암군을 능월향 대신 불렀다고 대답한다는 건, 곧 능월향과 적사월이 동일인이라 시인하는 것과도 같았다.
‘그, 그럴 수는······. 없어······.’
적사월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의 손이 떨렸다.
그래, 그럴 수 없었다. 아직은 이철수의 전부를 신뢰할 수 없다.
그의 무얼 믿고 위장 신분을 전부 밝힌단 말인가?
아니, 어쩌면······.
‘······이제 와서 위장 신분을 밝힌다면······.’
이철수는 본인이 기만당했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이철수뿐만이 아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지금까지 인연을 맺은 사파의 고수가 전부 동일인이라니.
사람의 마음을 희롱하냐고 반발해도 그녀는 할 말이 없었다.
“으으으······.”
적사월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위장 신분 활동은 하오문에서는 기본이었다. 특히나 천하제일미, 축복보다는 저주에 가까운 초월적인 미모를 지닌 그녀에게 위장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남녀 할 것 없이 모두를 홀리는 천하제일미 적사월로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사월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철수, 그가 적사월의 미모 앞에서도 안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기 전까지만 해도.
‘······가가가 날 싫어하게 될지도 몰라.’
전부 밝힌다면, 그가 멀리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적사월의 마음속에 무섭도록 두려움이 솟아올랐다. 적사월이 주먹을 꽉 쥐었다.
‘본녀의 마음이 고작 그것 때문에 흔들린다고?’
40년도 더 차이나는 후기지수다. 그것도 백도 무문의 소년이다.
그런 아해를 상대로 사파제일인인 그녀가 동요한다는 건 말도 안 됐다.
하지만 그녀의 감성은 달랐다. 심장이 두려움으로 뛰었다. 안색이 창백해지고, 손발이 벌벌 떨렸다.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이철수, 그가 그녀를 더없이 차갑게 외면했던 그날이. 공동파 본산에 올라가서야 겨우 용서받을 수 있었던, 악몽 같았던 기간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제 이철수가 보냈던 차가운 눈길이 떠올랐다.
그의 부탁을 안 지켰기 때문이다. 거기에 만약 위장 신분을 전부 고백한다면?
그때처럼 용서받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이번에는 영원히······.
‘그럴 수는 없느니라!’
적사월이 62년 동안 간직한, 여린 소녀의 마음에 입은 상처가 덧났다. 적사월은 칼로 심장을 저미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녀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숨쉬기가 힘들다. 답답하다.
그래.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존심 때문이라도 이철수의 마음을 가져야만 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고, 이철수가 그녀의 품을 떠나 살 수 없을 정도로 적사월에게 의존하게 될 때.
이철수가 어떤 상황에서도 능월향이라는 기녀를 버릴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때 고백할 것이야······.’
그때 비로소 털어놓을 것이다. 능월향, 여예령과 적사월은 동일인이라고.
그렇다면 이철수도 결코 그녀를 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능월향으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야만 했다. 적사월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우선······. 가가한테 사과부터 해야겠지······.’
적사월이 그리 결심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선 순간.
현경의 경지에 달한 그녀의 기감에 누군가의 인기척이 걸려들였다. 적사월은 재빨리 기도를 거뒀다.
‘······가가가 아니군.’
가가의 기척이 아니다. 하지만 어딘가 낯익은 기척이었다.
염희 능월향은 대외적으로 호신을 위해 익힌 무공의 경지가 일류밖에 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적사월이 일류의 경지에 맞게 기도를 가다듬으면서 잠깐 솟았던 눈물을 닦아내고 얼굴 표정을 빠르게 정리한 그때.
“은설란입니다. 능 소저.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문 너머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설란.
그 이름을 들은 적사월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아직 굴욕이 생생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저 어린 년이 무슨 꿍꿍이로 본녀를 만나러 온 거지? 확인이나 해 봐야겠군.’
적사월은 그리 생각하면서 말했다.
“들어오세요. 은 여협.”
허가가 떨어지자 미닫이문이 열렸다. 신비로운 은발이 흩날리며 그녀가 들어왔다.
검후 은설란.
그녀의 은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은설란의 은빛 눈동자에 능월향이 담겼다. 능월향과 마찬가지로 은설란 역시 소림사 앞에서의 일을 잊지 않았다.
둘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드르륵.
검후가 의자를 빼서 적사월의 맞은편에 앉았다.
먼저 정적을 깬 건 능월향의 모습을 한 적사월이었다.
“······강호 무림을 위진하는 대항산파의 장문인께서 저 같은 천한 기녀한테 무슨 말씀을 하려 이런 누추한 곳까지 걸음하셨습니까?”
적사월의 말에 은설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오늘 능월향을 찾을지 말지 밤새 고민한 은설란이었다.
더욱이 오늘은 용봉지연이 열리는 날이다. 그녀의 사랑하는 상공인 이철수가 남궁세가의 대공자와 비무하는 날이기도 했다. 이상적인 부인으로서 상공을 내조하기 위해 용봉지연에 참석해야만 했었다.
능월향만 없었더라면.
검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적사월의 말 속에 깃든 칼날을 모를 정도로 검후는 어리석지 않았다. 명분 하나에 죽고 사는 백도 무림에서 48년 일생을 살아온 노강호가 검후 은설란이다. 이 정도 인사도 받아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능 소저께서는 분명 어제 향화를 다 끝냈을 텐데도 아직 소림에 머물고 계시는군요. 사찰이라 잠자리가 불편하지는 않으십니까?”
검후는 그렇게 말하면서 옅게 웃었다.
능월향이 차기 천하제일미로 거론되는 절세미녀라지만, 그녀의 나이는 아직 이립도 되지 않았다. 반면에 그녀는 지천명에 가까운 세월을 겪은 무림명숙. 경륜으로는 어디 가서 밀리지 않는다.
그리고 경륜이라면 은설란보다 족히 십 년은 더 쌓은 적사월의 속은 까맣게 타 들어가고 있었다.
‘이 건방진 년이······. 어린 치기를 앞세워 본녀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신승을 제외하면 그녀와 맞먹는 배분의 고수는 강호 무림에 없었다.
최고 수준의 배분에 도달한 그녀 앞에서 이렇게 기어오르는 상대는 검후가 처음이었다. 굴욕적이다. 하지만 숨길 수밖에 없다.
‘······그래. 지금의 본녀는 능월향. 저년보다 어린, 풋풋한 소녀니 말이다.’
지금의 그녀는 은설란보다 어리니까. 그 사실을 떠올리니 적사월의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가 말했다.
“물론 향화는 어제 끝냈습니다. 하지만 불공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소녀는 오늘부터 회가 끝날 때까지 연모하는 이 가가의 용봉지회 제패를 기원하기 위해 소림사 대웅보전에서 불공을 드릴 생각이니까요.”
적사월의 말을 들은 은설란의 눈동자가 떨렸다.
능월향의 말을 해석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나는 이철수를 사모하지만, 너는 이철수와 아무 관계도 아니지 않느냐? 그런데 왜 찾아와서 배분을 내세워 겁박하는 것이냐?
은설란의 속이 끓었다.
하지만 그녀는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능월향······. 그 건방짐도 오늘 끝이다.’
능월향에게 젊음이 있다면, 은설란에게는 구파일방 장문인의 배분과 검후의 명성이 있다.
은설란은 그리 생각하면서 적사월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하겠습니다. 능 소저. 더 이상 은공을 미혹에 빠뜨리지 마십시오. 그분께 접근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은설란의 말에 적사월이 웃었다.
‘그래, 결국 이렇게 나오는군.’
예상했던 전개다. 적사월은 당황하지 않았다.
“미혹이 아니라 연모입니다. 은 여협. 소녀의 순수한 연심을 미혹이라 착각하다니 섭섭합니다. 게다가 가가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은 여협께서 소녀한테 관여할 처지도 아닌 것 같고요.”
적사월이 요사스러운 눈웃음을 흘렸다.
지금의 은설란은 결코 이철수와의 연심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 싸움은 무조건 그녀가 이기는 싸움이었다.
은설란의 은빛 눈동자가 적사월을 향했다.
그녀의 심장이 아프게 뛰었다. 은설란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제도 들었던 말이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제대로 답할 각오를 다진 은설란이었다.
‘상공······. 속이 좁고 투기가 많은 소첩을 용서해주세요······.’
은설란은 속으로 상공에게 사과하면서, 능월향을 노려보며 말했다.
“아무 관계가 아닌 게 아닙니다.”
“그럼 어떤 관계입니까? 설마 백도 무림에 그 이름이 드높은 검후 은 여협께서 삼십 년은 더 어린 이 소협을 진심으로 연모하기라도 한다는 말입니까?”
적사월이 웃었다.
정파인들에게 명분과 체면은 목숨과도 같은 것.
그러니 검후는 30년은 어린 핏덩이 후기지수를 진심으로 연모한다고 결코 인정할 수 없다.
검후가 그녀의 연심을 인정한다면, 백도 무림 전체가 그녀를 주책맞다고, 나잇값도 못 한다고, 너무 오래 독신이라 남자에 미쳤다고 손가락질할 것이다.
은설란의 눈동자가 떨렸다.
“은공은······.”
그녀의 은빛 시선이 똑바로 적사월을 향했다.
은설란이 말했다.
“······제 지아비가 될 사내입니다.”
검후의 말이 끝난 순간.
적사월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