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그녀의 역습
사형의 전음을 들은 나는 그 자리에서 얼었다.
남자를 보고 세우다니?
아니, 애초에 저 얼굴이 남자라고?
내가 꿈에서 그리던, 이상형의 절세미녀를 그대로 닮은 저 여성스러운 얼굴과 몸매가······.
정말 내가 아는 그 사형이라고?
소양심법의 구결을 읊었다. 단전에서 한 줄기 치솟은 내력이 그대로 눈으로 향했다. 내력으로 안력을 강화해서 본인을 사형이라 주장하는 이상형의 그녀 얼굴을 샅샅이 분석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절세미녀라서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을. 그녀의 얼굴은 천하절색이라 할 만했지만, 잘 뜯어보면 이목구비가 사형과 닮아 있었다.
사형의 여동생이라고 해도 될 정도.
‘하지만 몸매는?’
사형이 여유증이 있다는 사실은 안다. 하지만 규화보전 같은 쓰레기 무공이 아니라면, 여유증은 환골탈태를 통해 치료할 수 있다. 당장 내가 전생에 현경의 경지에 도달해 환골탈태를 통해 여유증을 치료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의 사형은 아주 자연스러운, 진짜 여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탐스럽고 풍만한 한 쌍의 수밀도(水蜜桃)를 닮은 거유를 흑의 무복 속에 감추고 있었다.
설마 저게 다 뽕이라고?
그뿐만이 아니다. 언뜻 비치는 몸매 라인은 완연한 여인의 그것이다. 물론 변장과 역용은 첩보 임무의 기본 중의 기본. 그래서 나도 알고 있는 변장술이 꽤 많았다.
그런데 사형이 이렇게 수준 높은 역용술을 익혔던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정말.
사형이 정말 남자라고?
‘하지만 사내만 타고 태어나는 천무지체에, 동창과 서창의 교차 검증에서도 남자랬는데?’
전생의 객관적인 정보가 머리에 떠올랐다.
동시에 현생의 내가 지금 받아들이는 시각적인 정보와 마지막으로 내 꼿꼿이 선 묵직한 아랫도리가 느껴졌다.
나는 게이가 아니다. 나는 사내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 양물은 오직 절세미녀한테만 반응한다.
그런 내 X침판이 사형이 여장했음을 밝혔는데도 계속해서 꼿꼿이 서 있다.
내 알파 메일의 본능이 속삭이고 있었다. 사형은 남자가 아니다. 여인이다. 여인이 아닌 사내에게 하초가 발기할 리가 없지 않느냐.
이성과 감성, 주관과 객관이 충돌했다.
머리가 어지럽다. 이러다가 심마(心魔)에 빠지는 건 아닐까.
‘이제 와서 심마라니!’
현경의 완성된 정신을 가진 내가? 심마라고?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의구심을 완전히 해소하는 건 불가능했다.
‘사형은 정말 사내일까?’
용봉지회로 출발하기 전.
하오문에서 일검유희 관련 정보를 입수했을 때부터 들었던 근본적인 의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동창과 서창의 정보가 틀릴 확률은 희박하지만 존재한다.
그렇다면······.
[사제?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아?]
그때.
내 귓가에 사형의 전음이 들려왔다.
그와 함께 사형이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인지 그녀인지 헷갈리는 사형이 슬그머니 내 오른쪽 옆구리로 다가온 그때.
“자, 잠깐만요! 다, 당신은 누구죠?!”
옆에서 뾰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문청하였다. 그녀의 시선이 사형을 향했다.
서문청하의 시선을 받은 사형이 웃었다. 사내인 걸 알고 있는데도 무심코 심장이 떨릴 정도로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경국지색의 미소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문 소저. 유 소협의 친우인 진소소라고 합니다. 강호의 동도들한테는 일검유희라는 과분한 별호로 불리고 있습니다.”
사형의 입에서 평소의 중성적인 목소리가 아닌, 완벽한 여인의 미성(美聲)이 흘러나왔다. 옥음(玉音)이라 칭해도 될 정도로, 듣는 사람의 심장을 뒤흔드는 마성의 목소리였다.
진소소? 가명을 너무 대충 지은 것 아닌가?
거기에 목소리는 또 왜 저래. 미치겠네.
나는 아직 서 있는 양물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으윽······.’
하지만 양물은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만년화리의 양기가 아직 전부 흡수되지 않은 탓이었다. 체내에 잔류하는 양기가 계속 양물을 자극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나는 삼음진결의 구결을 외웠다. 단전에서 치솟은 차갑고 게이같은 음한지기가 사지백해를 통해 흘렀다. 우뚝 섰던 양물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빌어먹을.
“신비고수라는 일검유희 진 여협의 면사로 가려진 미모가 절색이라는 소문이 강호에 파다하던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요. 그래서, 진 여협은 왜 온 건가요?”
서문청하의 날카로운 시선이 사형을 향했다.
사형이 부드럽게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내 오른쪽 팔에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유 소협께서 일이 있어 금일 용봉지연에 사제와 동행할 수 없다고 하여, 제가 유 소협의 부탁을 받아 대신 이 소협을 호위하기 위해 왔습니다.”
뭉클.
사형의 가슴이 내 팔에 닿았다. 팔뚝에 푹신한 가슴의 감촉이 느껴졌다. 이게 가짜 가슴이라고? 아무리 봐도 진짜 같은데?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의심암귀가 점점 커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두 사람의 신경전은 계속됐다.
“그, 그런데 왜 제 공자님한테 달라붙는 건가요?! 중인환시리에 아녀자가 외간 남자의 팔에 달라붙다니 수치스럽지도 않나요?!”
서문청하가 사형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녀의 말대로 사형은 내 팔뚝에 찰싹 달라붙어 팔짱을 낀 채로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원래라면 내가 사형을 밀어냈겠지만······.
지금은 왠지 그럴 수 없었다. 코 끝을 스치는 들꽃 향기가 점점 진해졌다.
사형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짙어졌다.
“소녀는 공동괴협 이 소협의 명성을 들었을 때부터 이 소협을 흠모해왔습니다. 소녀는 그저 이 소협한테 흠모의 표현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게다가 오늘만큼은 소녀는 이 소협의 수신호위입니다. 호위 대상의 곁에 붙어있는 것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서문 소저야말로 이 소협과 어떤 사이이길래, 소녀한테 이리 언성을 높이는지요.”
사형이 차분한 말투로 서문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형의 입가에 요망한 미소가 걸렸다.
아니.
이게 내가 알던 사형이 맞아? 그 소심한 사형이라고?
혹시 다른 사람 아니야?
“······흥! 저는 공자님의 전속 시비라고요! 그러니까······.”
할 말을 잃은 서문청하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가 뭐라 말하려던 그때.
“알겠습니다. 서문 소저.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가죠. 이 소협.”
사형이 서문청하의 말허리를 자르면서, 나와 팔짱을 꽈악 낀 채로 나를 이끌었다.
“자, 잠깐만요! 가, 같이 가자고요! 같이! 이런 게 어디 있냐고요!”
서문청하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사제. 오늘은 사형한테 전부 맡겨!]
뒤이어 내 귓가에 사형의 전음이 울렸다.
뭘 맡기라는 건지 모르겠다.
정말.
미치겠군.
*
등봉현 저잣거리.
용봉지회 때문에 평소보다 유난히 더 붐비는 번화가 한복판에 누가 봐도 눈이 휘둥그레해질 정도의 미소녀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은발과 흑발이 뒤섞인 머리가 인상적인 미소녀.
항산파의 장문제자, 소검후 천소빈이었다.
“······왜 이렇게 늦는 건가요?”
천소빈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오늘이었다.
용봉지연에서 그녀를 두고 이철수와 남궁청이 비무를 벌이는 날이다.
아직 이철수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천소빈이다. 하지만 이철수보다 더 싫은 풍류공자 남궁청의 구애를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오늘만큼은 이철수와 정인인 것처럼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더 떨어질 체면도 없어요!’
그날의 공개 고백 이후.
소검후 천소빈에게 더 떨어질 체면은 없었다. 세간에는 이미 그녀가 이철수와 몇 번이나 밀회를 가지고, 야밤에 남몰래 사통하여 합방했다는 남사스러운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
겉잡을 수 없이 불어난 소문, 평범한 아녀자였다면 혼삿길이 막힐 정도의 소문이었지만 천소빈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소문이 도는 것이야말로 그녀에게 유리했다.
이철수와의 혼인이야말로 그녀의 최종 목적이기 때문이었다.
‘두고 봐요. 이번 용봉지연에 참석한 정파 무림의 후기지수들 앞에서 당당히, 이철수 당신과 제가 정인이라는 사실을 공인받고 말 거니까요!’
천소빈이 그렇게 다짐한 그때.
그녀의 시야에 이철수의 모습이 들어왔다.
“왜 이렇게 늦었······.”
이철수를 발견한 천소빈이 그를 부른 그때.
천소빈의 눈에 이철수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묘령의 미녀가 들어왔다.
가히 하늘이 내린, 천하의 미(美)를 모두 합쳐도 모자랄 정도로 압도적이고 폭력적인 미모와 완벽한 자태를 보유한, 미모로 천하를 어지럽히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녀가 그와 팔짱을 끼고 있었다.
“······.”
미녀와 마주한 순간, 천소빈은 그 자리에서 얼었다.
그녀도 어디 가서 박색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항산파에서도, 후기지수들 사이에서도 천소빈의 미모는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천소빈의 미모는 검후의 뒤를 이은 산서제일미를 자처할 만했다.
그래서 천소빈은 본인의 미모에 대해 자부심이 있었다. 서문청하, 서하린도 미소녀였지만 그녀와 수준이 크게 차이 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미녀는 달랐다. 그녀의 압도적인 미모를 마주한 순간.
천소빈은 절망감을 느꼈다. 저건 인세의 미모라 부를 수 없다. 세상에 어떻게 저렇게 생긴 미인이 있단 말인가? 그런 미인이 이철수의 옆에 있다고?
너무나 압도적인 차이에, 천소빈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 당신은 누군가요······.”
천소빈의 질문에 유진휘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절세미녀인 유진휘가 미소를 짓자, 주변이 환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인파로 붐비던 저잣거리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저잣거리의 모든 사람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유진휘를 보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유진휘가 웃었다.
두근.
그녀의 심장이 뛰었다.
‘오늘뿐이야. 오늘······.’
사제의 곁에서, 여인으로 있을 수 있는 건 오늘뿐이다. 그래서, 유진휘는 사제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심장이 아프게 뛰었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기분이 좋았다. 비록 거짓이라고 해도······. 사제의 곁에서 여인으로 있을 수 있어서 좋았다. 행복했다.
유진휘는 사제의 팔을 꼬옥 붙잡으면서 웃으며 말했다.
“유 소협의 부탁으로 금일 이 소협의 수신호위를 맡은 진소소라고 합니다. 강호 무림의 동도들한테는 일검유희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일검유희.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협을 행하는 신비 여고수. 그녀가 미녀라는 소문은 들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천소빈이 입술을 깨물었다.
‘정신 차려 천소빈! 이철수의 정인은 너라고!’
그렇다.
이철수의 정인으로 오늘, 정파 무림의 후기지수들에게 공인받으리라 결심했다. 그런데 일검유희 앞에서 주눅들어서 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천소빈이 웃었다.
“그렇군요. 반가워요. 저는 항산파의 천소빈이라고 해요.”
천소빈은 유진휘를 바라보면서, 자연스럽게 비어있는 이철수의 왼쪽 팔뚝에 팔짱을 꼈다.
“이 소협을 연모하고 있죠. 잘 부탁드려요.”
천소빈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천소빈을 보던 유진휘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의 손이 살짝 떨렸다.
‘······사제를 좋아하지도 않는 주제에······.’
유진휘는 천소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천소빈은 사제를 말로는 연모한다 내뱉지만, 진실로 연모하지 않는다.
유진휘는 스스로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난 결코 정실이 될 수 없겠지······.’
그녀는 불임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천하제일의원 당영령의 진단이니 확실하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유진휘는 결코 이철수의 정실부인이 될 수 없었다.
‘첩······. 아니 정부(情婦)의 자리도 각오했어. 말석이라도 좋으니까, 사제의 여인이 되겠다 다짐했어. 하지만······. 사형으로서······. 소중한 사제를 기만하는 여인은 용서할 수 없어.’
그래서 각오하고 있었다.
사제의 첫 번째는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래도 상관 없었다. 두 번째, 세 번째······. 아니 말석이라도 좋다. 첩이 아닌 정부라도 좋다. 그렇게라도 그의 여인이 되고 싶다 생각했다.
하지만 여인이 아닌 사형으로서, 사제를 연모하지도 않는 여인은 용납할 수 없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주제에.
여인이지만 여인이라 말하지 못하고, 좋아하지만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유진휘였다.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연정을 말하는 천소빈이 더 꺼려졌다.
유진휘가 천소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요.”
유진휘와 천소빈, 두 소녀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한 순간.
“두 분 지금 뭐하는 거죠?! 중인환시리에 정말, 수치라고는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는군요! 흥. 가요!”
뒤에서 서문청하가 나타나면서 대치 구도를 깨뜨렸다.
그렇게 세 미소녀에게 포위당한 이철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용봉지연이 열리는 웅풍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