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일검유희(一劍遊姬)
“사형. 그럼 저는 이제 목욕재계를 하러 가보겠습니다.”
“그래.”
객당에 돌아오자 서하린이 내 팔뚝을 놓으면서 고개를 공손하게 숙였다.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서하린이 사라진 이후, 나는 가장 먼저 사형을 찾았다.
“사형. 우제가 할 말이 조금 있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사형 방 앞에서 인기척을 내며 말을 걸자, 문 너머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괜찮아. 사제. 들어와.”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고 사형 방안에 입성했다. 어느새 밤이 되었는지 창살 너머에서 달빛이 비쳤다. 등불이 흔들렸다. 어둠 너머로 사형의 하얀 얼굴이 보였다. 코 끝에 들꽃 향기가 스쳤다.
탁.
문이 닫혔다.
사형이 의자에 앉았다. 언제 봐도 여자보다 더 예쁜 얼굴.
미래의 정파제일미녀 서하린보다 사형이 더 예뻐 보였다.
‘······여장시키기 딱이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사형의 얼굴을 바라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사형의 얼굴이 붉어졌다.
“······무, 무슨 일이야 사제? 호, 혼원일기공을 말하는 거라면 지금 복원 중이니까······.”
탁자 위에 낡은 혼원일기공의 비급과 지필묵이 어지럽혀진 모습이 보였다.
“······혼원공의 구결을 이용하면 금방 복원할 수 있을 거야.”
사형이 내 시선을 피하면서 횡설수설했다. 혼원공이라.
전생의 사형이 만들어낸 무공 중에 혼원공이나 그와 유사한 역할을 하는 무공은 없었다. 그래서 혼원일기공을 복원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하지만 전생과는 달리 현생에서는 진천검왕과 만나 혼원공을 창안했기 때문에 혼원일기공의 복원도 빨라지려는 모양.
중요한 일인 건 맞지만, 지금 당장 논해야 할 일은 아니다.
“사형.”
“으, 응?!”
내가 부르자 사형이 얼굴을 붉히면서 나를 바라봤다.
귀엽다.
남자를 보고 귀엽다고 생각하다니, 내가 미친 건가?
돌겠군. 정신 차리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형에게 말했다.
“일검유희, 사형 맞죠?”
내 말을 들은 사형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
사제의 말을 들은 유진휘의 눈동자가 떨렸다.
일검유희.
그녀가 만든 위장 신분이자, 아녀자라는 본래의 성별로 활동하기 위해 만들어낸 가면이다.
평생을 사내로 살겠다. 그렇게 다짐한 유진휘였지만, 최근 그 다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철수.
소중한 그녀의 사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항상 지켜주고 싶은, 천하가 등돌리더라도 마지막까지 그의 편에 서주기로 결심한 사제에 대한 연심을 자각한 이후부터.
유진휘는 아녀자로서 활동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일검유희는 그런 그녀의 욕망이 빚어낸 결과물이었다. 명분은 공동파의 제자 유진휘가 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하기 위해 만든 위장신분이었지만, 실상은 그랬다.
그래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제, 이철수가 일검유희와 그녀가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지적한 순간. 그녀가 숨기고 있던 비밀, 진짜 성별이 들킨 것 같은 마음이 들어서.
‘어, 어쩌지······.’
유진휘의 눈동자가 뱅글뱅글 돌았다. 사제의 무심한 눈길이 느껴졌다. 평소와 같은 눈길.
하지만 유진휘는 알았다. 사제는 허언하는 성격이 아니다. 그가 말했다면, 확실한 근거가 있어서 말한 것이다.
그러니 변명해봤자 소용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제에게는 더 이상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성별을 속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니, 어쩌면······. 알아줬으면 했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여인이라는······.
‘아니야······. 그건······.’
유진휘는 스스로를 부정했다. 그녀의 심장이 뛰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 응······. 맞아. 사, 사제가 조언해준 대로 만든 내 위장 신분이 일검유희야······. 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
그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웠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사제는 그녀를 사내로 알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위장 신분이지만 사내가 여장을 하고 고수로 활동하다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부끄러운 일이었다.
‘사, 사제가 날 이상하게 보면 어쩌지······.’
유진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평소에도 사고 가속을 통해 남들보다 배는 긴 체감시간을 살아가는 유진휘였다. 사제가 대답할 때까지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머릿속에 수없이 많은 상념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유진휘가 떨고 있던 그때.
덥석.
그녀의 손에 누군가의 손길이 닿았다. 이철수였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사형. 다행입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유진휘의 눈이 떠졌다. 그녀의 시선이 이철수를 향했다.
그녀의 완전 기억 능력 속에서도 가장 진하게 남아 있는, 사랑하는 사제의 얼굴이 보였다.
두근.
유진휘의 심장이 뛰었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말했다.
“······일검유희가 필요합니다.”
“으, 응?!”
사제의 말에 유진휘는 저도 모르게 반문을 내뱉었다.
“······모용세가 대공자한테서 배첩을 받았습니다. 청담회라는 모임에 저를 초대하더군요. 하지만 모임에 참가 조건이 있었습니다. 절색의 미녀를 동반해야만 입장이 가능하다더군요.”
절색의 미녀.
유진휘는 그 단어를 입 안으로 굴렸다.
“청담회. 척 봐도 수상한 느낌이 풀풀 풍기는 모입입니다. 하지만 초대받은 이상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요. 그러나 이런 수상한 모임에 사매를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외인인 서문 소저나 당 선배는 더더욱 아니 될 일이고요. 그래서 부득이하게 사형한테 부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여인으로 분장하는 것이 어려운 일임은 잘 알지만 그래도 사형 말고는 달리 부탁할 상대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사제의 말을 들은 유진휘의 머리가 멍해졌다.
이성으로는 사제의 제안을 거절해야 한다 생각하고 있었다. 기껏 천하제일이 되기 전까지는 사내로 살기로 결심한 그녀였다. 이제 와서 결심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녀의 감성은 달랐다.
나도 연모하는 사내 앞에서 아녀자로 있고 싶다. 나도 그의 곁에 함께하고 싶다. 그와 함께······.
비록 거짓 신분이라도······. 그에게 여인으로 보이고 싶다.
유진휘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이철수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사제의 부탁이라면······. 할래.”
이성과 감성의 충돌에서 승리한 건 감성이었다.
할래.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은 순간, 유진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의 심장이 위험할 정도로 아프게 뛰었다.
사제의 곁에 여인으로 머물 수 있다. 그 사실이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좋습니다. 연회는 용봉지연이 끝나는 대로 바로 개최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내일 열릴 용봉지연부터 사형께서는 일검유희의 신분으로 저와 함께하셔야 합니다.”
“······응. 그럴래.”
“우제의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 내일 봐!”
드르륵.
대화가 끝난 뒤, 사제는 정중한 인사와 함께 문을 열고 나갔다.
탁. 문이 닫힌 뒤에도 유진휘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허공을 헤맸다.
‘사제와 내일, 단둘이······. 하, 함께······. 연회를······.’
그녀의 심장이 계속 뛰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유진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스르륵.
그녀의 발밑에 붕대가 떨어졌다. 그와 함께 그녀의 가슴팍이 부풀었다. 지금까지 숨기고 있던 여인의 아름다운 가슴이, 자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이 온통 뜨거웠다. 그녀의 몸이 떨렸다.
드디어 사제의 곁에, 여인으로 있을 수 있다.
유진휘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날.
유진휘는 밤새 잠을 자지 못했다.
*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기감을 펼쳐 주변을 확인했다. 정파제일문파 소림사에서 사고를 칠 미친 놈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다.
서문세가에서도, 항산파에서도 자꾸 누가 나를 찾는 일이 있었으니 말이다.
‘다행히 아무도 없군.’
기감을 펼쳐 한참 주변을 탐색한 끝에 나는 아무도 없다는 결론을 내린 뒤, 품에서 목갑을 꺼냈다.
딸깍.
목갑을 열자 뜨거운 양기의 기운이 피부를 저릿하게 만들었다.
‘이 영롱한 정력제의 모습 좀 보라지.’
핑크색으로 빛나는 절세의 정력제, 만년화리의 내단이 눈앞에 있었다.
이제 일도 다 끝냈으니 좌고우면할 필요가 없다.
먹는다.
나는 그대로 내단을 집어 입 안에 넣었다. 꿀꺽. 내단은 혀에 닿자마자 눈 녹듯 식도 안으로 넘어갔다. 곧이어 불타는 듯한 극양지기가 온몸을 불태웠다.
내가 삼류따리였던 시절에 이 정도 내단을 먹었다면 온몸이 불타 죽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어엿한 초절정의 경지에 달한 고수.
초절정이란 어떤 경지인가? 구파일방의 장문인, 육대세가의 가주가 그 정도 경지요, 한 성(省)의 패자를 자처할 수 있는 경지였다.
현대로 치자면 절정이 5급 사무관이라면 초절정은 고위공무원단 나등급에 이르는 3급 부이사관의 경지라 할 수 있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당당히 3급 부이사관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몸으로는 초절정의 경지, 마음으로는 현경의 경지에 달한 내게 만년화리의 내단이 품은 극양지기 컨트롤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웠다.
나는 눈을 감고 소양심법을 운용했다.
우웅.
소양심법의 묘리가 온몸을 불태울 듯 날뛰던 극양지기에게 고삐를 채웠다. 원래라면 여기서 극양지기를 단전으로 유도, 약효를 온전히 내력으로 전환해야 하지만······.
‘약효를 내공 같은 쓸데없는 걸로 전환하면······. 정력이 안 는다!’
기껏 먹은 절세의 정력제였다. 내공 따위로 전환하는 건 손해 중의 손해였다.
정력으로 바꿔야 했다. 그리고 극양지기를 정력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전신세맥과 근골로 영기를 퍼뜨려 온몸에 극양지기를 흡수시켜야 한다!’
단전이 아닌 전신세맥과 근육, 골수로 영기를 퍼뜨려 흡수시켜야 했다.
흐흐흐흐흐.
나는 속으로 상남자의 웃음을 지으며 사지백해로 영기를 퍼뜨렸다. 전신세맥과 근골에 극양지기가 퍼지자 온몸이 불덩이처럼 타올랐다. 작열통이 체내를 휩쓸었다.
아프다. 엄청나게 고통스러웠다. 온몸이 문자 그대로 불타는 듯한 고통에 휩싸였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진정한 상남자, 정력왕, 알파메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참아야 했다. 그렇게 나는 더 이상 들어가지 않을 때까지 전신으로 극양지기를 밀어 넣었다.
끔찍한 고통의 시간이 지나가고, 온몸에 극양지기가 흡수된 뒤, 나는 남은 극양지기를 단전으로 인도해 내력으로 전환했다.
우웅.
내력을 받아들인 단전이 떨렸다. 이로써 삼십 년 정도의 공력이 모였다. 번쩍.
기존에 모은 내력까지 합치면 총합 45년 정도의 내공이 단전에 잠들어 있었다.
나는 눈을 떴다.
“흐흐흐흐흐흐흐······.”
입에서 상남자의 웃음이 절로 나왔다. 온몸이 불덩이처럼 후끈했다.
나는 늘 가지고 다니던 동경을 꺼내서 내 몸을 비췄다. 근골에 양기를 흡수시켜서 그런지 상남자답게 떡 벌어진 어깨와 오밀조밀하면서도 탄탄한 근육질 몸매가 보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정력.
하반신에 뜨거운 양기가 뭉친 게 느껴졌다. 벌떡!
자연스럽게 불기둥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대물의 변화를 깨달았다. 크기에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만년화리의 기운은 내게 천하제일의 발기 지속력과 만년한철과도 같은 단단함을 선사했다.
“하루 종일이라도 세울 수 있겠군!”
히어로 영화에서나 나오던, 혈청을 맞은 슈퍼 군인이 된 느낌.
궁극의 정력.
칠주야 동안 삼처사첩은 물론 열 명의 미녀를 상대해도 지치지 않을 정도로 강철 같은 정력, 절대 정력에 한 발짝 성큼 다가간 느낌이 들었다.
나는 온몸에 넘쳐나는 양기와 정력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거기를 꼿꼿이 세운 채로 내일의 용봉지연을 기약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흐흐. 다 죽었어.
*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풀떼기뿐인 절밥을 해치운 뒤, 서하린과 돌팔이에게 인사한 뒤 서문청하와 함께 소림사를 나섰다.
오늘은 용봉지회 전날에 열리는 그들만의 연회, 용봉지연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용봉지연의 배첩을 받은 건 나와 서문세가의 금지옥엽인 서문청하 둘뿐. 동행자는 한 명까지 가능한데, 나는 이미 동행자로 사형, 아니 일검유희를 선택한 상황이었다.
“흥. 오늘 옥기린이랑 비무한다고 들었어요. 쓸데없이 나서서 지면 안 돼요! 아시겠나요?!”
“그래.”
내 옆에 붙은 서문청하가 내게 잔소리를 해댔다.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옥기린과의 비무라.
그래 그런 약속을 했었지. 소검후 때문에 얽히기는 했는데, 뭐 나쁘지 않은 비무 약속이다.
옥기린 남궁청.
나는 놈을 제물 삼아 검룡으로 거듭날 생각이었으니까.
그렇게 나와 서문청하가 소림사 일주문을 나선 순간.
[사제, 나 왔어.]
내 귓가에 사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함께 코 끝에 들꽃 향기가 스쳤다. 한 줄기 바람과 함께 시야에 누군가 나타났다.
하늘색이 감도는 윤기 흐르는 흑발이 인상적인, 천하제일미녀 적사월과 맞먹는 절세의 미모를 지닌 청순한 인상의 미녀가 거기에 서 있었다.
예쁘다, 그 말로 모자랄 정도로 천하의 미(美)를 모두 모은 듯한, 경국지색(傾國之色)의 고사를 재현하는 하얀 피부가 인상적인 17세 정도로 보이는 절세미녀가 거기 있었다.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 라인이 그대로 드러나는 흑의무복을 입은 미녀의 흑안이 내게 향했다.
누구지?
적사월 말고 또 저만한 미모를 지닌 미녀가 있었다고? 전생에도 들어본 적 없었다. 저 정도의 절색이라면 분명 소문이 났을 텐데······.
그런데 얼굴이 왠지 낯익다. 내가 아는 사람인가?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의 얼굴이 수줍게 붉게 물든 순간.
우뚝.
내 몸에 넘쳐나는 양기가 하초로 몰리며 꼿꼿이 섰다.
만년화리의 양기가 아직 근골에 전부 녹아들지 않은 탓에 벌어진 불상사였다. 당황한 내가 빠르게 물건을 가라앉히려던 그때.
[사, 사제, 나, 나야······. 유, 유 사형이야······.]
눈앞의 절세미녀가 내게 전음을 보내왔다.
잠깐.
뭐?
사, 사형이라고······? 그럼 내가······.
사형을 보고 거기를······. 세웠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