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천하제일 수밀도(天下第一 水蜜桃)
이철수와 그 옆에 있는 서하린의 모습을 본 적사월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의 시선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가슴이었다.
‘가슴을 숨기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클 줄이야······.’
적사월의 적안이 떨렸다.
서하린이 본인의 가슴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눈썰미로 알아차린 적사월이었다.
하지만 진짜 크기가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가슴만큼은 천하제일······. 어쩌면 고금제일을 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본인부터 천하제일미인 적사월이었다. 외모를 보는 심미안만큼은 누구보다 정확했다.
그런 적사월의 심미안은 서하린의 가슴을 천하제일, 아니 고금제일이라 판정했다.
단순히 크기만 크다고 천하제일 수밀도라고 할 수는 없다.
거대하기만 하다면, 흉물일 뿐이다.
크기뿐만 아니라 모양까지 좋아야 진정한 천하제일의 수밀도다.
그리고 서하린의 가슴은······.
누구라도 선망할 정도로 딱 좋은 크기의 거유에 형태도 아침에 맺힌 이슬 물방울처럼 완벽한 모양.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미모도 몸매도 져 본 적 없는 적사월이었다.
검후와 소검후를 포함한 다른 연적들을 상대로 그녀가 자신감의 우위를 가지는 것도 단순히 예쁘다 수준을 넘어 억조창생을 모두 홀릴 정도로 압도적인, 신기(神技)와 공능(功能), 요술의 영역에 도달한 고금제일의 미모 때문이었다.
그런 미모가 통하지 않는 상대가 이철수였지만, 그도 사내인 이상 언젠가는 넘어오리라 생각했다.
다른 여인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아무리 정파제일미녀니, 무슨 절색이니 하더라도 천하제일미인인 그녀의 발끝조차 따라가지 못했으니까.
적사월의 미모는 천하제일을 넘어 서시, 왕소군, 양귀비, 초선과 비교해서 고금제일을 논하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래, 분명 그랬다.
그건 적사월에게 상식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본녀보다 더 아름다운 가슴을 지닐 수 있단 말이더냐?!’
오늘, 그 상식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녀의 몸이 떨렸다. 물론 얼굴의 미모를 논하자면 서하린은 적사월은커녕 능월향보다도 살짝 모자라다.
하지만 가슴.
가슴만큼은······. 그녀와 대등,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본녀보다 훨씬 어린 주제에······. 저런 가슴은······!’
서하린의 나이는 적사월 본인보다 40년 이상 연하라는 점이 문제였다.
62세.
평소에 나이에 대해 별 자각이 없는 적사월이었다. 현경의 경지에 이른 고절한 무공과 환골탈태 덕분에 신체 나이가 약관 시절로 고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적사월뿐만 아니라 화경 이상의 고수들은 환골탈태를 통해 신체가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수행한 무학에 최적화된 육신으로 탈바꿈했다.
그렇기에 화경의 고수 대부분은 신체적 전성기인 20대의 외모를 하고 있었다.
적사월의 경우에는 20대, 한창 꽃다운 전성기의 물오른 천하제일미의 미모를 62세까지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이가 일 갑자하고도 이 년을 넘은 지금도 그녀에게 구애하는 사내가 중원 전역에서 몰려들었다.
그러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었다. 적어도 적사월에게는,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진짜 어린, 천하제일 수밀도를 보유한 서하린과 만난 순간 그녀의 마음에 알 수 없는 검은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건 그녀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 열등감이었다.
“······당신이 감숙제일기녀로 이름이 높은 염희 능 소저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이 사형의 사매인 서하린이라 합니다.”
그리고 머리가 영민하고, 타인의 감정에 민감한 서하린은 적사월의 열등감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적사월의 시선이 향하는 장소가 그녀의 가슴이라는 사실도.
서하린은 인사를 건네면서, 얼굴 근육을 움직여 아직 익숙하지 않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이철수의 팔은 여전히 가슴으로 붙잡은 상태로 말이다.
서하린은 교묘한 각도로, 적사월이 잘 볼 수 있도록 가슴이 돋보이는 자세를 취했다.
‘후후······.’
검후와 능월향을 상대하기 위해 동맹을 결성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마침내 능월향에게 첫 승리를 거둔 것이다.
기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 핏덩이 년이?!’
서하린의 의도를 적사월이 모를 리가 없었다.
적사월의 적안에 불꽃이 튀었다. 그녀는 끓어오르는 질투에 움직이려는 의념과 내력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여기는 소림사.
정파의 태산북두라 불리는 문파다. 게다가 신승도 있지 않은가? 제아무리 사파제일인이라도 경거망동할 수 없는 곳이다.
적사월은 들끓는 의념을 가라앉히면서 말했다.
“서 소저군요. 가가께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서 소저의 말씀대로 소녀가 바로 능월향입니다. 세간에서는 염희(艶姬)라는 과분한 별호로 불리고 있지요.”
적사월이 떨리는 뺨으로 서하린에게 인사했다.
서로 존재를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공식적인 통성명은 처음인 자리. 62세와 15세, 두 소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저도 사형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 사형을 일방적으로 연모하신다고요?”
서하린의 말에 담긴 속뜻은 너는 사형을 가가라고 부르지만, 사실 정인 사이가 아니라 짝사랑하지 않느냐는 지적이었다.
‘이 년이······! 어른 앞에서 버르장머리가······!’
곧바로 속뜻을 알아차린 적사월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적사월은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은 채로, 서하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글쎄요. 서 소저야말로 소림사 본사 경내에서 사내의 팔을 가슴으로 감싸는······. 남 보기 부끄러운 행위를 대담하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사형제 사이의 우애를 다지는 일입니다. 외인인 능 소저께서 신경 쓸 일은 아닙니다.”
적사월의 지적에 서하린이 답했다.
저런 파렴치한 행위를 하고 사형제의 우애를 다지는 일이라고?
궤변이다.
하지만 그녀가 외인인 건 사실이었다. 사문의 일에 외인인 그녀가 함부로 끼어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적사월이 입술을 깨물면서 말했다.
“하지만······.”
“능 소저야말로 사형을 찾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역시 사형을 일방적으로 사모한다는······.”
“······향화를 위해서입니다. 겸사겸사 평소에 친분이 있던 가가의 얼굴도 보고 인사도 나누려 했지요.”
“그럼 얼굴을 보았으니, 이제 향화를 하러 가면 될 것 같습니다.”
서하린의 말에 적사월이 입술을 깨물었다.
‘감히 본녀한테 꼬박꼬박 말대꾸까지······!’
하지만 그가 보고 있기에, 더 나아갈 수 없었다.
이철수의 사매라는 서하린의 신분이 적사월의 발목을 잡았다.
이철수는 천애고아. 그에게 있어 사형제는 가족과도 같은 존재일 것이다. 이철수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서하린에게 함부로 대하면 곤란했다.
적사월의 눈길이 이철수를 향했다.
그의 눈빛이, 천하제일미녀인 적사월 본인을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전혀 흔들리지 않고 부동심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그녀의 입술에 호선이 그려졌다.
‘후후. 제아무리 아름다운 수밀도를 갖고 있어봤자, 가가의 부동심에는 무의미하니라.’
왠지 이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시간 낭비를 했군. 저 어린 것과 더 말을 섞어봤자 본녀의 손해일 뿐이야.’
알 수 없는 자신감에 경도된 그녀의 시선이 이철수를 향했다.
그래.
서하린을 상대하는 건 시간 낭비이자 손해다. 그녀에게 주도권을 내어줘서는 안 된다.
게다가 그녀가 만나려고 했던 상대는 서하린이 아닌 이철수가 아닌가?
그러니 이철수에게 말을 거는 게 맞다.
적사월은 판단을 끝낸 뒤에 이철수에게 말을 걸었다.
“가가는 어떻습니까? 소녀와 차라도 한 잔······.”
*
귓가에 적사월의 말이 들려왔다.
진작 돌아간 줄 알았는데, 능월향의 모습으로 또 소림으로 돌아왔을 줄이야.
나는 서하린의 가슴골에서 내 팔뚝을 빼냈다.
“아······.”
서하린의 낮은 탄성이 울려왔다.
두 여인이 왜 싸우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내게는 여기서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하루빨리 절세 정력제를 복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적사월이 능월향의 모습으로 온 이유야 뻔하다. 천하제일인 그녀의 미모에 내가 넘어가지 않았으니, 친분 있는 능월향의 모습으로 돌아와 날 어떻게 해보려는 거겠지.
‘여전히 나를 믿지 않는군, 적사월.’
그녀의 수작에는 넘어가지 않는다. 오려면 제대로 부캐와 본캐를 전부 오픈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능 소저. 감숙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하남에서 능 소저의 얼굴을 볼 줄은 몰랐군요.”
“······가가가 보고 싶어서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내 말을 들은 적사월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가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적사월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능 소저와 같이 다과를 들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바빠서 함께 할 수 없겠구려. 거기에······. 내가 분명 화정현을 부탁한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어째서······. 소림에 온 건지도 모르겠고 말이오.”
나는 능월향의 모습을 한 적사월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내가 분명 용봉지회를 가기 전에 그녀에게 부탁했었다. 화정현을 부탁, 정확히는 공동파 입구를 좀 지켜달라고.
그런데 능월향은 그 약조를 어기고 지금 소림에 온 꼴이었다.
사도련주 적사월이야 어디에 있건 상관없지만, 염희 능월향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인물이다.
나는 그 사실을 적사월에게 상기시켜줬다.
내 말을 들은 적사월의 얼굴이 굳었다.
“가, 가가······. 그건······.”
“······뭐 능 소저한테도 사정이 있어서 그랬으리라 믿겠소. 그럼, 죄송하지만 사정이 있어 지금은 이만 가보겠소. 향화 잘하시오. 가자, 사매.”
“알겠습니다. 사형.”
찰싹.
다시 내 곁에 달라붙는 서하린.
나는 그녀를 데리고 적사월을 지나쳐 객당으로 향했다.
“가, 가가······! 가가!”
등 뒤에서 적사월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지금이라도 적사월과 능월향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밝힌다면, 뒤돌아볼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예상대로 그녀는 끝까지 본캐를 밝히지 않았다.
충분히 그녀와 가까워졌던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니······.
왠지 입맛이 쓰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서하린과 함께 객당으로 돌아왔다.
*
같은 시각.
등봉현.
모용세가는 육대세가에 속하는 명문답게 등봉현의 고급 주루를 통째로 빌려 숙소로 삼고 있었다.
이철수에게 배첩을 전달한 모용위는 주루 입구에 들어섰다. 가솔들이 그를 반겼다.
모용위는 가솔들의 인사를 받으면서 주루 맨 위층으로 올라갔다.
등봉현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주루 꼭대기에 입성한 모용위의 눈동자가 살짝 풀린다.
후욱.
사람의 이지를 흐뜨리는 미혼향이 그의 코 끝을 스쳤다.
“······오셨습니까? 대공자.”
모용위의 귓가에 요염하면서도 끈적이는 여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모용위가 떨리는 손으로 붉은 주렴을 걷었다. 그러자, 거기에는 헐떡이며 새근새근 잠든 중년 남성과 그 위에 올라탄 40대처럼 보이는 중년 미부가 있었다.
기름지면서도 탐스러운 뱃살,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요염한 자태를 지닌 그녀야말로 모용세가의 실권을 쥐고 있는 모용세가주의 애첩, 구옥련이었다.
가주와 막 정사를 끝낸 모양인지, 분 냄새와 밤꽃 향기, 미혼향과 춘약의 향기가 뒤섞인 야시꾸리한 냄새가 모용위의 후각을 자극했다.
“······예, 구 부인.”
모용위가 자연스럽게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런 모용위를 구 부인이 살며시 끌어안았다. 관리를 잘 한 모양인지 40대의 나이에도 30대처럼 보이는 구 부인이었지만, 분으로 가린 눈가의 자글자글한 주름살이 선명했다.
하지만 미혼향에 취한 모용위에게는 그마저도 아름다워 보였다.
“지시한 대로 공동괴협에게 배첩은 잘 전달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모용위의 대답을 들은 구 부인.
아니, 구 부인이라는 신분으로 위장한, 색공을 연성한 혈교의 주교 구옥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좋습니다. 그럼 상을 내리겠습니다. 이리로······.”
구옥련이 상의를 완전히 벗어 던졌다. 미혼향에 취해 이미 눈동자가 풀려 완전히 흥분하여 짐승처럼 변한 모용위가 구옥련을 덮친다.
구옥련은 미공자인 모용위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생각했다.
‘공동괴협······. 아니 공동색협에 쌍발색검 이철수라······. 과연 소문대로 대단한 사내일지······. 기대되는구나. 후후후후후.’
수없이 많은 사내의 품에 안겨 운우지락을 나눈 구옥련이었다. 이철수가 소문대로 대단한 절륜남이 맞는지 은근히 기대됐다.
곧이어 주루의 꼭대기 층에서 여인의 교성과 함께 뜨거운 열락이 휘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