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물컹
청담회(淸談會) 연회라는 언급을 들으니 반사적으로 관련 정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실 청담회가 처음부터 정파 무림의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렙틸리언 같은 비선 조직은 아니었다.
원래 청담회는 용봉지회에서 모여 풍류를 즐기는, 나름 이름있는 풍류공자들의 친목 모임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이 시대에 풍류(風流)란 곧 주색잡기(酒色雜技), 그러니까 경치 좋은 데서 여자 끼고 술 마시면서 시 짓고 그런 걸 뜻했다.
좋게 말하면 사내답게 풍류를 즐기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모여서 술이나 퍼먹는 망나니 모임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망나니라고는 해도 대부분 구대문파, 육대세가에 소속된 지체 높은 귀공자들이 모여 결성한 회(會)이다.
시간이 지나 귀공자들이 자라 성인이 되어 정파 무림의 요직을 맡으면서 청담회도 자연스럽게 권력자들의 이너 서클로 변질됐다.
뭐, 여기까지는 현대에서도 국회의원들이 공부회 명목으로 모여 파벌을 결성, 정치세력화하여 권력을 장악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그렇게 특이한 현상은 아니긴 했다.
미래의 검성이 된 사형을 청담회가 견제한 것도 기득권을 몰락 문파 출신 천하제일인인 사형에게 내어주기 싫은 정파 권력자들의 마지막 발악일 뿐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청담회 모임이 언젠가부터 단순한 술 파티에서 오석산(五石散), 몽혼약, 춘약(春藥)을 포함한 각종 흥분 약물 복용으로 얼룩진 난교 파티로 변질되었다는 건데······.’
청담회의 창립 초기 정보는 동창에서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애초에 명문대파 제자들은 혼담 같은 인적 네트워크로 서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기 때문에 청담회 같은 친목 모임도 한두 개만 있는 게 아니라 무수히 많이 존재했다.
창립 초기 청담회 역시 그런 무림 꽌시 관리용 친목 모임 중 하나로 시작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히틀러 입당 이전 지방 군소 정치 동아리에 가까웠던 나치당 같은 존재였다.
따라서 초기 청담회는 동창의 감시 대상이 아니었고, 전근대 시대 특성상 그리 중요하지 않은 창립 초기 정보는 남아 있지 않았다.
청담회를 동창이 주시하기 시작한 건 청담회가 한창 정파 무림의 프리메이슨으로 발돋움하던 시기였는데, 이때부터 이미 청담회에서는 오석산, 몽혼약을 통한 난교 파티를 주기적으로 개최하고 있었다.
‘동창은 강호 무림 암중 견제가 주요 업무였기 때문에, 이들 정파 무림 유력 인사의 약점을 잡아 쥐고 흔들기 위해 놈들의 춘약 난교 파티를 방치했지만······.’
지금의 나는 동창 요원이 아니라 엄연한 공동파의 제자.
게다가 사형을 앞세워 정파 무림의 비선실세가 되어 권력을 장악하려는 내게 청담회는 걸림돌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 내게 청담회 초대장이 날아든 것이다.
‘내가 정사지쟁을 거치고 소검후와의 비무에서 승리해서 제법 강호 무림에서 명성을 쌓은 데다, 놈이 날 본인과 동류인 색마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청담회가 그런 모임인 만큼, 당연히 모임의 주최자인 모용위 역시 어마어마한 색마(色魔)로 후일 밝혀졌다.
춘약(春藥)을 사용해 수많은 아녀자를 희롱한 건 물론 성상납 브로커 역할까지 한 희대의 색마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색마가 나를 동류라고 생각해서 말을 건 것이다.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정파 무림은 내 구역인데, 감히 엄한 놈이 지금 내 권력의 꿀단지를 탐내?
게다가 색도의 일대종사인 나를 본인과 같은 색마로 착각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 되겠다.
적을 상대하려면 일단 적을 알아야 하는 법. 나는 놈의 초대를 수락해서, 청담회의 현재 상황을 염탐할 계획을 세웠다.
[청담회? 처음 들어보는 모임이군요.]
[하하하. 그야 당연하지요. 청담회 연회는 이번이 처음이니 말입니다. 포부가 넓고 풍류를 아는 사내들만 초대받을 수 있는 모임입니다.]
모용위가 내게 말했다.
연회가 처음이라는 뜻은, 이번이 첫 모임이라는 뜻이다.
나는 몰랐지만, 청담회의 창립일이 오늘이었던 모양.
[감숙제일기녀 능 소저의 마음을 훔친 건 물론, 지금도 이런 절색의 미인과 팔짱을 끼고 산책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제가 공동괴협 이 소협을 잘못 본 것 같지는 않군요. 어떻습니까? 저희들과 함께 풍류를 논하는 것이. 후후.]
음흉한 눈빛을 보내면서 내게 불건전한 파티 참가를 권유하는 모용위. 나는 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풍류라, 좋습니다. 그런 모임이라면 언제건 환영입니다.]
[하하하하. 그럴 줄 알았습니다. 이 소협. 배첩은 지금 드리겠습니다.]
모용위가 내게 전음으로 말하면서 품 안에서 배첩을 꺼내 내게 건넸다.
[연회는 용봉지연이 끝난 뒤에 이어 열릴 예정입니다. 하하하. 풍류를 논하며 술잔을 기울이는데 여인이 빠질 수는 없는 법이니, 이 소협께서도 청담회에 참여하시려면 반드시 절색의 미녀과 동반해서 오셔야 합니다. 뭐, 이 소협이라면 그리 어려운 조건은 아닐 거라 믿습니다. 하하하하하!]
모용위의 전음이 귓가에 울렸다.
미녀라.
저런 수상한 파티에 우리 소중한 사매 서하린이나 서문청하를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소검후를 데려가는 것도 조금 그렇고.
당영령은 내가 싫다. 내가 가자고 한다고 갈지도 의문이고.
‘······역시 사형뿐인가.’
소거법으로 봤을 때, 내 파티 파트너로 가장 적합한 건 사형이다. 일단 남자지만, 일검유희 모습으로 변장하면 다들 여자라고 생각할 게 분명했다. 안 그래도 여자보다 더 예쁜 사내가 사형이니까.
거기에 화경의 경지에 이른 무위라면 파티장에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던 전부 물리적으로 참교육을 시켜줄 수 있다.
설득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사형은 바보처럼 날 전적으로 믿으니까.
뭐 미래에는 사형의 앞길을 가로막는 놈들이니, 지금 뿌리를 뽑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추후에 뵙도록 하죠.”
인사를 건넨 모용위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내게 남은 건 배첩뿐이었다.
나는 배첩을 품속에 넣었다.
그때.
“······사형, 방금 저자와 이 서찰은······.”
옆에서 서하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긴, 대화 대부분이 전음으로 구성되었으니 서하린의 눈에는 내가 남자 놈과 눈싸움을 하는 것처럼 보였겠지.
거기에 수상한 편지까지.
오해하기 좋은 상황이다.
물론 나는 프로답게 서하린의 질문에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모용세가에서 연회 초대를 받았다. 본 파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참여해야 할 것 같구나.”
“그렇군요······. 누구와 갈 예정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서하린이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아까 붕대를 풀어서 그런 건지, 벌모세수를 행해서 그런 건지 유난히 커다랗게 흔들리는 천하제일가슴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괜히 남사스럽네.
나는 시선을 피하면서 말했다.
“······사형과 함께 갈 생각이다. 사형께서 지금은 본 파의 장문 대리를 맡고 있으니 말이다.”
내 말을 들은 서하린의 어깨가 살짝 처졌다.
찰싹.
그녀가 내 곁에 더 달라붙으면서 무표정한 얼굴과 죽은 눈동자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녀의 뭉클한 가슴이 내 팔뚝에 뭉개졌다.
아니, 절간에서 이러고 다녀도 되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생각하는 걸 그만뒀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일단 빨리 만년화리의 내단부터 취해야······.’
품속에 품은 절세영약, 아니 절세의 정력제를 빨리 취해야 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쪽 팔에 서하린을 매달고 경내를 걸었다.
*
이철수의 팔에 매달린 서하린의 텅 빈 눈동자가 그의 얼굴을 향했다.
‘하아······.’
서하린이 속으로 뜨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아까의 추궁과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철수.
경애하는 사형의 손길이 그녀의 온몸 구석구석을 지압하며 만지는 감촉은······. 솔직히 말해서 황홀했다. 빈말이 아니었다.
사형의 추궁과혈을 통해 느껴지는 고통과 쾌감이 섞인 미묘한 열락의 흔적이 아직 그녀의 신체에 생생히 남겨져 있었다.
그녀의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서하린은 이철수의 팔뚝에 의식적으로 풍만한 가슴을 가져다 댔다.
물컹.
이철수의 팔뚝에 그녀의 모양 좋은 가슴이 뭉개졌다.
단둘이 있는 몇 안 되는 기회다. 서하린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사내치고 커다란 가슴을 좋아하지 않는 사내는 없다고 했어. 사형도 마찬가지일 테니······.’
서하린의 텅 빈 눈동자에 어두운 빛이 반짝였다.
‘놓치지 않아. 절대.’
천하를 모두 통틀어도 이철수 만한 사내는 없다.
첫만남부터 그랬다. 무림인의 분쟁으로 어머니가 죽었을 때부터 서하린은 타인을 믿지 않았다. 타인의 선의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몸을 이철수에게 계약 조건으로 내밀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몸 따위는 아버지의 안위보다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철수는 거절했다. 그가 비무에 나선 건 사문의 재건을 위해서지, 네 몸을 노려서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네 몸을 소중히 하라고,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 싶으면 공동파에 들어오라 말했다.
사형의 말을 처음부터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형은 본인의 말을 행동으로 증명했다. 정말로 대가를 받지 않고 정사지쟁에서 승리하여 그녀와 아버지를 구했고, 오직 사문의 재건을 위해서만 헌신했다.
그러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불신과 배신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타인은 오직 사형 이철수뿐이었으니까.
‘제 운명은 저 스스로 결정하라고 하셨었나요? 제 운명은 바로 사형입니다.’
서하린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부드러운 가슴을 사형이 온전히 느낄 수 있게, 사형의 팔뚝을 풍만한 가슴골 사이로 넣어버렸다.
움찔.
사형의 몸이 떨리는 감촉이 가슴을 통해 서하린의 몸으로 전해졌다.
사형, 이철수를 향한 그녀의 집착은 점점 커져만 가고 있었다.
*
‘빌어먹을 년들······.’
소림사 경내로 다시 들어온 적사월은 씩씩거리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소림사 일주문 앞에서 있었던 검후, 소검후와의 신경전이 떠나가지 않고 있었다.
62년 일생에서 그렇게 비참하게 패배해본 건 처음이었다.
적사월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흥, 마음대로 착각하라지. 결국 그 나쁜 놈의 마음을 차지하는 건 너희 어린 년들이 아닌 이 본녀가 될 터이니.’
적사월이 손을 떨었다.
사실 전서구를 통해 신승에게 연락받고 소림사로 향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적사월의 마음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천하제일미인 그녀였다. 이철수가 제아무리 부동심이 강하더라도 그녀의 미모에는 당할 재간이 없을 것이다.
그리 생각했다.
‘그때 넘어가 줬다면······. 본녀가 소림에 다시 올 일은 없었을 것을······.’
하지만 그녀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이철수의 부동심은 신승을 뛰어넘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적사월은 물러설 수 없었다.
원래 그녀의 역할은 천지회의 지령주로서 이철수를 시험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시험이 끝난 지금, 그녀가 소림사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정사 간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달마동에서 천하제일미의 자존심에 상처 입은 적사월은 도저히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그래서 능월향으로 변장하고 다시 소림으로 잠입했다.
‘자, 나오거라. 흥. 이번에야말로 가가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니라.’
적사월은 반드시 이철수의 마음을 취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면서 소림사 경내를 걸으며 기감을 넓혔다.
현경의 경지에 이른 절대고수의 기감이 소림사 경내 전체를 뒤덮었다.
기감을 통해서 소림에 모인 소림승의 기척, 정파 후기지수의 기척이 낱낱이 느껴졌다.
적사월은 빠르게 기감의 범위를 좁혀 이철수의 기척을 탐지했다.
매일 능월향으로서 곤화루에서 이철수와 만남을 가질 때마다, 그의 기척을 기감으로 감지해왔던 적사월이다. 이철수의 기척을 찾는 건 적사월에게 소채일접(小菜一碟)이었다.
‘여기 있었구나.’
이철수의 기척을 찾은 적사월의 적안이 붉게 반짝인다. 그녀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사뿐.
적사월이 가볍게 바닥을 박차서 미끄러지듯 보신경을 운용해 이철수의 기척이 느껴지는 장소로 이동한다.
그렇게 이철수 앞에 도착한 적사월이 본 광경은······.
백금발의 거유 미소녀, 서하린의 풍만한 가슴 사이로 팔뚝을 끼운 채로 경내를 걷고 있는 이철수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