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비장의 절초
영단 분배가 전부 끝나고, 이제 자리를 파하려던 그때.
“이 사형.”
서하린의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흐흐흐 웃던 이철수의 고개가 서하린을 향했다.
그와 함께 모두의 시선이 서하린에게 향했다.
두근.
이철수와 눈이 마주친 서하린의 얼어붙어 있던 심장이 살짝 뛰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이철수가 아까 했던 말이 맴돌았다.
대환단 복용을 위해서는 진기도인이 필요하니, 복용할 때는 본인을 부르라는 말이었다.
‘이런 귀물을 주시다니······.’
공동파의 제자가 된 지도 일 년이 넘었다. 그녀도 이제 강호 무림의 사정에 대해서는 알 만큼 알았다.
대환단은 강호 무림에서 무가지보(無價之寶)와도 같았다. 강호 무림에서는 대환단과 같은 영약을 두고 칼부림도 심심찮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서하린은 알았다. 우애 좋던 사형제조차 영약을 두고 서로 뒤에 칼을 꽂는 곳이 무정강호였다.
그런데 그런 귀한 영약을 이철수는 선뜻 그녀에게 양보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남은 대환단 한 알도 사부님에게 건네준다며 따로 챙겼다.
‘사형뿐이야.’
서하린은 이제 이철수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았다. 과거와는 달리 이제 그녀는 이철수를 믿었다.
이 세상에서 가족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상대는 오직 이철수뿐이었다.
그 말고 다른 사람은 필요 없다.
그녀에게는 이철수가 필요했다. 그러니, 지금이 기회였다.
두근.
그를 마주할 때마다 뛰는 심장을 끌어안고 서하린이 말했다.
“······지금 대환단을 복용하려고 합니다. 진기도인과······. 복용 이후 추궁과혈을 부탁드립니다.”
그녀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서하린에게 집중됐다.
영약 복용에 꼭 추궁과혈이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약효를 골고루 신체에 흡수시키기 위해 추궁과혈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남녀 사이에 추궁과혈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추궁과혈을 하려면 신체 구석구석을 지압해야 한다. 자연히 남녀가 서로 접촉할 수밖에 없다. 남녀유별이 당연한 중원에서는 남사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서하린이 먼저 추궁과혈을 꺼낸 것이다.
‘무리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최근 서하린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와 동맹들은 여전히 이철수와의 관계에서 큰 진전이 없었지만, 검후를 포함한 선배들은 진도를 빠르게 나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기회를 잡았을 때 빠르게 나가야 했다.
‘다행히 내 몸이 조금은 자랐으니까.’
이제 소녀에서 여인으로 조금씩 변하고 있는 서하린이었다. 능월향, 검후 선배처럼 성숙한 미녀가 된 건 아니지만, 또래만이 갖출 수 있는 풋풋하고 매력적인 자태와 미모를 갖춘 미소녀라 생각했다.
거기에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숨기고 있는, 사형의 마음을 사로잡을 비장의 절초도 있었다.
그러니 추궁과혈을 받는다면, 사형의 마음을 흔들 수 있으리라.
갑작스러운 서하린의 폭주에 정적이 가라앉았다.
“사매. 남녀가 엄연히 유별한데 추궁과혈은······.”
정적을 깬 건 유진휘였다.
그녀의 시야에 사매의 모습이 보였다.
유진휘의 뺨이 떨렸다.
‘추궁과혈이라니······! 나는······. 사내로 살아야 하는 나는, 평생 받을 수 없는데······.’
유진휘의 마음속에 질투심이 독버섯처럼 조금씩 자라났다.
사내로 살기로 결심했다. 그러니 추궁과혈을 해주는 건 상관없지만, 사제에게 받는 건 불가능했다.
아무리 사제가 눈치가 둔하다지만, 추궁과혈로 그녀의 신체를 만지고 나서도 그녀가 사내가 아닌 여인이라는 사실을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은 천하제일이, 무림의 하늘이 되지 못했다.
그러니 아직은 숨겨야 했다.
그러니 추궁과혈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부러웠다. 여인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매가 부러워서.
목구멍까지 여인이라고 고백하고 싶은 말이 올라와서.
견디기 어려웠다.
유진휘의 시선이 사매를 향했다.
“······유 사형도 사내지 않습니까? 서문 소저와 당 선배는 여인이긴 하지만 외인이니 함부로 추궁과혈을 맡길 수 없습니다. 이 사형께서 영약 복용을 도와주신다 약조하셨으니, 이 사형께 추궁과혈을 받겠습니다.”
서하린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기다림 끝에 잡은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이대로 놓칠 수는 없다.
동맹이라지만, 영원한 동맹이 아닌 일시적인 동맹일 뿐.
기회가 오면 행동해야 했다.
서하린의 무기질적인 푸른 눈동자가 유진휘를 향했다.
‘유 사형이 아직 왜 이 사형한테 집착하는지는 모르지만······.’
사내인 유진휘가 왜 이철수에게 사형제의 우애 이상으로 집착하는 것인지, 서하린은 아직 그 난제를 풀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서하린이 내뱉은 말에는 틀린 점이 없었다.
영약 복용 보조는 외인에게 맡길 수 없다. 진기도인과 추궁과혈 동안 타인에게 신체를 온전히 맡겨야하는 만큼, 신뢰할 수 있는 동문(同門)의 사형제나 사부에게만 맡기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러니 같은 여인이더라도 외인인 당영령과 서문청하는 탈락.
남은 건 두 사형뿐이고, 서하린은 거기서 이철수를 골랐을 뿐이었다.
거기다 이철수가 먼저 서하린을 도와주겠다 자청한 상황에서 사형인 그녀가 이제 와서 끼어드는 건 이철수의 체면은 물론, 그녀의 체면과 권위까지 깎아내리는 일이다.
서하린의 말에 논리적 허점이 없다는 사실은 유진휘도 알았다.
‘물러날 수밖에 없어······.’
유진휘의 어깨가 처졌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다. 그럼 신중히 복용하도록 해라.”
유진휘가 굳은 표정으로 물러섰다. 판정승을 거둔 서하린이 어색하게 웃었다.
스윽.
그녀가 행운유수의 보신경을 운용해 이철수의 옆에 붙었다.
“같이 가요. 사형.”
“그래.”
이철수와 서하린이 자리를 떠난 뒤.
남겨진 유진휘가 입술을 깨물면서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이제는 이 년이나 지났지만, 완전 기억 능력을 보유한 유진휘의 머릿속에서는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그날. 혼원비동을 빠져나올 때. 사제를 지키지 못했다고 울고 있는 그녀에게 사제는 손수건을 건네주며 눈물을 닦으라 했다.
그리고 말했다.
너무 혼자만 짊어질 필요도 없다고. 울 필요도 없다고.
망각이 없는 유진휘에게는 사제와 지냈던 모든 순간이 바로 지금 이 순간처럼 생생하게 느껴느껴졌다.
‘그랬었지.’
사제는 언제나 그랬다. 내색하지 않고, 사문을 위해서 희생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사제가 노력해서 신승에게 받은 영단이다.
하지만 사제는 자기 몫은 챙기지 않았다. 강호 무림에 몸담은 자라면 누구나 원한다는 절세영단 대환단을 두 알이나 얻었는데도 모두 사문을 위해 타인에게 양보했다.
그래서 그녀만큼은 사제를 위하기로 했다.
그랬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이상을 원했다. 사제의 품에 여인으로 안기고 싶었다.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싶었다. 천하가 너를 저버리더라도, 나만큼은 네 편이라 말해주고 싶었다.
그럴 수 없더라도, 그러고 싶었다.
‘이게 무슨 꼴이야.’
유진휘는 감정을 애써 가라앉혔다. 공동파의 장문제자로서, 장문 대리로서 질투 같은 사적인 감정은 내려놓아야 했다.
사문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사제의 짐을 덜기 위해서라도, 그래야만 했다.
유진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눈을 감고 숨을 고르며, 이철수와 서하린의 모습을 애써 지워냈다.
“유 형. 괜찮아?”
덥석.
그런 유진휘의 손을 당영령이 다가가 잡았다.
그녀의 눈빛에 걱정이 깃들었다.
어린아이 같은 외모와 말투와는 달리 당영령은 올해로 지천명에 이르는 사천당문의 큰어른.
유진휘의 심정이 어떤지 모를 리 없었다.
유진휘가 손을 살짝 빼내면서 말했다.
“괜찮습니다. 당 선배.”
유진휘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당영령이 볼을 부풀렸다.
‘호구가 따로 없다니까.’
그녀도 유진휘의 사정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유진휘의 애끓는 마음을 몰라주는 이철수가 괜히 얄미워진 당영령이었다.
눈치가 없어도 적당히 없어야 한다.
당영령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철수가 그녀에게 안긴 당과를 꺼내면서 말했다.
“흥. 괜찮다면 다행이야. 유 형도 당과 먹을래?”
“감사합니다.”
유진휘는 당영령에게 당과를 받아들었다.
‘첫 강호행 때도 사제가 당과를 사줬었지.’
당과를 보니 또 사제와의 추억이 유진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서문세가에 정사지쟁 공증인 협조 요청을 위해 사제와 단둘이서 떠났던 첫 강호행.
그때, 사제는 당과가 먹고 싶다는 그녀의 말을 선뜻 들어줬었다.
사제가 처음으로 사줬던 당과는 달콤했다. 그 맛을 유진휘는 잊지 않고 있었다.
유진휘가 당과를 입 안에 넣었다.
“······맛있어?”
당영령의 질문에 유진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와는 장소도, 시간도, 당과도 다르지만.
여전히 당과는 달콤했다. 사제가 산 당과기 때문이다.
유진휘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그런 유진휘를 보던 당영령이 살짝 웃었다.
‘바보들······. 흥.’
유진휘와 당영령을 보던 서문청하가 시선을 돌리며 애꿎은 돌부리를 툭툭 찼다.
그녀의 품 안에는 여전히 소환단이 있었다.
‘이걸······. 대체 왜 준 걸까요.’
같은 백도지만, 서문세가와 공동파는 지역 패권을 놓고 경쟁하는 경쟁자다.
지금의 감숙 패권은 서문세가에 있지만, 미래는 알 수 없었다. 굳건하게만 보였던 감숙제일문파 서문세가의 자리가 천무지체 유진휘의 등장으로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가 온다면······.
서문청하는 당연히 서문세가의 편에 서야 했다. 지금이야 웃기지도 않는 비무의 결과로 공동파에 붙어 있지만······. 그래서 용봉지회에 참석했는데도 서문세가 숙소가 아닌 공동파 숙소에 왔지만······.
‘······.’
하지만 왜일까.
본가인 서문세가와 동경하던 공동파.
지금의 서문청하는 둘 중 어느 쪽도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이철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소환단 같은 귀중한 영약을 동문도 아닌 외인인 그녀에게 주다니, 이건 협객을 넘어 숫제 무골호인(無骨好人)이 아닌가?
‘채, 책임이라니······. 거, 건방지게······. 감히 서문세가의 금지옥엽을 두고 책임을 거론하다니······!! 백 년, 아니 천 년은 이르다고요!’
서문청하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무 이득 없이 영약을 나눠주고, 시비인 그녀를 마지막까지 책임지겠다는 이철수의 행동은 그녀가 동경했던 협객의 모습과 조금 닮아 있었다.
쌍발색검이 오명이라는 사실을 아는 서문청하였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으으으으······. 그런 식으로 나오면 저는······.”
어쩌면 좋냐고요.
서문청하는 뒷말을 삼키면서 괜히 애꿎은 돌부리를 걷어찼다.
이철수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괜히 원망스러웠다. 책임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두근대는 심장도 야속했다.
게다가 단둘이 나간 서하린과 이철수 쪽도 신경 쓰였다.
‘남녀 사이에 추궁과혈이라니······.’
남사스럽다. 그 단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떻게 무표정한 얼굴로 추궁과혈을 입에 담을 수 있는 건지.
하지만 동시에, 조금 부럽기도 했다.
부럽다니? 그런 정숙하지 못한 행위를 부럽다고 생각하는 건 말도 안 된다.
서문청하가 고개를 도리도리 세차게 저었다.
마음이 뒤죽박죽 혼란스럽다.
서문청하는 자리에 주저앉아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애써 이철수의 모습을 지워내면서 고개를 돌렸다.
안 되겠다. 여기에 더 있다가는 안 된다.
“흥. 공동파에는 바보밖에 없군요! 잠깐 소림사 경내 산책이라도 해야겠어요!”
서문청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는, 괜히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으면서 객당 별채를 떠났다.
그런 그녀의 품에는 이철수가 선물해준 소환단이 소중히 안겨 있었다.
같은 시각.
“흐윽!”
이철수는 어두컴컴한 연공실에서 서하린의 신음을 들으며 추궁과혈을 이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