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영원토록 그대를
이철수의 말을 들은 주가율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두근, 두근. 두근.
아니 심장은 원래부터 뛰고 있었다. 노야를 만난 순간부터. 아니 대웅보전에서 노야를 기다릴 때부터. 아니 소림사 일주문에 도착했을 때부터. 아니 소림사로 떠나기 전날 자금성에서 보냈던 마지막 밤부터.
아니, 노야를 만나기 위해 소림사에 불공을 드리러 오는 그날부터.
주가율은 오늘만을 기다렸다.
그분의 모습과 목소리 말투를 전부 상상하면서 매일 밤을 설렘으로 지세웠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그분을 만났다. 환관이었던 전생과는 다른, 조금은 더 듬직해지고 선이 굵어져 사내다워진 그분의 모습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그래도 좋았다.
아직 운우지락을 나누지 않았다는 말도 좋았다.
‘첫 번째는 짐이 되어야 합니다.’
노야의 첫날밤은 그녀의 것이다. 주가율은 이철수가 회귀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부터 그렇게 결정했다. 그녀 말고 다른 누가 노야의 동정을 가져갈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
적사월? 은설란? 서문청하? 서하린? 천소빈? 위소련?
전부 불합격이다.
그녀의 옥체가, 숨결 한 조각까지 전부 노야의 소유물이듯 노야의 동정도 당연히 그녀의 소유물이었다.
그러니 적사월, 검후 은설란 같은 어린 년들이 노야의 동정을 가져가게 둘 수 없었다.
두근.
주가율의 심장이 뛰었다. 하고 싶은 말이 산처럼 많았다.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노야를 마주한 순간.
그녀는 얼어버렸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심장이 미친 듯이 뛸 뿐이었다.
올해로 정신연령 91세, 망백(望百)에 접어든 주가율이었으나 노야를 마주할 때만은 11살의 소녀 주가율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어렸을 때처럼 노야가 그분을 안아주고, 쓰다듬어줬던 추억과 지금의 현실이 겹친 순간 그녀의 냉철한 이성과 명석한 머리는 그대로 기능을 잃었다.
그토록 바라던, 상상만 했던 노야의 감촉이, 체취가, 목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지금도 그랬다.
왜 환생 대법을 행했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준비했다.
좋아해서, 사랑해서. 노야를 연모한다고. 여인으로서 전부를 바치겠다고. 당신이 죽고 상복 차림으로 무덤을 수십 년 넘게 더 지켰는데도.
노야가 오지 않아서, 노야를 따라가기 위해 실행했다고.
죽어서도 노야와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다음 생에서도 당신과 함께하고 싶다고.
삼생(三生)이 끝나도 계속 옆에 있고 싶다고.
그만큼 노야를 사랑한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 그건······.”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을 꺼내는 것조차 부끄러웠다.
어쩌면······. 두려움도 섞여 있을지도 몰랐다.
이제야 만났다.
하지만 똑똑한 주가율은 알았다. 노야는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그녀를 여인으로 보지 않고 있었다.
물론 그녀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는 건 아니었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서, 천하에서 그녀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준 사람은 오직 노야뿐이었다.
그래서 그가 좋았다. 그의 전부를 사랑했다. 가족으로서, 여동생으로서, 딸으로서, 제자로서, 공주로서, 황제로서.
그리고 여인으로서.
그에게 모든 종류의 사랑과 모든 형태의 애정을 쏟았다. 노야가 알아주지 않아도 좋았다. 옆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연모한다 말하면······.’
노야는 당황할 것이다. 노야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여인으로 봐준 적 없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그럴 리는 없지만, 희박한 확률이지만······.
노야가 그녀의 연심을 부담스럽다 여겨 서서히 멀리할지도 몰랐다.
‘미움받을지도 몰라.’
그런 두려움이 주가율의 머리를 지배했다. 주가율의 손이 떨렸다.
물론 안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노야가 그녀를 멀리할 일 리(厘)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이상 주가율은 연심을 고백할 수 없었다.
실낱같은 가능성도 현실이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상관없었다. 그녀에게 타인이란 아무 가치가 없는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노야는 달랐다. 그녀의 세계에서 노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살아 숨 쉬는 이유였다. 노야가 없는 세상은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주가율은 노야가 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주가율은 연심을 고백할 수 없었다.
‘······아직 신체가 미숙해······.’
그리고 주가율은 분했다.
신체연령 11세, 어린 소녀의 몸으로는 안 됐다. 노야에게 그녀를 가족이 아닌 여인으로 각인시킬 수 없었다.
더 자라야 했다.
노야 취향의 미녀로 성장해야 했다. 가슴도 조금은 전생의 본인보다는 더 키워야 했다. 노야의 여인 중에서 가장 연하라는 사실은 때로는 이렇게 독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연하라는 사실이 단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장점도 있었다.
‘짐에게는 시간이 있다.’
그녀는 가장 어렸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주가율에게는 시간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장 지체 높은 신분인 그녀였다. 적사월, 검후조차 능가하는 고귀한 신분에 권력까지 가진 그녀였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러니.
‘짐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그녀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노야가 환생 대법을 실행하여 죽고 없던,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던 수십 년 세월도 상복을 입고 노야를 그리며 견뎌낸 그녀였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기다림은, 지금의 인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꿀처럼 달았다.
그렇기에 주가율은 기꺼이,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기로 했다.
그녀가 자라서 미녀가 되고, 권력을 손에 넣어서, 마침내 노야를 손에 넣을 때까지.
주가율은 속으로 웃었다.
‘노야는 영원토록 짐의 것이야.’
그렇게 속으로 되뇌인 주가율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심장이 고장난 것처럼 계속 뛰었다. 그녀가 고개를 푸욱 숙였다.
주가율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제게 말씀드리기 어려운 일입니까?”
그녀가 한참 머뭇거리던 그때.
이철수의 대답이 그녀의 귓가에 꽂혔다. 주가율이 뭐라 말하려고 한 순간.
이철수의 손이 그녀의 머리에 얹혔다. 찌릿.
주가율의 온몸에 전율과 환희가 흘렀다. 그녀의 명석한 두뇌도 천재적인 정치감각도 노야의 손길 한 번에 전부 봄날 눈 녹듯 사라졌다.
새하얗게, 분홍색으로 온통 세상이 물들었다.
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렇다면 굳이 지금 당장 제게 말씀해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황상께서 준비가 되었을 때. 그때 듣겠습니다.”
이철수의 말을 들은 주가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가슴 속 심장이 더 세차게 뛰었다.
‘짐의 노야······. 노야께서는 변함없이 짐을 생각해주는군요. 언제나······. 짐의 사정을 우선해주는군요.’
전생에서도 그랬다.
보잘것없는 서출 공주. 아바마마에게도 어마마마에게도 버려진, 언젠가 정략혼으로 명문 사대부에게 팔려 갈 그녀였다.
환관과 궁녀들도 그녀를 외면했다. 그래서 마음을 닫았다. 주변인들에게 험하게 대했다. 몇 번이고 환관이 갈렸다.
하지만 노야는 달랐다. 그는 묵묵히 어린 그녀의 투정을 받아줬다. 때로는 아버지처럼, 때로는 어머니처럼, 때로는 오라비처럼, 때로는 스승처럼 그녀를 보살폈다.
그런 노야였다.
그런데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지금도 그랬다. 환생 대법을 실행한 이유를 알고 싶은 노야였지만, 그녀가 저어하는 기색을 읽고는 먼저 묻지 않겠다 선언했다.
현생에서도 노야는······. 그녀를 우선했다.
“······제가 준비되면······. 꼭 말해드리겠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훌륭한 미녀가 되어서. 태화전의 옥좌에 앉아서.
노야에게 말할 것이다.
천하에서 제일, 누구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노라고.
죽어서도 당신과 헤어지지 않겠노라고.
그렇게 말하리다.
주가율은 그렇게 다짐했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소인은 조금 걱정입니다. 황상께서 그렇게 위험한 대법을 실행하시다니······. 성공해서 망정이지 실패하였다가는······.”
“······미안합니다. 노야.”
이철수의 말에 주가율은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듣는 노야의 잔소리였다. 미안하면서도 반가운 모순된 감정이 들었다.
“그래도 성공해서 다행이고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 괜찮습니다. 황상께서는 소림사에는 언제까지 머무를 예정입니까?”
이렇게 다시 만나서 괜찮다.
그 말을 들은 주가율의 심장이 떨렸다.
그녀가 말했다.
“······용봉지회가 끝날 때까지 머무를 생각입니다. 용봉지회 본선을 참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소인도 이번 용봉지회에 참석하니, 황상께 승리를 바치기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무공을 수행해야겠습니다.”
씨익.
이철수가 웃자 주가율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누구보다 잘생긴, 그녀의 노야가 용봉지회에서 활약하는 모습이라니.
게다가.
‘지, 짐한테 승리를 바친다니······.’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를 위해서.
그 말을 들은 순간 주가율은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노야의 활약을 기대하겠습니다.”
노야가 용봉지회 우승을 못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황궁제일고수의 무명(武名)을 지녔던 노야였다. 전생에 화경의 경지에 이르렀던 그녀보다 더 강한 현경의 절대고수였던 이철수가 후기지수에게 패배하는 건 말도 안 됐다.
회귀 이후부터 무공을 수행하고 영약을 먹어 임독양맥을 타통한 그녀의 눈으로도 이철수의 경지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황상, 혹시······. 대법은 전생의 언제쯤 실행하셨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이철수의 질문에 주가율은 무심코 답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주가율이 대법을 실행한 건 이철수가 죽은 이후 수십 년이 지난 89세의 나이에 이르러서였다.
지금의 주가율은 이철수보다 정신연령으로 한참 연상인 것이다.
‘······노, 노야께서 짐을 늙었다고 여길지도 몰라······!’
적사월, 검후 같은 늙은이들은 물론 서문청하, 위소련, 서하린, 천소빈 같은 핏덩이들보다 더 어린 최연소이자 연하라는 사실이 그녀의 장점이었다.
그런데 대법 실행 시기를 밝힌다면?
91세라는 정신연령도 노야가 알게 될 것이고, 연하이자 최연소라는 그녀의 장점도 사라질 것이다.
‘그건 안 된다······!’
주가율도 한 명의 여인. 사랑하는 사내 앞에서 늙어 보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최연소이자 연하라는 장점을 제 손으로 없앨 생각도 없었다.
그렇기에 주가율은 고개를 숙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건······. 노야······. 조금 말하기······.”
“곤란하다면 되었습니다. 중요한 일도 아니니까요.”
노야의 답변에 주가율이 노야의 품에 와락 안겼다.
“······고맙습니다. 노야.”
노야는 이번에도 묻지 않았다.
그 마음이 너무 따뜻해서, 주가율은 눈물을 찔끔 흘렸다.
“별말씀을······.”
스윽.
또다시 머리를 쓰다듬는 노야의 손길을 느끼면서 주가율은 눈을 감았다.
그녀가 노야와 독대할 수 있는 시간은 이제 일각도 채 남지 않았다.
그렇기에······.
남은 시간은 온전히 그분의 체온을, 그분의 감촉을, 그분의 체취를 온몸으로 느끼고 기억하고 싶었다.
그렇게 주가율은 독대 시간이 끝날 때까지 이철수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
같은 시각.
소림사 일주문.
주가율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 어수선한 소림사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하늘하늘한 하얀 경장이 인상적인, 면사를 썼는데도 절세미녀의 분위기를 풍기는 미인.
능월향의 모습을 한 적사월이었다.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도 이 정도라니, 얼마나 절색일지 상상조차 안 가는군.”
“감숙제일기녀 능 소저가 소림에 올 줄이야!”
“염희 능 소저를 이런 곳에서 볼 줄은 몰랐군!”
“과연 천하절색이로다!”
적사월의 시야에 수군대는 사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욕망도 느껴졌다.
용봉지회에 참석하기 위해 고르고 골라 모인 정파의 후기지수들, 명문의 제자와 자제라는 것들조차 그녀의 미모 앞에서는 그저 한 명의 발정난 사내일 뿐이다.
천하제일미였던 적사월에게는 익숙하면서도 싫은 감정이었다.
사내들은 늘 저랬다. 그녀에게 온갖 미사여구로 점철된 밀어를 속삭이면서도, 그녀를 어떻게 해보려는 욕망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저열한 것들.’
면사 너머 적사월의 눈동자에 경멸이 깃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문득 그가 떠올랐다.
이철수.
천하제일미 적사월의 본모습을 보고도 흔들리지 않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두근.
적사월의 심장이 다시 뛰었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호흡이 가빠졌다.
그를 생각하기만 해도 설렜다. 그는 다른 사내들과 달리 그녀를 욕망의 시선으로 보지 않았다. 외모와는 상관없이 그녀를······.
‘아니야!’
적사월은 잡념을 밀어냈다. 아니다. 진심으로 그 정파의 애송이를 좋아하는 건 절대 아니다.
그저 그를 치마폭으로 감싸서, 그의 마음을 빼앗아 정파를 조롱하기 위해서였다.
그래. 그뿐이다.
적사월이 그리 다짐하면서 일주문을 향해 걷던 그때.
“······저기 좀 보게나! 검후 은 여협일세!”
“은 여협이 여기 왔다고?”
“항산파 제자들의 모습도 보이는군!”
“능 소저에 이어 은 여협까지 오늘 볼 줄이야······!”
그녀의 귓가에 사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후?
빌어먹을 어린 년의 이름을 들은 적사월이 면사를 찬 채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과연 그녀가 있었다.
햇빛을 받아 신비롭게 빛나는 은빛 말총머리가 인상적인, 하얀 무복을 입은 은색 눈동자의 미녀.
건방지게 그녀의 가가를 노리는 어린 년.
검후 은설란.
무표정한 그녀의 싸늘한 은빛 시선이 정확히 능월향의 모습을 한 적사월에게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