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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 환관이 남성을 되찾음-119화 (119/171)

119화 나의 도(道)

나는 적사월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무슨 우환이라도 있으십니까?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염왕 선배가 조금 염려됩니다.”

내 말을 들은 적사월의 표정이 묘해졌다. 굳어진 얼굴은 그대로지만 뺨에서는 홍조가 올라오고 있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묘한 표정을 짓는 적사월.

그녀가 탐스러운 붉은 입술을 우물거렸다.

머뭇거리던 적사월이 뭐라 말하려던 그때.

“일각. 끝났소. 적 시주.”

신승의 목소리가 달마동을 울렸다.

“흥.”

적사월이 콧소리를 냈다.

드디어 끝났나.

솔직히 조금 지루했다. 스윽. 적사월이 허공섭물로 땅에 떨어진 면사를 들어올려 얼굴을 다시 가렸다.

“시험 결과는 어떻소?”

“······토, 통과이니라······.”

적사월이 살짝 말을 더듬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아니 면사를 썼는데 왜 시선을 피해?

“아미타불. 공석인 인령주를 제외한 천령주와 지령주가 모두 소협의 자격을 인정하였으니, 지금부터 이 소협도 천지회의 일원이네.”

천령주 지령주 할 때부터 알아봤는데, 역시 천지인(天地人)의 삼재(三才)에서 직위를 따온 모양.

정파인 신승이 천령주, 사파인 적사월이 지령주인 걸 보면 인령주는 아마 마교 담당이겠지.

‘인령주가 공석이라는 건, 천지회 회원이 마교에는 없다는 건가?’

하긴 마교는 원래부터 배교자를 엄벌했다.

특히 당대 천마 백무량은 배교자를 마교 평균보다 훨씬 더 경멸해서 자연스럽게 그의 통치 아래에서 마교를 배교하는 건 미친짓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마교는 내부 분쟁은 강자존의 율법에 따라 권장하지만, 외부와의 교류는 꺼리는 배타적인 성격을 지닌 조직.

그러니 인령주가 공석일 수밖에.

“이걸 받게나.”

신승이 소매에서 목패 하나를 꺼내 허공섭물로 건네줬다.

천(天)자가 새겨진 목패를 손으로 잡았다.

“본 회의 회원이라는 증표일세.”

“······감사합니다.”

언젠가는 쓸모가 있겠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목패를 품 안에 넣었다.

“수고했네. 시험은 전부 끝났네. 이제그만 나가봐도 좋네. 자네 사형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허허.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나는 신승과 적사월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적사월이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면사가 팔랑거렸다.

면사 때문에 표정을 알 수가 없네.

뭐 좋다.

대환단도 얻었고 초절정의 경지에도 올랐으니.

거기에 혈마와 대적하려면 어차피 천지회를 이용해야 한다.

여기서 볼 일이 끝났으니, 이제 앞으로의 일을 생각할 때였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달마동의 통로를 걷던 순간.

[이 소협.]

머릿속에 신승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공으로 목소리를 전달하는 전음입밀의 수법이 아닌, 의념을 통해 마음에서 마음으로 직접 뜻을 전달하는 불문(佛門)의 최상승 기예인 혜광심어(慧光心語)였다.

혜광심어를 통해 신승이 말한 건 놀랍게도.

[아까 무시무종에서 빈승과 겨룰 때 그대가 말했던 섹스가 무엇이오?]

섹스(Sex)의 의미였다.

섹스란 무엇인가?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섹스는 성관계가 아니냐고.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추구하는 진정한 섹스는 생식기의 결합이 아니라 마음의 결합. 그걸 단순히 성관계라고 정의할 수는 없었다.

거기에 엄밀히 말해서 섹스는 단순히 성관계라고만 정의할 수 없었다. 성관계로 가기 전의 전희, 아니 그 이전 상대와 마음을 확인하고 그녀를 침대 위로 인도하며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과정.

아니 그 이전, 섹스를 위해 상대와 만남을 가진 순간부터.

아니, 만나기 이전 아침에 일어나 섹스를 위해 목욕재계를 끝내고 머리에 동백기름을 바르는 순간부터.

섹스는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내게 섹스는 인생과도 같았다.

마치 선종 불교의 선문답과도 같은, 섹스의 본질을 묻는 이 오묘하고 심오한 질문은 마치 잔잔한 호수 위에 던져진 돌처럼 내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신승에게 전음을 보냈다.

[섹스란······. 제가 평생에 걸쳐 추구하고 수행하는 도(道)입니다.]

그렇다.

내게 섹스는 곧 도(道)이다. 섹스의 도인 색도(色道)야말로 내가 평생 추구하고 탐구하며 수행해야 할 길이다.

섹스는 무(武)와도 같다. 무학의 길이 끝이 없는 것처럼, 섹스의 길도 무궁(無窮)하니 평생을 살아도 섹스의 끝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섹스를 추구할 것이다.‘

생사경의 경지에 오르고, 혈마를 처단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전부 색도를 이루기 위한 일.

그것이야말로 색도의 일대종사인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니까.

[아미타불, 그렇구려. 수행의 동지로서, 비록 추구하는 도(道)는 다르지만, 이 소협께서 섹스의 도를 이룰 수 있기를 내 기원하겠소이다.]

[감사합니다.]

나는 신승의 말에 감사 인사를 남기면서 달마동을 나갔다.

*

이철수의 기척이 달마동 밖으로 완전히 사라진 걸 감지한 적사월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적사월을 보던 신승이 불호를 읊었다.

“아미타불. 적 시주. 조금 진정하는 건 어떻소? 적 시주가 그렇게 동요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구려.”

적사월의 면사는 천잠사를 엮어 특수 제작된 면사이기 때문에 고수라도 면사를 꿰뚫고 그녀의 얼굴을 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신승은 달랐다.

우주 삼라만상의 본질을 투시하는 신통력인 천안통(天眼通)을 지닌 신승에게 면사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신승의 시야에는 얼굴을 붉히면서 씨익씨익대는 적사월의 표정이 훤히 보였다.

“닥쳐.”

그리고 적사월도 신승이 천안통으로 본인의 표정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래서 신승과의 만남은 껄끄러웠다.

“허허허허······. 이 소협 때문에 그러는 것이오?”

신승의 입에 짖궂은 미소가 걸렸다.

그가 염주를 쥐었다.

천안통뿐만이 아니었다. 상단전이 열려 육신통(六神通)의 일부를 얻은 신승이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타심통(他心通)의 공능을 통해 주변인의 감정을 어느 정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물론 같은 경지인 적사월의 감정은 파악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지금처럼 마음의 동요가 일어났을 때는 다르다.

‘사파제일인인 적 시주의 부동심(不動心)을 깨뜨릴 정도라니. 이 소협과 적 시주 사이에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물론 신승은 육신통을 통해 깨달은 타인의 신상에 대해 당사자를 제외한 타자에게 함부로 말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신승은 오랜만에 흥미를 느꼈다.

적사월.

그녀가 누구인가? 40년을 넘게 천하제일미로 군림하며 사내의 추악한 욕망을 전부 깨달은 현경의 고수이다.

사내를 돌처럼 보는 적사월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이철수라는 소년 앞에서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다니. 그것도 그냥 동요가 아니었다.

‘연심이라니.’

그 적사월이 누군가에게 연모의 정을 품다니.

그 연모의 정을 품은 상대가 정파의 소년이라니.

그야말로 천지개벽보다 더 어려운 일이 지금 발생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신승이 고승이라지만 그도 인간이었다. 호기심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었다.

“아니다.”

적사월은 부정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신승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신승에게 얼굴을 보여주기 싫었다.

“혹시 시험을 통과한 사내를 처음 봐서 흥미가 가는 것이오?”

“그것도 아니다. 흥.”

적사월이 부정했다.

시험을 통과한 사내가 처음이라는 말은 거짓은 아니었다.

같은 경지였던 신승도 그녀의 맨 얼굴을 처음 보고는 살짝 동요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소림의 고승마저 홀릴 정도로 초월적인 미모를 지닌 그녀였다.

그런데.

‘나쁜 새끼.’

그 나쁜 놈은 고금제일을 다투는 그녀의 미모를 보고도 동요조차 하지 않았다.

하물을 세우지도 않았다.

‘뭐? 따, 따분해?!’

거기에 따분하다고까지 했다. 굴욕이었다.

맨 얼굴만 보여준다면, 그렇다면 이철수를 홀릴 자신이 있던 그녀였다. 고금제일인 그녀의 얼굴을 보고 동요하지 않는 사내는 지금까지 없었다.

고자나 남색가가 아니고서야 말이다.

점잖은 척하던 도사도 수행을 오래 닦은 고승도 그녀의 진짜 얼굴을 보고는 동요하고 반했다.

그녀의 미모는 권능이자 저주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저주가 이철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분했다.

억울했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어째서.

대체 왜······.

‘예쁘다고 칭찬해놓고······. 나쁜 새끼······.’

적사월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철수는 분명 그녀가 천하에서 제일 아름답다 말해주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62세가 되는 지금까지.

셀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칭찬을 들은 적사월이었다. 하지만 이철수가 아름답다고 말한 순간.

그녀의 심장은 제어가 불가능할 정도로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아름답다.

천하에서 제일 예쁘다.

이철수가 말한 말이 그녀의 귓가와 머릿속에 아직 맴돌았다. 심장도 아직 뛰고 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얻었다 생각했는데.

그랬었는데······.

“누가 저런 천하에서 제일 나쁜 사내, 그것도 정파의 위선자 따위한테 흥미를 가진다는 것이냐? 이런 음침한 동굴에 처박혀 벽곡단만 먹으며 면벽만 하니 느는 건 망상뿐인 모양이구나. 땡중.”

적사월이 악담을 내뱉었다.

그래.

이철수에게 흥미 따위는 없다. 있어서는 안 된다.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천하제일미이자 사파제일인이며 하오문의 태상문주이자 사도련주인 그녀다.

누군가를 결코 진심으로 좋아할 수도, 좋아해서도 안 됐다.

그 상대가 그녀보다 40년도 더 넘은 연하의 정파 소년이라면 더더욱 안 됐다.

하지만.

그를 만나기만 하면 뛰는 심장은, 마음은 그녀의 제어를 이미 벗어나 있었다.

붉어진 얼굴을 들킬까 두렵다. 두근대는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릴까 두려웠다.

그를 만나기만 하면 이유를 알 수 없이 설레는 마음이 원망스러웠다.

지금도.

계속해서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음속에서 이철수의 모습이 계속 야속하게 떠올랐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미타불. 허허허허. 적 시주. 스스로한테 솔직해지는 쪽이 좋겠습니다. 그래야 일이 순리대로 풀릴 것입니다.”

신승은 허허롭게 웃었다.

그 철의 미녀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경국지색의 사파제일인이.

누군가를 연모한다니.

102년의 세월을 살아오며 속세의 명리에서는 초탈한 신승이었다.

거기에 지금까지 인간의 마음을 모르던 적사월이 62년 평생 처음으로 타인의 감정을 알아가는 순간이었다.

정파와 사파를 초월해서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시끄럽다. 뭐든 다 안다는 듯이 말하지 마라. 흥. 볼일은 다 끝났으니 본녀는 이제 이 음침한 동굴에서 나갈 것이다.”

“아미타불. 뜻대로 하시구려.”

신승의 말을 들은 적사월이 빠르게 달마동을 빠져나왔다.

경공을 펼쳐 달마동 주변을 빠져나온 적사월은 숭산 기슭에 도착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나쁜 새끼······. 건방진 새끼······.”

그녀의 심장이 뛰었다. 애써 참았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야속했다.

내심 그가 넘어오길 기대했던 적사월이었다. 사실 그가 그녀의 미모에 반했더라도, 시험에 통과했다고 해줄 의향도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런데도 적사월은······.

다른 사내처럼 그를 대할 수 없었다. 다른 사내처럼 그를 미워할 수 없었다. 다른 사내처럼 그를 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미모에 처음으로 동요하지 않은 사내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녀를 외모로만 보지 않는 사내야말로 적사월이 그리던 이상의 사내였다.

하지만 이철수는 이상의 사내라기에는 너무 무례하고 불손했다.

그래서 잊고 싶었다. 부정하고 싶었다. 이철수가 그녀가 지닌 고금제일의 미모에 흔들리지 않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그녀가 기다리던 이상의 사내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계속······. 그의 모습이 그녀의 마음에서 끊임없이 불어났다.

마치 저주처럼.

“······사내 주제에 감히 본녀를 울리다니······.”

적사월이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천하의 적사월이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

그녀는 품속에서 능월향의 인피면구를 꺼내 착용하고 백면천화공을 운용해 완벽한 능월향의 모습으로 변했다.

“본녀는······. 가가를 절대 포기할 생각이 없느니라.”

능월향의 모습으로 돌아온 적사월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소림사 일주문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숭산.

소림사 일주문.

소림사 입구 앞에는 여전히 수많은 무림인으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비고 있었다.

용봉지회 때문이었다.

그렇게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던 소림사 앞에 내력을 실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주 전하 납시오!”

그와 함께 동창 무복을 입은 호위무사들 사이로 누군가 나타났다.

양옆에 선 궁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사뿐사뿐 발걸음을 내딛는, 화려한 붉은 궁장을 입은 갈색머리 미소녀.

태평공주 주가율.

그녀가 마침내 이철수와의 만남을 위해 소림사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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