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그녀의 시험
적사월.
이번 생에서 그녀의 본캐를 육안으로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전생에서는 업무 때문에 몇 번 대면한 적이 있었다. 그녀의 맨얼굴도 본 적이 있었다. 고자라서 그냥 예쁘다 말고 별 생각은 안 들었지만.
생각해보면 천하제일미라는 미모 때문에 남자에게는 욕망을, 여자에게는 질투를 산 전적이 워낙 많은 탓에 평소에 면사로 맨얼굴을 가리고 다니기로 유명한 적사월이었다.
전생의 나에게 맨얼굴을 보여준 건, 내가 남자도 여자도 아닌 고자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도 그렇고 다시 생각해도 괘씸하기 짝이 없다.
절세의 미모는 면사로 가렸지만, 붉은 경장 사이로 드러나는 풍만한 가슴과 완벽한 몸매가 자아내는 자연스러운 색기는 숨을 막히게 했다.
‘사파제일인인 적사월이 정파의 성지인 달마동에 있는 것도 천지회 때문이겠지······.’
천지회.
신비세력이기는 했지만, 전생의 중원 무림에서는 별다른 존재감이 없던 조직이다. 최소한의 동태는 감시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수상한 동태를 보이거나 역심을 품은 흔적도 없었기에 동창에서도 천지회는 항상 후순위였다.
게다가 천지회는 점조직 형태로 운영되는 비밀결사였기에 감시에는 비용이 많이 들어가서 가성비가 별로 좋지 않았다. 물론 동창의 첩보망이 천지회에 침투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적사월도 전생에서 동창이 추측한 것처럼 천지회의 구성원이었던 모양이다.
“아미타불. 적 시주는 여전히 성격이 급하구려.”
“본녀가 성격이 급한 것이 아니라, 땡중 네놈이 너무 느긋한 것이다.”
적사월이 미끄러지듯 자연스러우면서 빠른 발걸음으로 사뿐히 나와 신승 사이에 앉는다. 적사월이 등장하자 자그마한 다탁 하나를 두고 셋이 원탁처럼 둘러앉은 모양새가 되었다.
사파제일인과 정파제일인.
당대 강호 무림을 삼분(三分)하는 현경의 절대고수 우내삼존의 둘이 여기에 모인 광경이라니.
게다가 사파와 정파라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세력의 수장들이 말이다.
‘천지회는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구성원을 받는다더니······.’
어쩌면 천지회 자체가 정사마 구분이 희미하던 고대에 조직돼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후루룩.
나는 정파와 사파의 절대자 두 명 사이에서 느긋하게 맛없는 녹차를 마셨다.
자꾸 먹다 보니 이 녹차 맛도 좀 괜찮아지는 기분이었다. 이런게 뇌이징인가?
천지회와 혈마, 혈교의 정체는 확실히 전생에서도 파악하지 못했던 정보이긴 했다.
그래서 들었을 때 조금 놀라웠기는 했지만, 그뿐이다.
‘내 할 일에 변화는 없어.’
혈마가 고대의 존재건 뭐건 상관없다.
나의, 황상의 천하를 위협하는 자는 누구건 내가 처리할 것이다.
내 궁극적 목표는 혈마를 조지고 정사마를 초월한 강호 무림의 영웅이 되어 천하의 미녀를 품에 안아 삼처사첩을 구축하고 주지육림에서 영웅호색을 실천하는 것!
그러니 검후비동에서 맹세한 대로, 혈마는 내 손으로 꺾어야 했다.
그래야 절세미녀의 살결에 파묻혀 마음껏 운우지락을 누릴 것이 아닌가?
그 과정에서 천지회를 이용할 수 있다면, 그래 마음껏 이용해줄 것이다.
“그래서 땡중, 저 아해의 시험은 어떻게 됐느냐?”
적사월이 손에 들고 있는 부채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초면도 아닌데 초면처럼 행동하는 적사월의 행동에 실소가 나오려는 입매를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통제했다.
아직 적사월과 능월향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안 밝힐 생각인가?
“아미타불. 이 소협은 빈승의 시험을 훌륭하게 통과했소.”
신승이 염주를 굴리면서 적사월에게 말했다.
“그래? 어떻게?”
“시험 내용은 무덤까지 가져가리라 이 소협과 약조했으니, 적 시주라고 해도 말해줄 수 없소이다.”
“······그렇게 나오겠다는 말이지······.”
적사월이 팔뚝을 다탁 위에 올렸다.
탁탁.
그녀의 손가락이 다탁을 두드렸다.
적사월이 자연스럽게 녹차를 따라 후루룩 한모금 마셨다.
“여전히 맛없는 녹차구나. 땡중. 항상 올 때마다 이따위 차를 손님한테 대접하다니, 그 악취미는 고칠 생각은 없느냐?”
“허허허허. 적 시주한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소.”
“됐고.”
탁.
적사월이 찻잔을 다탁에 올려놓았다.
그녀의 얼굴이 나를 향했다.
“땡중의 시험이 끝났지만······. 본녀는 아직 너를 믿지 않느니라. 그러니 이제 본녀가 너를 시험하도록 하겠다.”
적사월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시험은 말하지 않아도 무슨 내용일지 너무 뻔했다. 면사를 벗고 맨얼굴을 드러내서 내 욕망의 민낯을 드러내 보겠다는 거겠지.
뭐 좋다. 얼마든지 유혹하라고 해라. 나는 최면 어플 따위에 절대 넘어가지 않을 거니까.
아직 본인의 진짜 정체를 드러내지도 않고, 부캐와 본캐가 동일인임을 고백하지도 않은 적사월에게 마음을 줄 생각은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말했다.
“시험이라, 시험이라고 말씀하니 아는 누님이 생각나는군요.”
내 말을 들은 적사월의 손이 미세하게 움찔했다.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안력이 없었더라면 눈치 못 챌 정도로 찰나의 순간에 이른 손 떨림.
“아는 누님이라니. 갑자기 무슨 흰소리인지 모르겠구나.”
적사월이 오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적사월을 바라보면서 모르는 척 연기하면서 말했다.
“화면호검 여예령이라고······. 사내를 만날 때마다 본인의 아름다움을 묻고는 거짓으로 아름답다 답한다면 거세한다는 사파의 여고수요. 혹시 아시오?”
“······모른다. 처음 들어보는구나.”
내 말에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적사월.
조금 찔리는 모양이었다.
끝까지 잡아뗄 줄이야.
뭐 적사월을 너무 자극하는 것도 좋지 않다. 이쯤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
“모르면 됐소. 그래서, 어떤 시험이요?”
어차피 다 알지만, 예의상 질문들 던졌다.
내 말을 들은 적사월이 요사스러운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녀가 말했다.
“본녀가 누구인 줄 아느냐?”
원래 저런 질문에는 화용월태와 같은 자태와 면사로도 숨길 수 없는 절세의 미모로 보아하니 혹시 천하제일미의 미모와 무위가 사파제일에 이를 정도로 고절한 절세고수 염왕 적사월 선배님이 아닙니까? 라고 답해줘야 강호의 도리.
적사월도 그걸 의도하고 물어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 강호의 도리를 지키지 않기로 했다.
“모르겠소.”
나는 적사월을 모른다.
능월향, 화면호검이라면 모를까.
“······.”
내 말에 침묵하는 적사월.
그녀의 손이 이제는 대놓고 떨렸다.
“허허허허······. 아미타불.”
얄밉게 웃는 신승.
“······모르겠다면 지금부터 똑똑히 기억하고 절대 잊지 말거라 아해야. 본녀가 바로 사파제일인이자 사도련주이며 하오문의 태상문주인 염왕 적사월이다.”
“염왕 선배를 뵙습니다. 공동파의 이철수라고 합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면서 그녀에게 최소한의 예를 표했다.
“사파제일인인 본녀가 왜 정파의 성지에서 저 땡중과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는지 궁금하겠지? 그 대답은 간단하다. 본녀가 천지회의 지령주이기 때문이다.”
“그럼 신승 선배님께서는 천령주겠군요.”
“그렇다. 본회는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받는다. 그리고 혈교가 발호할 태세가 감지된다면 회가 소집되어 임시로 적대 관계를 중지하고 서로 협력하여 혈교를 몰아낸다. 혈교는 정사마를 초월한 무림의 오랜 공적이니 말이다.”
“그럼 혈교의 일이 없다면 구성원들끼리 서로 적대하건 협력하던 상관없다는 뜻이오?”
“바로 그렇다. 그게 본녀가 저 땡중과 함께 있는 이유이지. 검후비동에서 혈교 놈들이 나타나지만 않았더라도, 천지회가 소집될 일도, 본녀가 이 위선자 다혈질 중놈과 겸상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과연.
내 추측대로 천지회는 점조직이자 일종의 임시 조직. 혈교 일에만 정사마 삼세력의 적대 관계를 일시 중지하여 혈교를 몰아낼 때까지 임시 동맹을 맺는 중재 기구, 비상 핫라인에 가까웠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추축국에 맞서 손을 잡은 자본주의 미국과 공산주의 소련의 연합국처럼, 영화에서 외계인이 쳐들어오면 서로 싸우다가도 힘을 합치는 지구촌 국가들처럼 말이다.
어차피 혈마가 천하를 지배하면 정파고 사파고 마교고 전부 사이좋게 망할 테니 합리적인 방안이라 할 수 있겠다.
일종의 음지 무림맹이자 어쩔 수 없는 오월동주(吳越同舟)라 할 수 있겠지.
“그리고 시험 내용을 물었으니 하는 말인데, 본녀의 시험은 아주 간단하다.”
완전히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적사월의 말투에 여유가 묻어 나왔다.
스으윽.
그녀가 면사를 천천히 벗었다.
“······본녀와 눈을 마주친 상황에서 일각 이상의 시간 동안 아무렇지 않게 버티는 것이지.”
툭.
적사월의 얼굴을 가리던 면사가 땅에 떨어졌다.
천하제일미.
전생에서 본 적 있던, 현생에서는 처음으로 보는 적사월의 초월적인 미모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그녀의 적안과 눈이 마주친 순간.
광원이라고는 촛불뿐인 어두컴컴한 달마동 내부가 일순간 태양처럼 환하게 밝아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 보석처럼 붉은 눈동자, 탐스러우면서도 촉촉한 분홍색 입술.
신이 직접 빚은 듯한 완벽한 이목구비와 완벽한 몸매가 자아내는 압도적인 미모가 내 앞에 강림했다.
퇴폐적이면서도 청초하고 요염하면서도 청순한, 세상 모든 미(美)를 집약한 듯한 폭력적인 미인이 눈앞에 있었다.
적사월의 진짜 얼굴이었다.
‘언제 봐도 더럽게 예쁘군.’
전생의 내가 적사월과 만났을 때, 그녀의 나이는 구순에 이르렀었다. 하지만 적사월은 현경의 고수인 덕분에, 전생에서 구순을 넘었는데도 그 미모가 20대와 같았다.
그리고 지금, 올해로 62세인 적사월 역시 물오른 20대의 미모와 신체를 지니고 있었다.
전생과 같다.
하지만 전생의 나와 현생의 나는 다르다. 거기에 나는 한창 피 끓는 이팔청춘. 혈기왕성한 질풍노도의 신체를 가지고 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신체가 반응하여 자연스럽게 혈류가 양물로 몰리려는 순간.
나는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무위로 혈류를 제어했다. 혈류를 차단당한 양물은 발기하지 않았다.
시간이 삼 분 정도 지났을까.
나와 눈을 마주쳤던 적사월의 적안이 살짝 떨렸다.
그녀가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아해야. 본녀의 미모가 어떠하냐? 솔직히 말해도 좋다.”
“염왕 선배는 과연 천하제일미답게 천하에서 제일 아름답구려.”
현대와 중세 무림을 통틀어서 내가 본 여자 중에 적사월이 제일 예쁜 건 맞다.
난 팩트는 인정해주기로 했다.
내 대답을 들은 적사월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겨울을 지나 봄을 맞이한 자연처럼, 뺨에 홍조가 피어오른 그녀의 얼굴은 처음 봤을 때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다.
적사월이 왼손으로 애꿎은 치맛자락을 꼼지락대면서 말을 이었다.
“······그, 그렇구나. 그럼 지금 네 마음은 어떠하냐. 이것도 가감 없이 솔직히 말해야 하느니라. 본녀한테는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비술이 있으니. 거짓을 말하면 경을 칠 것이야.”
강압적인 말 내용과는 다르게 떨리는 목소리와 머뭇대는 말투로 말하는 적사월.
그녀가 원하는 대답은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다.
다른 남자들처럼 반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반하지 않았으니까.
일 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깨달았다. 능월향, 아니 적사월은 내게 진심을 말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그녀가 내게 내비치던 건 애정보다는 독점욕에 가까웠다는 것을.
그러니 나 또한 그녀를 진심으로 대할 수 없었다.
그래도 솔직히 말하라니, 어쩔 수 없지.
솔직히 말할 수밖에.
나는 적사월을 보면서 말했다.
“일각이 언제 지나가나 마음속으로 헤아리고 있었소. 이 시험이 너무······. 따분해서 말이오.”
내 말이 끝난 순간.
파스스스.
그녀의 얼굴에 어린 홍조가 사라졌다. 적사월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의 뺨이 파르르 떨렸다.
적사월의 오른손에 들린 찻잔이 가루로 화해 사라졌다.
뭐야.
솔직히 말하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