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언니야
호북성.
소림과 함께 정파 무림을 떠받치는 양대 기둥인 무당파와 대대로 정파 무림의 두뇌 역할을 맡는 제갈세가가 있는 지역.
호북성의 관도에서 한참 벗어난 야산 동굴 내부에는 한 미녀가 알몸 상태로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유진휘.
공동신협, 일검유희. 두 개의 이름으로 불리는 그녀의 눈이 번쩍하고 떠졌다.
번뜩이는 광망이 일순간 그녀의 눈에 깃들었다 사라졌다.
“후우.”
유진휘가 조용히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부푼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올해로 그녀의 나이 열일곱. 그녀가 무림인이 아닌 일반 양민이었다면 벌써 시집을 갔을 나이였다. 그 나이에 걸맞게 그녀의 몸은 이제 더 이상 소녀가 아닌 여인의 자태를 취하고 있었다.
한 쌍의 수밀도처럼 부풀어오른 아름다운 가슴, 세류요(細柳腰)처럼 가느다란 허리, 풍만한 엉덩이까지.
경국지색.
천하제일미 적사월과도 밀리지 않는 그녀의 미모와 자태가 어두운 동굴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환골탈태에 성공했어.’
유진휘가 눈을 감았다 떴다.
그녀의 몸 주변에는 환골탈태 과정에서 찢어진 옷가지와 빠져나온 노폐물이 한데 뒤엉켜 쓰레기처럼 뭉쳐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환골탈태(換骨奪胎).
초절정을 돌파하여 마침내 절대고수라 칭할 수 있는 경지, 화경에 도달한 무인이 겪는 현상을 유진휘도 겪은 것이다.
화경은 중단전을 개방하여 소우주의 기틀을 잡고 본격적으로 의념을 활용하고 강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경지.
따라서 화경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환골탈태하여 신체가 그동안 수련한 무학과 심득에 최적화된 형태로 재구성된다.
환골탈태가 끝난 유진휘의 알몸은 그야말로 화용월태(花容月態)의 화신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후우.”
유진휘가 숨을 내뱉었다.
‘이 정도라면, 사제를 지킬 수 있어.’
지난 일 년 동안.
화경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공동신협으로는 비무를, 일검유희로는 생사결을 수없이 겪으며 심득을 얻고 무공을 끝없이 개량했다.
그렇게 마침내 도달한 절대의 경지다.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손에 사제를 맡기지 않아도 돼.’
특히 검후.
그녀의 손에 사제를 맡기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이제 그녀 본인의 손으로 소중한 사제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유진휘가 손을 뻗자 동굴 한쪽 구석에 있던 봇짐에서 여벌의 옷과 검이 허공으로 떠올라 그녀의 손에 잡혔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허공섭물의 기예였다.
의념을 따라 일어난 내력이 환골탈태로 뻥 뚫린 전신세맥을 쉴 새 없이 주천한다.
흑의무복을 입고 얼굴에 면사를 차고 일검유희의 모습으로 변한 유진휘가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벌써 끝났어?”
스윽.
동굴 입구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어두운 초록 머리와 녹안이 인상적인, 열일곱 살인 유진휘보다 연하인 15세처럼 보이는 미소녀.
하지만 열다섯 살처럼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실제 나이는 지천명에 이르는 노괴.
경천십칠주 중 쌍괴의 일좌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천하제일의원.
괴의 당영령이 유진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당 선배. 부디 진맥을.”
유진휘가 손목을 내밀자 당영령이 그녀의 맥을 짚었다.
“결과는 어떻습니까?”
그녀가 눈을 감았다 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대로네.”
당영령의 말에 유진휘의 어깨가 조금 처졌다.
“그렇군요······.”
유진휘가 배를 스윽 문질렀다.
육신이 재구성되었는데도 결함이 있는 몸은 그대로였다.
강호제일의원, 아니 천하제일의원인 괴의 당영령이 진맥으로 불임이라 진단할 정도다. 그녀의 진맥은 틀리지 않는다.
실낱같은 희망이 송두리째 날아간 기분이었다.
“······역시 천형을 인력으로 극복하는 건 무리인 모양입니다.”
천형.
그녀에게 있어 천무지체는 하늘이 내린 벌이나 다름없었다.
“포기하지마. 방법이 분명 있을 거야. 유 언니.”
당영령의 말에 유진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언제나 감사합니다. 당 선배.”
유진휘가 당영령을 향해 포권했다.
그녀가 당영령과 인연을 맺게 된 시발점은 3개월쯤 전이었다.
호남성에서 악명을 떨치던 살성(殺星)이자 사파의 초절정고수 흉심마조(凶心魔爪)를 처단하는 과정에서 유진휘는 목숨이 위중할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다.
흉심마조는 초절정의 끝자락에 다다른, 화경의 벽을 마주한 초고수. 초절정 초입에 불과했던 유진휘보다 한 수 위의 고수였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하늘이 내린 재능을 지닌 유진휘가 흉심마조를 처단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녀는 흉심마조의 동귀어진을 각오한 최후절초에 큰 부상을 당하고 동정호의 물결에 잠겨 떠내려갔다.
그런 유진휘를 호숫가에서 주워 치료한 사람이 당영령.
당대의 괴의이자 천하제일의원이었다.
의원답게 당영령은 유진휘가 천무지체를 타고난 기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치료 과정에서 그녀가 남장하고 다닌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 이후 천무지체의 체질에 의원으로서 호기심을 강하게 느낀 당영령이 유진휘의 일행을 자처해서 두 사람은 지금 동행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물론 유진휘와 일검유희가 동일인이라는 사실은 타인에게 비밀로 한다는 전제조건 아래 말이다.
“고맙긴. 오히려 영령이가 더 고맙지. 언니는 언제 봐도 정말 대단해. 영령이가 말해준 간단한 실마리를 듣고 바로 화경의 벽을 돌파할 줄은 영령이도 몰랐거든!”
당영령이 녹안을 반짝였다.
그녀의 말대로 유진휘의 재능은 천고일재라는 말이 과소평가라 생각될 정도로 경악스러웠다.
초절정고수인 유진휘에게 약간의 실마리만 던져줬을 뿐이다.
그런데 그 실마리에서 곧바로 심득을 얻더니, 명상을 한다고 동굴에 들어가 화경의 경지를 돌파해버린 것이다.
당사자도 경악할 정도의 경이로운 재능.
이 빛나는 재능의 끝이 어딘지, 천무지체의 한계가 어디일지 보고 싶다.
순수한 의원으로서의 학구열이 당영령의 마음에서 들끓었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당 선배.”
포권을 취하는 유진휘의 모습에 당영령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야. 별거 아닌데 뭐. 그나저나 이제 곧 용봉지회라고 하지 않았어? 우리 언니, 용봉지회에서 정인 만나기로 약조했다며. 후후후후.”
당영령의 말에 면사 너머 유진휘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아, 아닙니다. 정인이라뇨. 그건······. 아닙니다. 사제를 만나기로 했을 뿐입니다.”
“흐응. 그래?”
당영령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그녀는 이미 유진휘가 누구를 사모하는지 알고 있었다.
아니, 얼굴에 감정이 그렇게 그대로 드러나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사제.
공동괴협 이철수.
사파에서 이르기를 쌍발색검, 세간에서 사사로이 이르기를 공동색협.
유진휘는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단지 여인으로서 결함이 있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라는 점과 장차 공동파를 이어받을 장문제자라는 신분 때문에 남장을 고수하고 있을 뿐이었다.
‘대체 어떤 놈이야.’
그동안의 동행으로 예의 바르고 착하고 의협심도 강한 유진휘에게 제법 정이 든 당영령은 얼굴도 못 본 이철수가 살짝 괘씸했다.
아무리 사내들이 무심하다지만, 이리 예쁘고 마음씨도 곱고 참한 사저가 본인을 짝사랑하는데 싫은 티만 어찌 그렇게 낼 수 있는지.
만나면 한마디해야겠다 생각하는 당영령이었다.
“그래도 영령이는 우리 유 언니 편이니까, 막히면 언제건 말해! 흠흠. 의원으로서 환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도 중요하니까. 자고로 마음의 병이 곧 몸의 병으로 이어지는 거라고! 그러니까 우리 유 언니도 항상 조심해야 해!”
“알겠습니다.”
유진휘가 여전히 얼굴을 붉힌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 그럼 출발하자구! 우리 유 언니의 사모하는 임을 만나러!”
그 모습을 본 당영령이 장난스럽게 웃더니, 팔짱을 낀 채로 소리쳤다.
“아,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선배!”
그 뒤로 동굴을 울리는 유진휘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그렇게 한 명의 소녀와 한 명의 여인이 동굴을 나와 관도를 걸었다.
그녀들의 목적지는 하북 숭산 소림사.
용봉지회가 열리는 장소였다.
*
강소성 소주.
상유천당 하유소항(上有天堂 下有苏杭),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지상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는 말로 유명한, 중원 무림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부유하고 아름다운 도시.
북경과 항주, 강북과 강남을 연결하는 중원의 대동맥인 대운하가 관통하는 교통의 요지인 소주는 자연스럽게 상업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부가 넘쳐흐르는 도시답게 소주의 향락가도 옛 송나라 시대의 개봉처럼 불야성(不夜城)을 이루어 밤에도 거리의 불빛이 꺼지지 않고 낮처럼 환했다.
바야흐로 중원 향락의 중심지인 소주.
이곳에 하오문 본타가 있었다.
천하의 모든 하류잡배가 모여 만들어진, 개방과 유일하게 견줄 수 있는 정보문파 하오문.
홍월루, 그렇게 이름 붙여진 이십 층 전각의 꼭대기에는 하오문주의 집무실이 있었다.
그곳에는 그가 있었다.
백면암군 매지량.
화경의 경지에 오른 절대고수이자 사파제일인의 하나뿐인 제자.
그의 탁자에는 지금 서신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흐음. 화정현으로 또, 오라는 말인가.”
그건 스승인 적사월이 그를 향해 쓴 편지였다.
편지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잠깐 화정현을 비우고 용봉지회에 따라가야겠으니, 그녀 대신 화정현을 지키고 있어달라는 뜻이었다.
물론 용봉지회에 따라가는 이유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스승님이 사모하는 쌍발색검 이철수 때문이었다.
불혹을 넘은 나이에 수많은 미소년을 시동으로 거느리며 하오문을 다스리는 사파의 절대고수인 백면암군이었지만 사부의 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오늘 새로 전속 시동으로 맞이한 미소년과 함께 밤을 보낼 생각이었던 백면암군의 하얀 가면이 파르르 떨렸다.
그가 한숨을 쉬었다.
“······하루빨리 사부님의 사랑이 이루어져야 할 텐데······.”
그래야 좀 덜 끌려다닐 것 아닌가.
나이도 이제 불혹을 넘었는데, 하오문의 수장이나 되어서 이게 무슨 꼴인 건지.
사부의 은혜는 하늘과 같다지만 이건 좀.
그래도 사부님이니, 그분의 첫사랑이니 어쩔 수 없다.
끄응.
백면암군은 속으로 불평을 삼키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약조한 시간 안에 감숙까지 도달하려면 지금 당장 출발해야 했다.
*
공동산.
공동파 산문 앞.
강호행 준비를 마친 나와 서하린, 그리고 서문청하를 전영이 진지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어제도 말했지만, 저번 경연과는 달리 이번 용봉지회는 나를 빼고 본 파의 제자인 너희만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따라가고 싶으나, 본산을 계속 비워둘 수는 없을뿐더러, 언젠가는 너희도 한 명의 강호인으로 강호를 독보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니, 그때를 대비한 예행 연습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감숙에서 하남까지는 제법 먼 거리다. 언제 어디서나 공동파의 제자로서 몸가짐을 바르게 할 수 있도록. 강호 무림은 도산검림이니 항상 조심, 또 조심하거라. 소림에서 진휘를 만나면 안부도 전해주고.”
전영이 길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마치 수학여행 전날 들뜬 자식들에게 걱정을 늘어놓는 부모님 같은 느낌.
고아라서 부모를 가져본 적은 없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간질간질해졌다.
“철수는 듣거라. 일행에서는 네가 유일한 사내요, 가장 선배다. 사내로서, 선배로서 사매와 서문 소저를 잘 챙겨주고, 유사시에는 개방을 통해 본산에 연락할 수 있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사부님.”
나는 포권을 취했다.
내 말을 들은 전영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가 서하린, 서문청하에게 마찬가지 당부를 끝낸 뒤 우리를 배웅했다.
“그럼 다녀오거라. 가서 본 파의 이름을 사해만방에 떨칠 수 있도록 해라.”
전영의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사부가 건넨 용봉지회 배첩을 품에 안은 채로 서하린, 서문청하와 함께 공동산을 떠났다.
그렇게 공동산을 떠나서 몇달이 지난 뒤.
우리는 마침내 용봉지회가 열리는 하남 숭산 소림사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