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돌팔이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황상의 즉위식을 성공적으로 끝낸 뒤, 구석과 단서철권, 궤장을 하사받고 권력의 정점에 올랐을 때.
나는 신의를 사실상 내 집으로 사용 중인 중남해로 초청했다.
중해의 아름다운 풍광이 그대로 보이는 정자에서 나는 신의 당영령과 만났다.
나이로는 이미 노년을 넘었는데도 화경의 경지에 이른 고절한 무공 때문인지 겉모습은 15세 소녀로 보이던 당영령은 나를 바라보며 벌벌 떨면서 내게 고개를 조아렸다.
‘양국공 합하! 구천구백구십구세! 사해만방에 그 이름이 드높은 대명제국의 충신, 양국공 합하를 뵙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동안 소중히 간직했던, 이제는 박제로 변한 내 양물이 담긴 케이스를 꺼내 뚜껑을 열면서 말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하겠어요. 호호. 저는 잘린 양물을 다시 붙이고 싶답니다.’
내 양물을 본 당영령의 얼굴이 아주 잠깐 굳어지더니 그녀가 말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잘린 지 너무 오래되어 붙이는 건 불가능하옵니다.’
‘그럼 양물을 재생하는 방법은 없나요?’
‘양국공 합하.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나이다.’
쿵! 쿵!
당영령이 머리를 박으며 사죄의 뜻을 표했다.
대법이 없다니.
그 당시의 나는 절망했다.
오로지 양물을 붙이기 위해 얻은 권력이었다. 그래서 천하제일의원인 당영령을 권력의 힘으로 여기까지 데려왔다.
최종 목표 직전이다. 그런데 뭐? 방법이 없다고?
조금 화가 났던 것도 같다.
그래도 나는 중세 무림인들과 달리 교양 있는 현대인. 그녀에게 부드럽고 친절하게 다시 한 번 질문했다.
‘정말 다른 방법이 없나요? 호호호호. 당 의원의 의술이 고금제일을 다툰다고 들었습니다. 편작과 화타에 견주는 실력이라고요. 그러니 잘 생각해보세요. 정말 방법이 없는 것이 맞는지. 저는 거짓말하는 사람을 아주 싫어한답니다.’
내 말을 들은 당영령의 몸이 떨렸다. 긴 침묵 끝에 그녀가 말했다.
‘환골탈태, 환골탈태를 한다면······. 육신이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훼손되었던 양물이 다시 재생될 가능성이······. 있나이다······. 물론 전례가 없었기에 확률에 대해서 소인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요점만 말하세요.’
‘환골탈태를 한다면 될 수도 있습니다! 합하!’
‘그렇단 말이죠. 좋아요. 나가 봐요.’
나는 그렇게 당영령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환골탈태하면 양물이 자라날 수 있다.
나는 순진하게도 그 돌팔이의 말을 믿어버렸던 것이다.
아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가능성이 폐기된 상황에서, 남은 방법이라고는 불확실하지만 환골탈태뿐이었으니까.
당영령이 완전히 물러난 뒤, 정자에 황상이 왔던 기억도 났다.
스윽.
그녀는 뒤에서 의자에 앉아 호수 풍광을 감상하던 나를 끌어안았다. 황상의 몸에서는 늘 싱그러운 향기가 났다. 화려한 머리 장식을 달고, 고운 갈색 머리카락을 폭포수처럼 늘어뜨린 황상이 예쁘고 수줍게 웃으며 다정하고 달콤한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노야. 면담 결과는 어땠습니까?’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마마.’
‘다행입니다.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건 말하세요. 짐이 노야를 돕겠습니다. 그게 무엇이건. 짐은 노야를 위해서라면······. 노야께서 필요하다면 설령 천하라도 내어드릴 것입니다. 노야께서 짐의 손에 천명을 쥐여줬으니, 이제 짐이 노야한테 보답할 차례입니다.’
황상의 고운 얼굴이 꽃처럼 붉게 물들었다.
나는 그녀의 제안에 잠깐 고민하다 말했다.
‘영약이 필요합니다. 마마.’
규화보전은 화경이 아닌 현경을 찍어야 환골탈태하는 병신 쓰레기 고자 무공.
따라서 내가 환골탈태하려면 영약이 아주 많이 필요했다.
‘알겠습니다. 짐이 노야의 청을 들어드리겠습니다.’
황상이 답했다.
그렇게 중원 전역은 물론 저 멀리 한반도와 일본 열도, 그리고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대명제국의 권력을 사용해 영약을 샅샅이 찾고 시장에서 웃돈을 주고 매입해 전부 수집했었지.
황상은 오버해서 나만큼 유명했던 선배 환관인 삼보태감(三寶太監) 정화가 대선단을 이끌고 대양으로 떠났던 하서양(下西洋)을 한 번 더 하자고 했지만, 그 제안은 사양했었다.
대신 유럽 교류용 무역항인 광동성 광주(廣州)에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통해 유럽산 영약을 수입하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그렇게 전 세계의 영약을 긁어모아 도달했던 현경이었다.
그런데 자라나지 않았다.
양물이.
‘돌팔이 년 같으니.’
그 돌팔이 년의 이름이 지금 서류에 적혀 있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천하 모든 미녀를 전부 품에 안을 수 있는 나였다.
하지만 내가 여인으로 보지 않은 여인이 딱 두 명 있다. 한 명은 우리 여동생 같은, 가족 같은, 피붙이보다 더 피붙이 같은 황상이요.
다른 하나는 이 빌어먹을 불구대천의 원수인 천하제일 돌팔이 신의였다.
신의도 제법 절색이긴 했지만, 아무리 겉모습이 예쁘면 뭘 하나.
돌팔이인데.
줘도 안 한다.
“가가. 괜찮으세요? 안색이······. 안 좋으셔요.”
옆에서 적사월이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내게 스윽 붙어서, 향기가 깃든 손수건으로 내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아니. 괜찮아. 걱정하지 마.”
나는 그제야 현실에서 돌아왔다.
그래.
신의가 돌팔이기는 하지만, 뭐 2회차의 나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았으니까.
‘흐음. 그런데 신의와 사형이 친분을 맺었다니.’
친분.
다르게 말하면 꽌시다.
둘이 서로 친구라고? 남녀 사이에 친구가 있나? 아니면.
‘흥. 보는 눈은 있어서. 돌팔이 주제에.’
꼴에 여자라고 사형의 잘생긴 얼굴에 이끌린 게 분명하다.
하지만 문제는.
‘올해 기준 지천명인 주제에 감히 한참 연하인 우리 사형을 넘봐?’
신의가 올해 딱 50세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화경의 고수라 액면가는 15세 정도겠지만.
올해로 막 열일곱에 접어든 사형을 노리기에는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이건 사제로서 눈에 흙이 들어가도 용납할 수 없었다.
“괴의와 공동신협은 용봉지회가 열리는 하남 숭산까지 동행할 가능성이 높다고 해요.”
적사월이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겨우 표정을 원래대로 돌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유용한 정보 고마워. 월매.”
스윽.
이제는 연례행사가 된 쓰담쓰담을 적사월에게 행한다.
그녀의 부드러운 머릿결 감촉이 손바닥으로 느껴졌다.
적사월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의 표정이 고장난 것처럼 변했다.
나는 손을 떼어냈다.
“아······.”
내 손이 떨어지자 적사월의 입술에서 낮은 탄식이 터졌다.
“······이제 곧 용봉지회야. 이번에도 떠나면 저번 경연처럼 당분간 못 볼 테니······. 그동안 화정현, 잘 부탁해. 월매.”
“네!”
내 말에 적사월이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좋아.
이 정도면 용봉지회에 간 동안 본산에 별 일 없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지막 하나 남은 과자를 입에 물고 우물거리며 일어섰다.
“그럼 갈게. 잘 있어. 월매.”
“네! 가가! 조심히 들어가세요!”
나는 적사월의 배웅을 받으면서 특실을 떠났다.
*
이철수가 특실을 떠난 이후.
적사월은 얼굴을 붉힌 채로 풍만한 가슴 위에 손을 얹으며 심호흡했다.
“후우.”
두근, 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맥박쳤다.
언제나 이랬다.
가가를, 그를 만나면 감정이, 심장이 통제가 되지를 않았다.
두근대는 가슴을 안으면서 적사월은 버릇처럼 이철수의 손이 닿았던 머리를 스스로 쓰다듬었다.
“가가······.”
그녀의 입에서 애정이 듬뿍 깃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최근 1년 동안.
이철수는 곤화루를 7일마다 한 번 찾을 정도로 자주 들렀다.
물론 사형이 걱정되어서 그녀를 찾은 거라는 사실 정도는 적사월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자주 만나는 그 시간이 좋았다. 그가 내일 온다면 사흘 전부터 적사월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가 오는 날에는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분과 연지를 바르고 예쁘게 단장했다.
가가를 위해 고급 차와 다과, 요리를 준비했다.
그가 좋······.
“아, 아니야······. 그건······.”
적사월은 떨리는 목소리로 스스로의 마음을 부정했다.
그래.
적사월의 마음은 내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역으로 이철수의 마음을 빼앗아야 한다. 다른 사내처럼 그녀에게 빠지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계속해서 준비했다. 성과는 어느 정도 있었다.
이제 이철수는 그녀를 능 소저 같은 거리감 있는 호칭이 아닌 월매라는 애칭으로 다정하게 불러줬고, 헤어질 때마다 쓰담쓰담도 해줬다.
이제 가슴을 밀어붙여도 싫어하지 않았고, 허벅지를 쓰다듬어도 괜찮았다.
그러니 가까워졌다.
‘조금만, 조금만 더 거리를 좁히면······.’
이철수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천하제일미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 어쩌면 그 이상도······.
‘아니다! 그 이상은 있을 수 없어!’
적사월은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래.
마음을 얻고, 딱 거기까지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해서 정인이 될 생각은 없다. 그저 치마폭에 가두는 것뿐이다. 영원히, 다른 여인 따위에게는 마음을 주지 못하게.
적사월의 눈앞에 그녀에게 반해 구애하는 이철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의 치마폭에 휩싸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도.
매일 그녀를 찾아와서 밥을 먹고, 단둘이 산책도 하고, 둘이 찻집에 들러 차를 마시는 모습도 떠올랐다.
두근.
두근두근.
적사월의 심장이 계속 뛰었다. 그녀의 얼굴이 노을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아직 자각하지 못했다.
자존심 때문이라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녀 본인이, 천하제일미녀이자 사파제일인이며 현경의 고수인 적사월이 이철수에게 푹 빠졌다는 사실을.
“용봉지회라······.”
적사월이 이제는 제법 밝아진 화정현의 야경을 등진 채로,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면서 중얼거렸다.
용봉지회.
2년마다 한 번씩 개최되는 정파 무림의 축제. 용봉(龍鳳)이라 불리는 정파 무림의 후기지수를 선발하는 무림대회.
사파인 그녀와는 본래 인연이 없는 대회다. 하지만.
‘검후 그 어린 년은 이번에도 참석하겠지.’
까드득.
적사월이 이를 갈았다. 그녀의 최대 적수인 검후.
그 어린 년은 정파 무림의 명숙이니만큼 이번 용봉지회도 당연히 참석할 것이다. 그리고 저번 경연 때처럼 이철수의 마음을 빼앗으려고 수작을 부리겠지.
그뿐만이 아니다.
‘소검후······. 그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년까지 가가를 노릴 줄이야······.’
지난 항산파 경연에서 공개적으로 연심을 고백한 소검후도 빼놓을 수 없었다.
거기에 사매인 서하린과 시비인 서문청하는 또 어떻고.
대체 왜 그렇게 쓸데없이 여인이 느는 건지 모르겠다.
적사월은 저도 모르게 손톱을 깨물었다.
‘이리 경쟁자가 계속 느는데······.’
경쟁자는 계속 늘고 있다.
하지만 사파제일인인 그녀가 용봉지회를 따라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에 가가께서 화정현을 잘 부탁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가가가 소중히 여기는 고향을 지키는 일도 중요하다.
잘 지키고 있다면, 가가께서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의 머리를 또 쓰다듬어줄 것이다. 어쩌면 그 이상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적사월의 얼굴이 붉어졌다.
생각만 해도 좋았다.
좋은데, 뭔가 부족했다.
왠지 허전한 기분은 왜일까. 이번에도 그녀 혼자 남는다면 저번 경연처럼 뒤처질 수도 있었다.
따라가고 싶다.
이번만큼은······.
‘하지만 가가께서 화정현을 지키라 부탁하셨는데······.’
그러나 이철수는 그녀에게 화정현을, 본산을 지켜달라 말했다.
그의 부탁을 어기는 건 안 됐다.
또 어겼다가는······.
적사월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멋대로 강호에 소문을 퍼뜨린 덕분에 가가가 그녀를 외면했던 일이. 매일 밤 눈물로 베갯잇을 적시던 날이 떠올랐다. 가가에게 용서받을 때까지 적사월은 좌불안석에서 떨어야 했다.
혹시나 그가 나를 미워하게 된 게 아닐까, 이제 그가 나를 찾지 않으면 어쩌지.
그런 불안과 후회 속에서 지냈던 끔찍한 경험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아쉽지만······. 역시 가가의 부탁을 따라야······.’
적사월이 그렇게 시무룩한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던 그때.
푸드득.
날갯짓 소리와 함께 창문에서 비둘기 하나가 날아들었다.
하오문에서 사용하는 전서구였다.
‘전서구라······.’
벌써 정기 보고 시간인가.
적사월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비둘기 다리에 매달린 작은 통에서 돌돌 말린 서찰을 꺼냈다.
서찰의 내용을 확인한 순간.
적사월의 적안이 반짝였다.
그녀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탁.
적사월은 재빨리 탁자 위에서 세필을 들어 답장을 작성한 뒤에, 돌돌 묶고는 통에 넣었다.
[구구구구!]
전서구가 힘찬 울음소리와 함께 창문에서 날아올라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그 모습을 본 적사월이 웃었다.
“때마침 이런 소식이라니, 용봉지회에······. 갈 수 있는 명분이 본녀의 수중에 들어올줄이야. 후후. 하늘이 본녀를 돕는구나. 기다리거라······. 가가.”
이 적사월이 그대를 만나러 갈 테니.
적사월은 뒷말을 목구멍으로 삼키면서 조용히 소리없이 웃었다.
두근.
그녀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용봉지회가 가까이 다가온 연초의 어느 날에 있었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