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이팔청춘 - 삽화
경연이 끝나고 사형이 강호 독보행을 천명한 이후.
사형이 빠진 채로 공동파에 돌아온 다음부터는 그렇게 크게 별일은 없었다.
이후 일정은 산에 틀어박혀서 하는 수행의 연속이었다. 항산파 경연도 충분히 큰 행사였고, 비동 발견과 경연 활약을 통해 공동파의 인식을 일부 개선하기는 했다.
하지만 정파 무림 전체의 행사인 용봉지회에 비하면 항산파 경연도 지역 향토 행사에 불과했다.
그러니 용봉지회다.
강호 무림 전체에 공동파의 이름을 드높이는 건 물론, 이 이철수의 이름도 함께 알릴 수 있는 기회는 오직 용봉지회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피나는 무공과 색도 수행을 반복하면서 지옥 같은 일 년을 보냈고.
마침내 해가 바뀌고 용봉지회가 돌아왔다.
‘올해로 나도 이팔청춘(二八靑春)이로군.’
휘이잉.
1월. 해가 바뀐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눈보라와 겨울 바람이 휘몰아치는 공동산을 내려가면서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
해가 바뀐 지금 내 나이는 드디어 이팔청춘, 팔팔한 16세가 된 것이다.
현대였다면 중학교 3학년, 이제 막 고등학교 1학년을 넘볼 나이.
이세계 중세 명나라에서는 결혼을 해서 가정을 가질 나이로 여겨지는 나이에 나는 도달한 것이다.
물론 강호 무림의 특성상 일반 사회보다 결혼이 늦어지는 경우가 많기에 현대 나이로 20세가 되는 약관에 가정을 이루는 경우가 많지만, 어쨌건 그랬다는 것이다.
탁.
화정현 입구에 도착한 나는 바지춤을 살짝 들춰 대물의 상태를 확인했다.
파릇파릇하게 자랐던 수풀은 어느새 사내처럼 삼림을 이루고 있었다. 안 그래도 거대했던 대물은 색도 수행의 결과로 모든 사내가 부러워할 정도로 완벽한 대물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후후후후.’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이대로 자란다면 강호제일대물, 아니 천하제일대물의 경지에 오르는 것도 꿈이 아닐 것이다.
물론 색도의 수행은 피지컬에만 있지 않다. 여인을 유혹할 수 있는 말솜씨, 태도, 무엇보다 여인과 진정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진심이 중요하다.
키도 많이 자라서 이제 180에 거의 육박한 상황.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알파 메일, 상남자의 모습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속으로 지으면서 빠르게 화정현 유흥가로 향했다.
화정현 유흥가.
1년이 또 지난 지금, 공동파의 세가 점차 살아나고 향화객도 늘기 시작하면서 화정현 유흥가도 덩달하 한층 더 규모를 늘렸다.
이제는 웬만한 소도시 유흥가와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
게다가 이렇게 큰 유흥가가 있는데도 화정현에는 별다른 잡음이 없었다. 나아가 공동파 본산을 비워도 아무도 감히 본산을 건드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는 화정현 유흥가를 사실상 일통한 곤화루의 수장, 적사월 때문이었다.
아무리 정체를 대외에 숨겼다지만, 사파제일인이 자리 잡고 있는데 감히 말썽을 부리는 간 큰 미친놈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익숙한 몸놀림으로 이제는 10층 전각으로 증축한 곤화루의 화려한 입구에 도착했다.
이게 그 초라했던 곤화루가 맞는지 의심이 될 만큼 완전히 달라진 모습. 내가 알던 2층따리 곤화루가 맞나. 가슴이 웅장해진다.
영업 여부를 뜻하는 문 앞 파란 초롱불, 청등은 꺼진 상태였다.
아직 영업 시간 전이라는 뜻. 나는 거침없이 문앞에 드리운 발을 걷으면서 들어갔다.
“어서옵쇼! 이 공자님! 지부장님께서는 10층 특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가 오자마자 웃으며 반겨주는 하 총관.
2층따리 기루 총관에서 이제는 10층짜리 마천루이자 감숙제일기루까지 등극한 곤화루의 총관이 되어서 그런지 입은 옷도 얼굴도 때깔이 한층 좋아진 모습이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고는 10층까지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그렇게 도착한 10층.
한 층 전체를 통째로 특실로 꾸민 데다, 화정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 그런지 창문을 통해 보이는 마을과 공동산 뷰가 인상적인 거기에는 그녀가 있었다.
“어서 오세요. 가가.”
사천제일기녀, 아니 이제는 감숙제일기녀라고 불리는 능월향의 모습을 한 적사월이었다.
나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그녀 바로 옆에 앉았다.
향수를 뿌린 건지, 그녀의 몸에서는 끈적하고 달콤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쪼르르.
그녀가 내 찻주전자를 들어 내 찻잔에 차를 따라주면서 속삭였다.
“복건성에서 가져온 철관음(鐵觀音)이에요.”
철관음.
복건성 특산품인 고급 우롱차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가 따라준 철관음을 한 모금 음미했다. 나쁘지 않다. 전생에 황궁에 있던 시절, 철관음과 서호용정을 포함한 온갖 고급차를 섭렵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오랜만이군.
한때 황상이랑 같이 중남해 정자에서 둘만의 다과회를 즐기던 기분이 들었다.
“맛이 좋군.”
“다행이에요. 가가. 후후.”
내 말에 능월향, 아니 적사월이 요사스럽게 웃었다. 그녀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얼굴만 보면 절세미녀라 할 만하다.
전생에 직접 봤던 적사월의 미모에는 못 미치지만 말이다.
하지만 적사월은 1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녀의 정체를 공개하지 않았다.
스윽.
그녀가 팔짱을 꼈다. 자연스럽게 적사월의 거유가 내 팔에 뭉개졌다.
곤화루를 찾을 때마다 매일 거유를 어필하며 치근덕대는 덕분에 이제는 익숙했다.
뭐 나쁘지 않기도 했고. 나는 적사월의 가슴골을 살짝 바라보다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도 정보 들으러 왔어.”
“공동신협 유 소협의 정보 말이죠? 물론 준비해놨답니다.”
스윽.
적사월이 풍만한 가슴 골짜기 사이에서 서류를 꺼내 내 앞에 올려놓았다.
지난 1년 동안.
나는 매일매일 곤화루에 출석 도장을 찍으면서 하오문을 통해 사형 관련 정보를 체크했다.
소개장이랑 같이 강호 생활 꿀팁도 함께 적어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호구 중의 호구인 사형이다.
불안했다.
우리 호구 사형, 어디 사기꾼에게 당해서 코 베이면 진짜 큰일이다. 혈세신마를 상대할 중요 전력으로 미래의 천하제일인 만한 인재가 없을 뿐더러, 그가 없어지면 내가 공동파 장문인이라는 귀찮은 자리를 떠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제는 사형이 없으면 뭔가 허전하기도 하고.
‘미운 정이 너무 들었나.’
구천구백구십구세의 간신답지 않다. 내가 이렇게 정이 많은 사내다.
그래서 하오문에 실시간 위치 추적은 물론 비밀 호위까지 부탁했다.
물론 적사월 특별 할인가로 가격은 제법 싸게 했다.
나는 적사월의 분향이 그대로 묻어나는 서류 봉투를 뜯어 펼쳤다.
“흐음. 사천에서 흑사룡과의 비무에서 다시 한번 승리한 뒤, 용봉지회를 위해 하남으로 이동중······.”
그동안 사형은 강호 독보행이라는 말에 걸맞게 홀로 무림을 주유하며 후기지수를 상대로 비무행을 다녔다.
물론 치안이 개판인 중세 무림답게 길 가다 튀어나오는 산적과 사마외도의 무리를 회치는 건 덤이었다.
사형이 공동파의 이름을 걸고 비무행을 한 덕분에 공동파의 위상이 날로 높아지는 건 보너스였다.
“다친 곳은 없음······. 이번에도 일검유희가 공동신협이 머물렀던 장소에서 부패한 지역 문파를 참살하고 그 재산은 양민한테 나눠주었다······.”
특이한 건 사형의 강호 독보행과 함께 나타난 의문의 신비 고수였다.
일검유희(一劍遊姬).
얼굴을 면사로 가리고 온몸을 흑의로 감싼, 신상이 밝혀지지 않은 신비의 여고수.
간간히 드러나는 턱선과 흑의 사이로 드러나는 몸매로 볼 때 절세미녀로 추정된다는 이 여고수는 항상 사형이 머물렀던 장소에서 부패한 지역 문파, 양민을 괴롭히는 사마외도를 응징하고 그 재물을 세간에 베푸는 의적 및 협객 행위로 명성이 드높았다.
일검유희라는 별호는 일검(一劍), 그러니까 한 초식만으로 상대를 참살하는 극한의 쾌검과 높은 무위를 지녔다고 붙여진 별호이다.
발음이 비슷한 일검유희(一劍遊戲)는 세간에서 붙인 그녀의 독문무공이자 성명절기의 이름이기도 하다.
“일검유희와 공동신협, 두 사람은 아는 사이인 게 분명해요. 유 소협께서 강호에서 사귄 벗일지도 모르죠. 아니면 남녀사이니 정인이거나.”
옆에서 적사월이 요염하게 웃으면서, 내 허벅지에 손을 올려서 살짝 주무르면서 말했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허벅지에 손은 왜 올리는지 모르겠다.
뭐, 덕분에 정보 및 의뢰 비용을 폭탄 할인 받으니 나야 좋지만.
“벗 또는 정인이라.”
일검유희.
일 년 만에 강호 무림 전역에 이름을 알린 신비 여고수. 정사를 가리지 않고 불의를 응징하는 사이다의 화신.
그리고 전생에서는 나타난 적 없던 존재.
흔히들 강호 무림에는 은거하는 기인이사가 모래알처럼 많다고들 한다. 그래서 무협소설 클리셰처럼 현실 강호에서도 갑자기 신비고수가 등장하거나, 전대 고수가 남긴 기연을 이은 전인이나 은거기인의 제자가 강호로 출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동창에서는 그 은거기인들의 명단을 따로 작성할 정도로 대부분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단언할 수 있었다.
일검유희 같은 고수도 무공도 전생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뭔가 수상한데.’
혈교의 끄나풀인가?
그건 아니다. 놈들의 행동 패턴과 일검유희는 다르다.
전생의 사형은 불의를 참지 못하는 전형적인 교과서적인 영웅이었다.
그리고 일검유희의 행보는 놀랍도록 전생의 사형과 닮아 있었다.
심지어 동선까지 사형과 일치하지 않는가?
구파일방 육대세가를 상대로 비무행을 하는 검성 유진휘.
그리고 불의를 보면 응징하고 무고한 양민을 돌보는 검성 유진휘.
미래의 검성 유진휘가 마치 지금은 공동신협 유진휘와 일검유희라는 두 개의 인물로 나뉘어진 기분이었다.
잠깐, 나누어졌다고?
‘설마 역할 분담인가?’
내가 준 강호 꿀팁 중에는 뒤가 구리거나 꺼림칙한 일을 할 때는 위장 신분을 만들어서 활동하는 쪽이 좋다는 구절도 있었다.
구체적인 방법도 있었다.
암시장에서 인피면구를 구매하거나, 역용술과 분장술을 익히거나, 아니면 복면이나 면사를 써서 얼굴을 가리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적의 시체와 현장을 훼손해서 무공 흔적을 지우는 꿀팁도 있었다.
‘일검유희가 사형인데, 그런데 사형은 남자인데? 그럼 설마 여장······?’
사형의 외모가 곱상하기는 했다. 중성적인 미소년. 남자보다 더 예쁜 미소년이 사형이다.
그런 사형이 여장한다면······. 면사로 가려도 절세미녀라는 소문이 충분히 퍼질 만하다.
거기에 극음의 영약까지 먹었으니 남자보다는 여자에 가까운 체형에 여유증도 있으니.
‘만에 하나 사형이 진짜 여자일 가능성도 있지만.’
사형이 여자일 가능성.
0%는 아니다.
하지만 무의미한 확률이다.
전생에 습득한 정보와는 모순되었다.
‘······사형은 사내만 타고나는 천무지체의 보유자에다가 달거리를 안 했어······. 결정적으로 동창과 서창의 정보 수집 교차 검증 결과도 남자로 나왔고······.’
중원 최고의 정보기관인 동창과 서창에서 내린 결론이 검성은 남자라는 사실이었다.
사도련주의 숨긴 부캐까지 전부 찾아내는 가공할 정보력을 가진 동창과 서창이었다.
그 둘이 교차검증으로 공인한 정보다.
틀리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혈교 관련에서 사소한 실수가 있기는 했지만, 그건 놈들이 워낙 잘 숨어서 그런 거고.
게다가 천무지체는 대대로 사내만 타고 나는 체질이다.
무엇보다 사형은 월경을 안 했다. 단 한 번도. 아무리 여인임을 숨기려 해도 달거리는 숨길 수 없다. 그 정도로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나는 바보가 아니다.
‘흐음······.’
그래도 살짝 의심이 가는 건 사실이다.
동창과 서창의 정보가 혈교의 등장으로 희박한 확률이지만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으니.
사형의 성별을 틀릴 가능성도 아주 0%는 아니게 된 것이다.
사형은 여자인가 남자인가.
아니면 제3의 성 같은 건가?
이제 와서 이런 말도 안 되는 고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만일 그 희박한 확률을 뚫고 사형이 정말 여자였다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야 하나.’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이다.
게다가 아직 확실하지도 않지 않나. 아닐 확률이 훨씬 더 높고. 아니 99.9%는 아니다.
그러니 이런 쓸데없는 고민은 필요 없다.
나는 이 주제를 뒤로 미룬 채로 보고서를 계속 읽었다.
뒤이은 대목을 읽은 나는 경악했다.
사형의 성별 논란 따위는 생각도 안 날 정도로 충격적인 문구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공동신협이 괴의 당영령과 친분을 맺었다고?”
“네! 가가,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문제.
그래.
문제는 아주 많다.
괴의(怪醫) 당영령.
오정(五正) 오사(五邪) 오마(五魔) 쌍괴(雙怪), 모두 통틀어 경천십칠주(驚天十七柱)라 불리며 그 이름이 강호 무림을 위진하는 당대 화경의 절대고수 17인.
그중에서도 쌍괴의 일좌를 당당히 차지하는 당문 출신 여고수.
나는 이 빌어먹을 년이 미래에 가지게 될 별호가 뭔지 알고 있었다.
저년이 지금으로부터 20년 뒤 미래에 불리게 될 별호는 신의(神醫).
괴의인 지금이나 신의가 된 미래나 별호 앞에 붙어서 함께 불리는 또 다른 별명은 천하제일의원(天下第一醫員).
그렇다.
당영령 이 빌어먹을 년이 바로 전생에서 내 잘린 양물 하나 못 붙여서 현경을 찍으라는 등신 같은 처방전으로 나를 속인 천하제일돌팔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