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구순(九旬)
“연기를 더 하라니······!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제, 제 모습이 어떻다고 그러는 거죠?!”
소검후의 뾰족한 목소리가 처소를 가득 채웠다.
그녀의 표정에 억울함이 묻어났다.
소검후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사문의 은인이라니, 이럴 수는 없어요!’
이철수.
그가 검후비동을 찾아낸 순간부터 그녀의 사부인 검후는 보란 듯이 이철수를 사문의 은인으로 선포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소검후 천소빈은 깨닫고 있었다. 사부님께서 이철수에게 더없이 다정하게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뿐인 제자인 그녀에게도 엄격했던 사부님이었다. 강호 무림에 표정 변화 없는 냉미녀로 유명한 검후였다.
그런데 30년이나 어린 소년을 상대로, 아무리 은공이라도 수줍은 모습을 보이다니. 그렇게 다정한 말투로 말하는 사부님의 목소리는 단언컨대 제자인 천소빈도 처음이었다.
‘아, 안 돼요! 더 이상 사부님을 그렇게 놔두면!’
천소빈이 입술을 깨물었다.
더 이상 사부님을 이철수의 마수에 빠져들게 놔둘 수는 없다. 하지만 이번 경연에서 이철수는 스스로의 도전자 자격을 정파 무림이 보는 공석에서 증명했다. 그것도 모자라 사문의 은인이라는 위치에 오르기까지 했다.
그 누구보다 은원을 중요시하는 강호 무림 사회에서 사문의 은인인 이철수에게 천소빈은 예전처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러니 남은 건 오직, 전력을 다한 구애로 그의 마음을 돌리는 일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천소빈은 이미 그럴 각오를 끝냈다.
사부님을 위해서라면 지옥도 갈 수 있는 천소빈이었다. 이철수의 품에 안기는 것 따위, 그와 혼인하는 일 따위는 당연히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철수가 그녀에게만큼은 집요하게 철벽을 쳤다는 사실이었다.
천소빈이 이마를 문질렀다.
이철수가 딱밤을 때려서 부어오른 환부는 가라앉은지 오래였지만, 부어오른 그녀의 마음은 아직 가라앉지 못했다.
“으으으으······. 대체······. 정말로······. 진심이 아니면 안 받아주는 거냐고요······.”
천소빈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고개가 떨어졌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천소빈은 손에 넣고자 한 게 무엇이건 넣지 못한 적이 없었다.
산서제일상단 천일상단의 금지옥엽으로 태어난 천소빈이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사랑받으며 자란 아가씨인 그녀는 어려서부터 원하는 건 뭐든지 가질 수 있었다.
딱 하나,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았던 정략혼이라는 아녀자의 운명도 항산파 입문과 소검후 자리 등극으로 회피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무재도 상당했으며, 외모도 뛰어났다.
모든 게 완벽했다. 무엇이건 가질 수 있었다. 세간 사내들은 그녀를 흠모했다.
날고 기는 명문세가의 자제들이 모인 용봉지회에서도 그녀는 군계일학처럼 돋보이는 존재였다.
천소빈은 언제나 최고였고, 완벽했다.
이철수의 품에 안길 거라는 그녀의 계획도 그런 자신감에서 나왔다.
상식적으로 그녀 같은 완벽한 아가씨를 거절할 사내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철수는 거절했다.
“······건방지기 짝이 없군요······. 제, 제가 어떻길래······.”
소검후는 서러웠다. 존귀하게 태어나서 언제나 성공 가도를 달려왔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를 누가 지금까지 이렇게 냉대한 적이 있던가?
없었다.
“······으으으으······. 정말······. 진심이 아니면······.”
소검후가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한낱 사내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가 소맷자락으로 눈가에 고인 물기를 훔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진심이 아니면 받아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진심이 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검후 천소빈은 그렇게 각오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용봉지회까지 1년.
내년 용봉지회에서는 반드시 그의 품에 안길 생각이었다.
*
“사제······.”
산서성에서 일행과 헤어진 유진휘는 입술을 깨물었다.
헤어진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사제가 보고 싶었다.
그녀는 품 안에서 사제가 써준 소개장과 어린 시절 사제가 건네줬던 헝겊 손수건을 꺼냈다.
망각이 없는, 완전 기억 능력을 지니고 있는 유진휘였다.
사제가 건네준 물건을 보자마자 그녀의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사제와 함께 지냈던 모든 세월이 떠올랐다.
인생의 절반을 사제와 함께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사제는 가족이자 지켜야 할 대상이자······.
첫사랑이자 지금도 연모하는 사내였다.
그녀를 멀리하기만 했던 사제였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녀가 강호 독보행을 떠난다고 하니 사제는 만류했다.
걱정해줬다. 함께 있으면 안 되냐고, 그렇게 말해줬다.
그 사실이 너무 기뻤다.
사제에게 미움받고 있지 않다. 사제도 그녀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게 너무 좋아서······. 그만 강호 독보행을 취소하고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할 뻔 했다.
하지만 그럴 수도, 그래서도 안 됐다.
유진휘가 입술을 깨물었다.
‘벌써 약해지면 안 돼.’
사제를 지키기 위해 택한 강호 독보행이었다.
더 이상 검후 같은, 나이만 많은 여인에게 사제의 안위를 맡기는 일은 그녀에게 사양이었다.
일 년.
검후를 추월하는 데는 일 년이면 충분했다.
유진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제가 건네준 물건을 다시 품에 넣었다.
유진휘는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닦아냈다.
‘일 년 뒤, 소림에서 다시 보자. 사제. 그때는······. 내가 사제를 지킬 테니까.’
유진휘는 그렇게 다짐하면서 발길을 돌렸다.
그녀의 발걸음이 향하는 장소는 섬서성.
화산과 종남이 서안을 두고 대치하는 지역이자, 정파제일 후기지수인 화산파의 검룡이 있는 곳이었다.
*
북경.
중남해(中南海).
금나라가 최초로 조성했으며 성조 영락제(成祖 永樂帝)가 중건한, 자금성 서쪽에 자리한 황실의 원림(園林).
크게 중해와 남해라는 두 개의 커다란 호수로 이루어진 이 거대 정원에는 정자가 하나 있었다.
수운사(水云榭)라 이름 붙여진, 중해 물가에 세워진 정자의 광경은 아름다웠다.
이 아름다운 전경을 자랑하는 정자에는 한 명의 소녀가 서 있었다.
붉은 옷을 입은 미소녀.
올해로 신체나이는 열 살, 정신나이는 구순(九旬)에 접어든 태평공주 주가율이었다.
그녀 앞에는 환관 복장을 한 중년인이 부복하고 있었다.
“태평공주 마마를 뵙습니다.”
그가 바로 동창의 수장인 장인태감이었다.
회귀한 이후 지난 일 년 동안.
태평공주는 미래 지식을 바탕으로 동창을 완전히 수중에 넣은 뒤에, 영약을 긁어모으는 건 물론 금의위 일부를 영약으로 포섭하고, 나아가 북경 조정의 문무백관과 대신들 일부까지 그녀의 파벌로 만들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동창의 공작으로 은밀하게 물밑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1황자, 2황자와 대등한 파벌로 성장했을 정도.
장인태감은 태평공주를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벌벌 떨었다.
그를 동창의 수장이라는 자리에 올려놓은 건 직감이었다. 그것도 본능에 가까운, 권력을 쥔 자가 누군지 알아보는 동물적인 직감 말이다.
그런 직감이 속삭이고 있었다. 태평공주는 보통 인물이 아니다. 차기 자금성의 주인은 믿을 수 없겠지만 그녀가 될 것이다. 여인의 몸이라는 흠결 따위는 보위를 향한 태평공주의 행보를 막을 수 없다.
실제로 태평공주는 신통력이라도 가진 것처럼, 동창에서도 파악 못 한 대신들의 약점을 토대로 때로는 회유하고 때로는 협박하면서 무섭게 세를 불리고 있었다.
‘도저히 열 살로 볼 수 없는 분이시다.’
나이에 상관없이 상대를 복종하게 만드는 황제의 기도가 그녀에게는 있었다.
“말하세요.”
주가율의 서늘한 눈동자가 장인태감을 향했다.
“······공동파와 항산파의 경연이 끝났나이다. 검후비동이 발견되었고, 그동안 실전됐던 절학과 신물이 항산파에 되돌아왔사옵니다. 그 과정에서······. 혈교의 흔적이 발견됐다는 첩보가 있사옵니다.”
그의 보고를 들은 주가율이 침묵했다.
‘혈교라.’
혈교.
이철수보다 더 오랜 세월을 미래에서 보낸 주가율은 혈교의 존재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결코 수면 위로 나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있다고만 추정할 뿐이었다. 하지만 분명 그들은 대명제국의 천하에 위험이 되는 자들이다.
그래서 주가율은 환생 대법을 실행하기 전, 혈교와 관련 없는 황족을 양자로 들여 황태자로 책봉하고 강호 무림에 혈교의 존재를 은밀히 알려 혈교에 대비할 수 있는 조직을 구축했었다.
대명제국을 위해서였기도 했지만, 노야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미래로 환생했더니 대명제국이 멸망하고 혈교천하가 되어있다면, 모처럼 환생한 보람이 없을 테니까.
노야와 함께하는 미래를 위해서라도 혈교는 사라져야 할 존재였다.
정작 과거로 돌아온 지금, 그녀가 만들어둔 안배는 사라졌지만.
대신 그들의 수작 역시 원래대로 돌아왔을 터.
‘오라비라는 작자 둘 중 하나는 혈교의 끄나풀이겠지.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전생에 혈교가 준동하지 못하고 암중에서만 숨어 지냈던 건, 노야께서 황궁을 장악하려는 그들의 음모를 미리 분쇄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주가율은 이제 알았다.
‘노야. 나의 노야. 짐을 위해서 혈교를 처리하다니······. 역시 짐한테는 오직 노야뿐입니다.’
노야.
이철수의 모습을 떠올리자 가파르게 뛰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철수야말로 유일한 가족이었다.
부모는 그녀를 버렸다. 이복형제인 오라비들은 그녀를 가족이라 여기지도 않았다.
오직 이철수.
노야만이 그녀를 가족으로 여겨주었다. 마음을 열지 않고 철없이 굴던 그녀를 돌봐주었다.
그녀를 황제로 만든 것도 그분이었다. 곁에 계속 있어준 것도 그분이었다.
그러니 어찌······.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어찌 그분을 마음에 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주가율에게 있어 사랑이란 곧 이철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철수야말로 그녀의 전부였다. 하찮은 사랑의 밀어 따위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였다.
그분이 없는 천하는 의미가 없었다. 숨 쉴 수 없었다. 그래서 환생 대법을 실행했다.
그분이 있는 천하여야만 했다. 그분이 있어야만 숨 쉴 수 있었고, 심장이 뛸 수 있었다. 살아갈 수 있었다. 그분이 필요했다.
두근, 두근.
그분을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심장이 뛰었다. 얼굴이 붉어졌다. 호흡이 가빠졌다. 노야와 같은 하늘 아래, 같은 공기를 숨쉬고 있다. 그 사실이 주가율은 너무나 기쁘고 설렜다.
“혈교는 제국의 국적(國賊). 그들에 대한 동향과 그들과 손을 잡은 역적 도당이 누가 있는지······. 앞으로 주시하도록 하세요.”
“명을 받듭니다.”
장인태감이 고개를 조아렸다.
주가율이 고개를 돌렸다. 맑은 하늘에 떠오른 태양빛을 받은 중해 호수 수면이 거울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노야께서는 유독 이 정자를 좋아하셨다. 그것이 주가율이 회귀한 지금도 계속 이곳을 찾는 이유였다. 여기에 오면, 그분은 없지만 그분의 체취가 그대로 느껴지는 기분이었으니까.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이러면 안 되는 건 알지만, 그분이 너무 사무치게 보고 싶다.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지며 주가율의 감정이 폭주하던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한 줄기 빛 같은 발상이 떠올랐다.
“장인태감.”
“말씀하소서.”
“내년 용봉지회는 소림에서 열린다지요?”
“그렇습니다.”
장인태감의 말을 들은 주가율이 웃었다.
“그렇군요. 그럼 오랜만에 소림사에 불공을 드리러 가야겠습니다. 혈교의 일에는 어느 정도, 강호 무림의 협조도 필요하니까요.”
“명을 받들겠나이다.”
장인태감의 말을 들으면서 주가율은 웃었다.
앞으로 1년.
그녀의 전부나 다름없는 노야를 만나기까지의 시간이다.
‘노야. 조금만 기다리세요. 짐이 곧 가겠습니다.’
반짝이는 중해 호수 물결 위, 노야와 함께했던 전생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주가율은 웃었다.
중남해에서 있었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