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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 환관이 남성을 되찾음-99화 (99/171)

99화 검후비동(劍后秘洞)

지금으로부터 300년도 훨씬 전.

원말명초의 혼란기.

혈세신마가 남해 검각을 불태울 때, 간신히 살아남은 백추설은 검각의 남은 생존자들을 이끌고 강남에서 장강을 넘어 북쪽으로 도피해 산서에 터를 잡고 항산에 새로운 검각, 항산파를 세운다.

이후 항산파의 초대 장문인이 된 백추설은 공동파의 혼원검제 무극자가 세운 무림맹에 합류, 혈교와의 전쟁에서 무극자의 전우로 활약하며 무수한 혈교도를 베어 넘겼다.

혈세신마의 목이 떨어진 파양호 대전에도 참전했던 백추설은 대전 이후 명나라가 건국되고 혈교가 멸문당하자 항산파 장문인과 검후 자리를 제자에게 물려주고 실전된 항산파의 항마절학과 잃어버린 신물 심향검을 찾아 천하를 떠돌다 실종되었다.

이것이 지금 시점까지 강호 무림에 전해지는 이십대 검후의 비사였다.

하지만 나는 이 이면의 이야기를 미래에 밝혀진 정보를 통해 알고 있었다.

‘백추설은 항마절학과 심향검을 찾아냈다.’

천하를 떠돌던 백추설은 남해 검각의 전대 고수가 남긴 비동을 찾아 항마절학을 수습하고, 해남도까지 흘러 들어간 심향검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 소식을 들은 혈교의 잔당이 백추설을 추격했다. 항마절학은 혈기를 다루는 혈교의 절학에 치명적이었기 때문이다. 백추설은 혈투 끝에 혈교의 잔당을 대부분 처단했다. 하지만 본인도 그 과정에서 큰 상처를 입어 시한부가 되었다.

이후 항산으로 가까스로 돌아온 백추설은 비동을 만들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녀는 혈교의 위협이 실존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혈교의 세작을 경계한 그녀는 본인의 죽음을 외부로 알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항마절학을 항산파에 전해줘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월녀검을 펼치지 않으면 입구를 열 수 없는 기관장치를 비동 입구에 설치했다.

‘하지만 미래에 이 비동을 연 놈들은······. 마교였지.’

지금 시점에서 8~9년 정도 뒤의 미래에 백추설이 설치한 기관장치는 뚫렸다.

기관장치를 파괴한 건 마교였다.

비동을 먼저 다녀간 마교는 항마절학을 불태우고, 영약 일부를 탈취하고 심향검을 토막내어 항마의 힘을 흩뜨린 뒤, 기관장치와 진법을 추가 설치하고는 장보도를 제작해 강호에 퍼뜨렸다.

장보도 유출이 바로 지금 시점으로부터 10년 뒤에 벌어졌던 일이었다.

장보도가 퍼지자 당연히 강호 무림 전역에서 기연을 노리는 무림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항산파 당대 검후, 은설란은 그들을 제어하려고 했지만, 기연 앞에서는 부모도 몰라보는 무림인들을 제어하는 건 불가능했다.

항산파가 얻은 건 비동 진입 순위를 일 순위로 하는 것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사파 고수들이 약조를 어기고 먼저 비동에 진입하면서 깨졌다.

결국 무협소설에서 나오는 흔한 장보도 스토리 클리셰대로 비동 내부에서 무림인들 사이의 끔찍한 살육전, 아니 혈겁이 벌어졌다.

검후와 소검후는 그 난장판에서 항산파 정예의 희생으로 결국 최종 승리를 얻어냈다. 하지만 그녀들이 얻은 거라고는 반으로 부러져 항마의 힘을 잃은 심향검과 영약 일부뿐이었다.

‘마교에서 처음부터 함정으로 설계한 거지. 정사를 상잔하기 위한 계책으로.’

마교 놈들이 저지른 짓이라는 건, 장보도의 출처를 동창에서 역추적하다 알게 된 사실이었다.

아마 중원 무림의 전력을 상잔시켜 약화시키려는 술책이었으리라.

어쨌거나, 동창에서 역추적한 마교가 비동에 침입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8~9년 뒤다.

일이 벌어지기 한참 전인 지금은 이 비동이 깨끗하기 그지없을 거라는 소리다.

그러니 내가 비동을 찾고, 항마절학과 심향검, 그리고 영약을 돌려줘서 항산파의 은인이 되어야 했다.

검후를 내 여자로 만드려면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지금의 항산파에는 나에 대한 불만이 팽배한 상황이다. 하지만 내가 사문의 은인이 된다면?

내가 검후를 내 여자로 만든다는데 그 누구도 감히 불만을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그 소검후마저도 말이다.

‘좋아.’

흐흐흐.

나는 속으로 상남자의 웃음을 지으면서, 미래에 장성한 내 품에 안겨서 얼굴을 붉히며 가가라고 속삭일 검후를 떠올리며 경공을 펼쳤다.

위치를 까먹을 이유는 없었다.

검후비동 장보도 사건은 미래 강호 무림을 뒤흔든 일대사건.

그 정도 중요한 사건을, 강호 무림 견제가 주요 업무였던 동창의 수장인 내가 잊어버릴 리가 없었다.

그 사건이 벌어진 위치도 말이다.

108개의 봉우리가 있다고 전해지는, 산세가 험악하고 절벽이 즐비한 항산의 달밤 아래.

몇 개의 고개와 몇 개의 절벽을 넘었을까.

나는 마침내 장보도에 기록된 비동 입구에 도착했다.

그렇게 도착한 비동 입구는······.

“뭐야?”

이미 기관장치가 파괴되어 있었다. 뻥 뚫린 비동 입구가 내 앞에서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뭐지?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순간 멈칫했다가, 손을 뻗어 입구 근처 부서진 기관장치를 만지며 달빛에 비춰 면밀히 살폈다.

‘기관장치가 부서진 상태로 볼 때 침입자가 비동 내부로 들어간 시각은 지금으로부터 30분~1시간 정도 전이로군.’

아직 입구가 오염이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내력의 흔적이 생생히 부서진 기관장치에 남아 있었다.

부순지 얼마 안 된 상황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검후비동이 마교에 의해 열리는 건, 아무리 빨라도 지금으로부터 최소 8년 뒤다. 그런데 지금 열렸다고?’

결론을 내린 나는 비동에 들어가기에 앞서 잠깐 고민에 빠졌다.

내 행적에 따른 나비효과 때문에 마교가 자극받아 일찍 비동을 열었다?

‘이건 말이 안 돼.’

정사지쟁이 제법 큰 이벤트이긴 했지만, 마교를 움직일 정도의 나비효과는 아니었다.

정사지쟁으로 바뀐 역사라고 해봤자 공동파의 부상이 빨라졌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니 손을 써도 공동파에 쓰는 쪽이 합리적이다.

검후비동을 여는 것이 아니라.

게다가 지금은 검후비동이 열렸으리라 추정되는 시기부터 8년이나 전. 마교가 검후비동의 위치 정보를 손에 넣고 8년이나 존버한 뒤에 열었다?

이렇게 정사 무림을 교란하기 좋은 카드를 가지고? 그것도 하필 다른 때도 아니고 경계와 보안이 삼엄해지는 경연 날을 골라서?

내가 마교라면 작업을 해도 경연 기간은 피할 것이며, 정보를 입수한 즉시 계획을 세워 1년 안에 움직일 것이다.

그 전에 항산파가 비동을 찾아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니 말이다.

8년 존버는 말이 안 된다.

동창에서 역추적한 지금으로부터 8년 뒤에 비동이 열렸을 거라는 정보가 거짓이다.

그렇다는 말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오염시켰군.’

회귀 전, 전생에서도 사실 이 시기에 검후비동이 열렸다.

그 이후 역정보를 흘려 정보를 교란시켰다.

감히 다른 정보기관도 아니고 동창의 이목을 속일 정도의 역정보 공작이라니.

있을 수 없다. 동창은 하오문, 개방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예산과 첩보망을 지닌 중원제일정보기관이다.

하지만 내 눈앞에 그 기만의 결과물이 떡하니 있는 이상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역정보 공작의 목적을 생각해야 했다.

이렇게까지 공들여 정보를 교란할 이유. 놈들이 얻는 목적이 무엇일까? 단순한 8년의 유예?

‘아니야.’

마교 내부에 분란이 있어서, 시선을 외부로 돌리려 저지른 짓은 아니다. 지금이나 8년 후나 마교는 천마 백무량의 철권 통치 아래 단결되어 있다. 내분 따위는 없었다.

다른 모든 정보를 통틀어도 마교가 8년을 숨길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진범이 따로 있고, 마교를 범인으로 만들기 위해 역정보 공작을 흘린 것이로군.’

결론은 하나뿐이다.

진범이 존재한다.

실제로 장보도 출처가 마교라는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강호 무림 전역에 퍼졌다. 장보도 사건으로 큰 피해를 입은 정파 무림은 당연히 격분했고, 마교와의 긴장 상태가 높아졌었다.

정사마 사이의 긴장도가 유례 없이 높아졌으니, 2차 정마대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보고서가 내 책상 위에 올라왔을 정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정사마를 상잔시키려는 진범의 계책이었다면?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군.’

모든 정황 증거와 단서가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 시점에서 정사마를 상잔시키려는 진범.

흑막.

그럴 가능성이라도 있는 세력은 단 한 군데밖에 없었다.

‘혈교. 정말로 아직 살아있었던 건가?’

혼원검제가 경고한 역천의 흉성.

혈교뿐이다.

혈교의 존재는 이미 혼원비동에서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1회차에서 혼원비동을 무너뜨린 흑막이 그들이라 나는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눈앞에서 놈들의 흔적을 찾아낼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 새끼들이 감히, 내 영웅호색 십년대계를 방해해?’

항산파의 절학과 신물을 되찾아 은인이 된 뒤에 장차 검후를 내 여자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계획이 무너지고 있었다.

고작 혈교 놈들 따위에게.

내 주지육림이, 품에 안겨 나를 가가라고 부르며 교태를 부리는 검후의 모습이.

이대로면 전부 한여름 밤의 꿈으로 끝나버린다. 사라져버린다.

영웅호과 삼처사첩의 꿈도, 주지육림과 운우지락의 미래도 전부.

혈교 새끼들, 감히 내 운우지락을 방해해? 절대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혼자 비동에 들어갈 수도 없지.’

하지만 냉철한 이성이 발목을 잡았다.

비동에 들어간 상대가 얼마나 고수일지는 나도 모르지만, 최소 무위를 추측하는 건 가능했다.

동창에서 이 정도 공작은 최소 절정 이상의 고수에게만 맡긴다.

혈교도 다르지 않을 터.

그러니 저 아래 있는 놈은 최소한 절정, 재수 없으면 초절정일지도 몰랐다.

당연히 일류따리인 내 일신의 무력으로는 상대가 안 됐다.

“혼자서는 안 돼. 지원이 필요해.”

나는 동굴 앞에서 중얼거렸다.

지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항산파에 알리기는 좀 그렇다. 역시 공동파의 전술 핵무기인 사형을 데리고 와야······.

내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진 그때.

“······이 공자님. 이곳은······. 도대체, 어떤······.”

내 귓가에,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렸다.

찬란한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신비로운 은빛 머리카락.

보름달을 닮은 은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차가운 인상의 20대처럼 보이는 미녀.

검후 은설란이었다.

빼꼼.

그녀가 나무 뒤에서 하얀 얼굴을 살짝 내밀어 나를 힐끗힐끗 엿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은설란의 은빛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아니. 검후가 왜 여기서 나와?’

그녀의 등장을 본 나는 내심 당황했지만, 내색하지는 않고 무표정을 유지했다.

북경 조정에서 정치질을 하면서 이것보다 더한 돌발 상황도 겪었던 나였다. 돌발 상황에서 당황하는 건 오히려 하책이다.

침착한 마음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나아가 돌발 상황을 내게 유리한 변수로 편입하는 것이야말로 최상책이었다.

검후가 왜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녀야말로 최고의 조력자였다. 화경의 절대고수였다.

저 아래 있는 혈교 놈의 경지가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겠지만, 혈세신마 본인이 오는 게 아닌 이상 충분히 감당 가능했다.

문제는 정황상 검후가 지금까지 날 미행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 대체 검후가 야밤에 왜 내 뒤를 밟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저 수상한 비동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리던 모습도 봤을 터.

그 모습에 대한 해명, 아니 그럴싸한 변명이 필요했다.

나는 머리를 굴리다가, 마침내 그럴듯한 변명을 떠올렸다.

내 시선이 검후의 은빛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좋아.

이대로라면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이거라면 비동도 공략하고 항산파의 은인도 되고 검후의 마음도 얻을 수 있다.

아주 상황이 좋다.

흐흐흐.

내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나는 검후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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