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그녀들의 동맹
천소빈은 허리를 숙여 인사하면서 속으로 움찔했다.
‘공동파 장문제자 유진휘가 천고일재(千古一才)라더니, 과연 그 소문이 틀리지 않았구나.’
공동신협 유진휘.
일 년 전 정사지쟁에서 사파제일 후기지수 흑사룡 위소련을 꺾은 유진휘의 신위는 이미 천하에 모르는 이가 없었다.
더불어 그가 천무지체라는 사실도 이미 강호 무림에 널리 알려진 상황이었다.
세간에는 그가 복마검법을 복원했다는 풍문까지 돌고 있었다.
천무지체.
일대기재조차 둔재처럼 보이게 하는 압도적인 재능의 보유자.
하지만 유진휘는 역대 천무지체 중에서도 그 재능이 특출나다고 평가되고 있었다.
오죽하면 천 년에 한 번 나올 기재라며 천고일재라 불리겠는가?
과연 그 말대로, 유진휘는 그녀가 전력을 다해 기척을 감췄는데도, 유진휘는 촌각조차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만에 그녀의 은신을 간파했다.
아무리 유진휘가 절정 이상의 고수로 추측된다지만, 일류인 그녀의 은신을 단번에 간파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태어날 때부터 기감이 개방됐다는 천무지체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했다.
‘······재능이 무시무시하구나.’
거기에 달빛에 비치는 얼굴은 또 어떻고.
송옥과 반안의 재림이라는 세인들의 평은 오히려 과소평가다. 나름 미인이라 자부하던 소검후 본인의 미모조차 유진휘에 비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에 불과할 정도.
소검후가 입술을 깨물었다.
“천 소저께서 야밤중에 여기는 무슨 일로 왔소. 설마 사제를 찾아온 건······.”
유진휘의 고운 목소리가 후원을 울렸다.
유진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의 시선이 천소빈을 향했다.
유진휘 역시 오늘 비무 직전 했던 천소빈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은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모든 순간을 전부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늘이 내린 재능을 지닌 그녀에게 망각(忘却)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사제와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와 함께 지냈던 모든 순간을 그녀는 머릿속에서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야. 사제한테 손수건도······.’
유진휘의 머릿속에 오늘 일이 떠올랐다.
그녀가 손을 부르르 떨었다.
사제에게 손수건을 받은 건 오직 그녀뿐이다.
무너지던 비동에서, 혼원검제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울던 그녀에게 사제가 건넸던 손수건을 유진휘는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천소빈도 손수건을 받은 것이다.
그 사실을 유진휘는 참을 수 없었다.
거기에다 천소빈이 했던 ‘어젯밤’이라는 단어도 유진휘의 뇌리에 선명했다.
그녀가 했던 말 전부를 유진휘는 기억하고 있었다.
어젯밤을 언급했다는 건, 그녀가 사제를 만나러 왔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기감을 제한한 게 실수였어.’
그녀의 기감은 뛰어나다. 하지만 지나치게 예민한 기감은 일상생활에 장애가 된다. 과한 정보가 뇌리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들기 전에는 기감을 둔화시켜 놓는다. 특히 여기는 구파일방의 일좌를 차지하는 대문파 항산파의 본산. 길가에 노숙할 때처럼 기감을 항상 예민하게 해둘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어제 그렇게 잠들었는데.
그 사이에 불여우 같은 소검후가 사제의 방에 숨어들었을 줄이야.
‘내가 방심한 탓이야.’
방심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일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유진휘는 그렇게 생각하며 차가운 눈길로 소검후 천소빈을 응시했다.
“이 공자님을 찾아온 건 아닙니다.”
소검후는 유진휘의 말을 부정했다.
사뿐.
그녀가 미끄러지듯 유려한 발걸음으로 정자 위에 올라왔다.
월녀지무의 묘리를 응용한 발걸음이었다.
“제가 찾은 건 유 공자님을 포함한 공동파의 여러분입니다.”
“무슨 의도입니까?”
소검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하린이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섬뜩할 정도로 텅 비어있는, 초점 없는 서하린의 벽안과 마주한 소검후가 살짝 떨었다.
그녀가 찻잔을 만지면서 말했다.
“······본 파와 귀 파는 사이가 썩 좋지 않습니다. 거기다······. 풍문에 따르면 서문 소저가 이 공자님을 사모한다 들었습니다.”
“아, 아니거든요?! 이봐요. 천 소저. 다, 당신도 저를 잘 알면서 무슨 망발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문청하가 반발했다.
달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치 숨겨왔던 감정을 들킨 것처럼 반응하는 서문청하를 보며 천소빈은 웃었다.
그녀 말대로 서문청하와 그녀는 지인 관계였다.
이 년 전 용봉지회에서 만나 교분을 나눴으니까.
그래서 더 확신했다.
지금의 서문청하는 강호의 소문처럼 이 공자를 사모하고 있다.
천소빈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를 필요 이상으로 경계하는 걸 보면, 서 소저도 그 색마를 사모하고 있을 확률이 높아요.’
그녀의 시선이 서하린에게 향했다.
무표정한 얼굴, 텅 빈 눈동자 때문에 감정을 읽기 어려운 서하린이다. 하지만 그녀를 경계하는 말 내부에서 천소빈은 질투를 읽어냈다.
하필 이철수를 제외한 유진휘, 서하린, 서문청하가 모여 있는 지금 상황도 수상했다.
유진휘는 사내기는 했지만, 유난히 사제인 이철수를 아꼈으니. 사제의 혼인은 중대 사항이라 생각해서 이 자리에 있는 거겠지.
천소빈은 그렇게 생각했다.
‘대체 어떻게 두 소저의 마음을 홀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천소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서하린.
색목인 혼혈인 그녀의 미모는 차기 정파제일미로 점쳐질 만큼 압도적이었다.
분하지만 천소빈 본인보다 더 아름답다 생각될 정도.
거기에 검봉 서문청하는 또 어떤가?
용봉지회에서 사룡오봉의 일좌로 꼽힐 정도의 기재에다 서문세가의 금지옥엽이지 않나.
그런 대단한 그녀들이 어째서 이철수 같은 색마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 건지.
‘대체 그 남자가 뭐가 좋다고.’
뭐.
실제로 만난 이철수는 소문과 제법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다.
색마 주제에 미소녀인 그녀와의 합방을 거부하기도 했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달래주기 위해 손수건을 건네기도 했다.
그래도 천소빈은 이철수를 아직은 완전히 믿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철수를 연모하는 모습을 연기해야 할 때였다.
그녀들을 바라본 천소빈이 말했다.
“그래서. 이 공자님을 연모하는 두 분 소저께 제안을 하나 드리러 왔어요.”
천소빈이 가슴 위에 다소곳하게 손을 올렸다.
“두 분 소저께서는 사부님을 경계하겠죠. 사부님과 이 공자님께서 혼인한다면······. 두 분의 차례는 돌아오지 않거나, 공자님과 혼인하더라도 첩실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테니 말이죠.”
천소빈의 말에 서하린이 움찔하고 서문청하가 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무, 무슨?! 그, 그런 생각 같은 건 해본 적 없거든요?!”
서문청하가 부정했지만, 천소빈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저와 두 소저 사이에는 공통되는 목표가 있어요. 그건 사부님과 이 공자님의 혼인을 막아야 한다는 거예요.”
천소빈의 눈동자가 빛났다.
“저 또한 두 분처럼 이 공자님을 연모하고 있어요. 하지만 사부님께서 이 공자님과 혼인하게 된다면······. 저는 이 공자님과 영영 이어지지 못하겠죠.”
천소빈이 시무룩한 표정을 연기했다.
“사부님을 존경하기는 하지만······. 그분께서는 어떤 사내도 마음에 두지 않는 분. 이 공자님의 혼인 생활은 불행해질 게 분명해요. 소녀는 이 공자님과 사부님이 마음에도 없는 혼인을 하는 건 두고 볼 수 없어요. 그러니 두 분 모두 저와 손을 잡는 건 어때요?”
천소빈이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모습을 본 서문청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천소빈이 서문청하의 연심을 간파한 것과 마찬가지로, 서문청하 역시 그녀의 연심이 거짓인 걸 간파했다.
서로 교분을 나눈 사이였다.
그 정도도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지 않았다.
소검후에게는 연심의 두근거림이 없었다.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바보가 따로 없군요. 하긴. 저 정도로 티가 나니까 그 바보 같은 이 공자도 거짓 고백이라고 바로 눈치 챘겠죠!’
서문청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심도 없는 상대가 동맹을 제안하다니.
아무리 친한 사이라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있는 법이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은 서문청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흥. 천 소저. 지금 그게 무슨 소리죠? 어차피 당신은 이 공자님을 딱히 진짜로 연모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거짓말하지······.”
“잠깐만요. 서문 소저. 진정하십시오.”
그런 서문청하의 말허리를 자른 건 서하린이었다.
그녀의 침착한 걸 넘어 감정이 담기지 않은, 고저 없는 목소리와 텅 빈 눈동자를 본 서문청하가 입을 닫았다.
서하린과 지낸 지도 꽤 됐지만, 여전히 저 감정 없는 얼굴에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천 소저.”
“말씀하세요.”
서하린의 눈동자가 천소빈을 향했다.
그녀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천 소저가 이 사형을 좋아하는지, 아닌지. 그 진실에 대해서는 별 관심 없습니다.”
서하린의 눈동자가 천소빈을 훑었다.
싸늘한 시선에 천소빈의 몸이 살짝 떨렸다.
감정이 무딘 그녀였다.
그렇기 때문에 역으로 타인의 감정에 서하린은 민감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천소빈의 연심은 진심이 아니다.
‘그래도 상관없어. 오히려 그쪽이 더 좋아.’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소검후는 검후의 하나뿐인 제자. 안 그래도 어제 대연무장에서 검후에게 향하는 고백을 들었던 그녀였다.
검후를 견제할 수단이 필요했던 참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소검후 천소빈이 먼저 동맹 제안을 한 것이다.
수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연심이 없는 쪽이 오히려 낫다. 오히려 진심이면 곤란했다. 검후를 상대하는데도 벅찬데, 전선을 이 이상 늘릴 수는 없는 일이니까.
‘검후 님한테서 이 사형을 떼놓으려고 거짓 고백을 했다가, 이번 비무로 실패하고는 우리한테 접근했겠지.’
서하린의 영민한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전후사정을 전부 유추한 서하린의 푸른 눈동자에 소검후의 모습이 담겼다.
‘속이 뻔히 보이는 상대. 이용하기 좋아.’
판단을 끝낸 서하린이 말했다.
“천 소저 말대로 당신과 우리는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합니다. 그러니 손을 잡겠습니다.”
서하린의 고저 없는 목소리에 천소빈이 잠깐 멈칫했다.
왠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대안이 없었다.
이철수를 그녀의 품에 안으려면, 주변인들의 도움이 필요했으니까.
“좋아요!”
소검후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서하린에게 답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서하린이 어색하게 웃었다.
이철수가 밤산책을 가장한 비동 탐색 중일 때, 항산파 본산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
달빛이 밝은 밤.
나는 빠르게 몸을 날려 항산의 절벽 사이를 헤집었다.
‘이쯤에 있었는데.’
검후비동.
검각의 마지막 장문인이자 항산파의 초대 장문인인 이십대 검후 백추설의 무덤.
나는 머릿속에 입력된 검후비동의 위치를 떠올리며 밤의 항산을 떠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