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야밤의 외출
소검후의 대답에 은설란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의 손이 살짝 떨렸다.
‘소빈아, 네가, 네가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냐······.’
검후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제자에게 따지는 말을 꾸욱 눌러 참았다.
검후는 사사로이는 천소빈의 사부요, 공적으로는 항산파의 장문인이었다.
체통을 생각해서라도, 제자를 원망하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녀의 입 안에 쓴맛이 감돌았다.
“······.”
천소빈은 아무 말 없이 사부님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의 품 안에는 이철수가 건넸던 손수건이 아직 있었다.
오랫동안 사부와 함께했던 그녀였다. 지금 사부님의 심정이 어떤지 모를 리 없었다.
‘죄송해요. 사부님. 하지만 제자는 물러설 수 없어요.’
비무에서는 패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철수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건 그의 마음을 돌려서 사부님 대신 그녀를 보게 만들어야 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뭐든 해야 했다.
그래야 모두를, 사부님을 구할 수 있었다.
“소빈아. 너는 이 공자의 어떤 면이 좋아서······. 언제부터 그렇게 연심을 품게 되었던 것이더냐?”
검후의 시선이 천소빈을 향했다.
천소빈이 검후를 잘 아는 것처럼, 검후 역시 그녀의 제자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10년을 넘게 동고동락한 사이였다. 직접 무공을 가르치는 건 물론, 미래 항산파의 장문인으로서 필요한 교육까지 했다.
검후는 천소빈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알았다.
그래서 의문이었다.
대연무장에서 갑자기 고백했을 때야 당황스러워서 제대로 생각을 못 했지만, 머리를 식힌 지금은 달랐다.
‘소빈이는 이 공자를 좋아하는 눈치가 아니었어.’
천소빈뿐만이 아니었다.
항산파 제자 중에서 이철수를 좋아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리고 천소빈은 그 정도가 유독 심해서, 매일 같이 그녀 곁에서 이철수의 흠을 귓가에 속삭이며 흉보기에 바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좋아한다니?
아무리 인심난측(人心難測)이라지만, 사람 마음이 불호에서 호감으로 하루 만에 바뀐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었다.
뭔가가 있었다.
‘상공께서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소빈이의 체면을 지켜주기 위해 거짓으로 연심을 고백했다 하신 거겠지.’
이철수의 말이 검후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거짓으로 연심을 고백했다.
그 말은 단순히 상황을 모면하려고 내뱉은 말이 아니라, 천소빈의 진심을 꿰뚫고 있다.
검후는 그렇게 생각했다.
문제는 그 진심이 무엇이냐는 거였다.
이미 비무에 패배했는데도 저렇게 고집스러울 정도로 연심을 가장하는 제자의 본의를 검후는 알고 싶었다.
“그건······.”
천소빈이 헛바람을 삼켰다.
의외의 부분에서 의표를 찔린 탓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게 이 공자의 흉을 보던 네가 갑자기 오늘 이 공자를 좋아한다니······. 이 사부는 믿기 힘들구나. 혹, 이 공자의 말처럼 진심은 따로 있는 게 아니냐?”
검후의 시선이 천소빈을 향했다.
천소빈이 진심으로 이철수를 연모한다. 그런 사실을 검후는 믿고 싶지 않았다.
아니 믿기 싫었다.
딸처럼 아끼는, 장차 항산파를 물려받을 소중한 제자 천소빈이었다.
그런 제자와 인생을 바쳐 사랑하는 상공.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잔인한 상황에 놓이기 싫었다.
제자를 추하게 질투하고 싶지 않았다.
검후와 시선을 마주한 천소빈이 눈동자를 굴렸다.
‘진심이라니······.’
진심이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정파 무림에서 손꼽히는 미인인 그녀가 몸을 바치겠다 해도 거절했던 이철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늘,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한 고백을 거절했던 이철수의 모습도 떠올랐다.이철수의 거절 이유는 한결같았다.
진심이 아니다.
그러니 받아주지 않겠다.
그가 한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진정 정을 통하는 자와만 잠자리를 함께한다. 하지만 너는 진심이 아니니······.
천소빈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색마 주제에······! 어울리지 않게 정을 찾다니······!’
분했다.
대체 어디가 부족하길래? 물론 미모는 사부님보다 조금 못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어렸다. 이철수와 또래였다. 사부님처럼 나이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장차 항산파를 물려받을 장문제자이자 정파 무림의 동량지재였다. 본가는 또 어떤가?
산서제일상단인 천일상단이 그녀의 본가였다. 산서제일은 물론 중원 전체를 통틀어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부호의 딸이라는 말이었다.
무공과 부, 명예. 모든 걸 가진 완벽한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스스로 모든 걸 바친다고 선언했는데도 그는 외면했다.
고작 마음 때문에.
분하고 원통했다.
“그의 어디가 좋은지 말하지 못한다면, 네 진심은 따로 있는 걸로 알겠다. 진심이 뭔지 말해보렴. 나는 네 사부니까. 소빈아.”
검후의 말이 소검후의 귓가를 울렸다.
진심을 말하라니.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 사부와 사문의 치부다. 무덤까지 가져가야 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 설사 그 상대가 당사자라도.
이철수의 어디가 좋냐니. 그 색마에게 장점이 있을 리 없지만, 지금은 지어서라도 말해야 했다.
소검후는 빠르게 머릿속으로 지금까지 수집한 이철수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제자는······. 이 공자님의 다정함이 좋습니다. 세간에는······. 망나니라 알려져 있었고 제자 또한 한때 그러한 풍문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난 이 공자님은······. 상대의 마음을 중시하였습니다. 소문처럼 여색을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 공자님을 마음에 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자의 진심입니다.”
천소빈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녀를 검후가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상공의 말처럼. 소빈이는 상공을 진심으로 연모하고 있지 않구나.’
누구보다 상공을 사랑하는 그녀였기에 알 수 있었다.
누구보다 천소빈을 아끼는 그녀였기에 알 수 있었다.
천소빈의 눈빛에는 진심이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중인 것이더냐.’
하지만 그녀가 이렇게까지 진심을 말하기를 거부하는 이상, 그녀로서 더 강제할 방법은 없었다.
검후는 입술을 깨물면서 천소빈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알겠다. 이만 나가보거라.”
“알겠습니다. 사부님.”
드르륵, 탁.
문이 닫히고 천소빈의 기척이 멀어졌다.
그 모습을 보던 검후가 한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
항산파 본산.
접객당 별채 후원.
기화요초(琪花瑤草)와 기암괴석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후원 연못 근처에는 정자가 하나 있었다.
달빛이 내려앉은 정자 내부에는 일남이녀가 모여 있었다.
투명한 백금발이 인상적인 벽안 미소녀, 서하린.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은 흑발 미소녀, 서문청하.
마지막으로 이 자리에 모인 두 미소녀보다 더 아름다운 얼굴을 자랑하는 남장여자 유진휘였다.
세 사람 앞에는 간단한 다과상이 차려져 있었다.
명목상 시비 역할인 서문청하가 직접 만든 다과였다.
“오늘 경연 자리에서 이 사형의 발언은 다들 들었으리라 믿습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서하린이었다.
그녀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두 사람을 눈에 담았다.
“흥. 그, 파, 파렴치한 발언 말이죠? 세상에 어떻게 검후 선배한테 그런 뻔뻔한 망언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가, 감히 이 검봉 서문청하를 시비로 거둔 주제에 말이죠!”
서하린의 말에 서문청하가 답했다.
그녀가 말끝을 흐리면서 입술을 삐죽였다.
정파제일미녀 검후 은설란.
그녀의 미모에는 감숙제일미라 불리는 서문청하라도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철수는 검후를 향해 꾸준히 그의 욕망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대로 정말 성년이 되어 이철수가 검후를 이긴다면.
그렇다면······.
서문청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제, 제가 왜 그런 걱정을 하는 거죠?!’
그래.
그건 그녀가 알 바 아니다.
‘흐, 흥. 차라리 잘 된 일이죠. 이철수가 검후 선배와 결혼한다면 저는 더 이상 전속 시비 역할을 그만둬도······.’
분명.
잘 된 일일 터인데.
하지만 그래도······. 뭔가 마음속이 허전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심정에 서문청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서문청하를 바라보면서 서하린이 무심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심지어 소검후도 이 사형께 연심을 고백했습니다.”
서하린의 푸른 눈동자가 무섭도록 공허하게 변했다.
‘갈수록 연적이 늘어가고 있어.’
검후만으로도 벅찼건만.
이제는 소검후까지······.
서하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사매로서 지금까지 사형과 가장 가까이 있다 자부했던 서하린이었다.
‘단순히 가까이만 있어서는 안 돼. 조금 더 과감하게 나가지 않으면.’
후루룩.
서하린이 녹차를 마시면서 생각했다.
“······사제는 인기가 많구나.”
유진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사제를 위해 사형으로 살 거라 다짐한 유진휘였다.
불완전한 몸이기에 여인으로서 안길 수 없다 생각한 그녀였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사제의 주변에 여인이 늘면 늘수록, 참을 수 없는 검은 감정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꿈틀거렸다.
나도 여인으로서, 사제의 품에 안기고 싶다는 마음이 계속해서 커져갔다.
아직은 이성을 통해 억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 터져버릴지 모른다.
그런 불안감이 유진휘를 휘감은 그때.
그녀의 기감에 수상한 기척이 걸려들었다.
유진휘의 시선이 수풀 쪽을 향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르릉.
유진휘가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았다.
“누구냐. 정체를 드러내라.”
유진휘의 말이 끝난 순간.
부스럭.
수풀이 들썩이며 정체불명의 인영이 솟아올랐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흑발 사이에 섞인 은빛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미소녀.
소검후 천소빈이 거기 있었다.
“······천 소저?”
침입자의 정체를 알아차린 유진휘의 눈동자에 의문의 빛이 깃든 그때.
“기척도 없이 야밤에 불쑥 찾아뵙게 되어 죄송해요. 공동파 여러분.”
천소빈이 다소곳한 태도로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보던 세 소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
같은 시각.
‘오늘따라 잠이 오질 않네요.’
낮의 소검후와의 대담 때문에 심란해진 검후는 침상에서 잠을 뒤척이다 벌떡 일어났다.
그녀와의 대담에서 의문 대부분은 풀렸다.
하지만 어젯밤, 그래. 어젯밤을 왜 언급한 건지, 그 의문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대체 왜 어젯밤을 언급했던 걸까.
상공과의 사이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설마 소빈, 그 아이가 상공의 처소에 숨어든 건······.’
있을 수 없는 가능성.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젯밤이라는 단어를 언급했을 리 없다.
그녀가 진심이건 아니건, 과년한 처녀가 야밤에 사내의 처소에 숨어드는 건 세상의 법도를 어지럽히는 일.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설마 오늘 밤에도······. 그런 일이 벌어지게 둘 수는 없어.’
검후는 벌떡 일어섰다.
소검후를 감시해야 했다. 상공의 처소로 가야 했다.
과년한 처녀가 외간 남자의 처소에 드나드는 건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검후 그녀는 괜찮았다.
‘왜냐하면 소, 소첩은 상공의 아내니까요······.’
어차피 미래에 백년가약을 약속한 몸이다.
처소에 잠깐 들러 얼굴을 보는 것 정도는 괜찮았다.
‘그래. 이건 제자의 불온한 행동을 감시하는 거야. 겨, 결코 상공의 자는 모습을 보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검후는 그렇게 스스로 합리화하며 침상을 박차고 일어나 기척을 숨긴 채 월은각을 떠났다.
화경의 고수인 검후였다.
그녀가 작정하고 기척을 숨기고 잠행을 선택한 순간, 항산파 내부에서 그녀의 기척을 감지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은밀하게 본산을 가로질러 도착한, 상공이 머무르는 항산파 별채 개인실.
창살 너머로 검후는 상공의 모습을 확인했다.
처소 안에는······.
밖에 나가려는 듯 주섬주섬 봇짐을 챙기고 옷을 갈아입는 상공의 모습이 있었다.
‘꺄아······.’
검후의 얼굴이 붉어졌다. 달빛에 비치는 탄탄한 상공의 근육, 우람한 대물이 그대로 그녀의 시야에 또렷히 들어왔다. 화경에 이른 기감이 시각을 보조한 덕분에 어둠 속에서도 그대로 상공의 늠름한 모습이 또렷히 보였다.
게다가 방에 설치된 동경을 보고 근육을 부각하는 자세를 잡는 상공의 모습까지.
두근, 두근.
모든 걸 목격한 그녀의 심장이 뛰었다. 얼굴이 붉어졌다.
검후는 뒤늦게 양손을 펼쳐 눈을 가렸지만, 손가락 사이로 전부 이철수의 모습을 지켜봤다.
스윽.
이윽고 환복을 끝낸 이철수가 밖으로 나왔다.
‘바, 밖이라니······. 야밤의 외출이라니······. 설마 상공께서 소빈이와 밀회 약속을······!’
누가 봐도 외출하려는 모습.
야밤의 외출이라니.
검은 야행복을 챙겨 입은 상공의 모습을 본 검후가 은밀히 이철수의 뒤를 쫓았다.
*
야행복을 챙긴 나는 항산파 산문으로 향했다.
횃불이 화르륵 타올라 어둠을 밝히고 있는 산문에는 야간 경비를 서는 중인 항산파 제자 둘이 있었다.
“이 소협이군요. 무슨 일이십니까?”
“산책을 좀 하려 합니다.”
야간 외출에 딱히 제한은 없었다.
내 말을 들은 항산파 제자가 출입자 명부에 내 이름을 스윽스윽 써넣더니 닫힌 산문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오시길.”
끼이이익.
육중한 대문이 열리고, 나는 항산파 산문 밖으로 발걸음을 한 발짝 내딛었다.
자.
이제 슬슬 검후비동을 찾아서 항산파에 은혜를 입혀야 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경공을 펼치려다 멈칫했다.
“뭐지?”
지금 등 뒤에서 누군가 날 보고 있던 것 같은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거기에는 달빛이 내려앉은 항산파 산문과 전각들밖에 없었다.
휘이잉.
밤의 산바람이 내 몸을 감쌌다.
뭐, 착각이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경공을 펼쳐 밤공기를 가르며 몸을 날렸다.
목적지는 검후비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