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너무 멋있어 - 삽화
쿠콰콰콰콰콰콰콰!
마로 마를 제압한다.
복마검법의 거칠고 폭력적인 내력이 흑색 검기의 형태로 칼날 위에 피어올랐다. 복마검법의 날카로운 찌르기가 월향귀로검의 약점을 그대로 꿰뚫었다.
“크윽!”
소검후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발이 움직였다. 항산파의 상승 보신경인 월녀지무(越女之舞)의 신비로운 발놀림이 눈앞에 펼쳐졌다.
사뿐, 일보로 내 치명타를 피한 소검후의 검에서 은빛 검기가 피어올랐다.
항산파의 최상승 절학. 장문인과 장문제자에게만 전수된다는 월녀검법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월녀검법이라니!”
“허허. 오늘 항산파의 월녀검을 견식하게 되는구나. 아미타불.”
“무량수불. 공동괴협 이 소협의 실력도 실로 놀랍군요. 오늘 개안한 기분입니다.”
“두 사람의 성취가 깊으니, 실로 정파 무림의 동량지재라 할 만합니다. 일 년 후의 용봉지회가 기대됩니다.”
무림인들의 말이 귓가에 들렸다.
“이제 끝이에요!”
소검후의 눈동자에 안광이 번쩍였다. 그녀가 확신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래.
최상승 절학을 꺼냈으니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겠지.
하지만 그녀가 월녀검을 꺼내게 만든 지금 상황이야말로 내가 유도한 상황이었다.
월녀검법이 대단한 신공절학은 맞았다. 화산파의 자하신공, 무당파의 태극혜검과도 비견되는 일문의 장문인과 그 후계자만이 익힐 수 있는 최상승 비전절학이니까.
그러나 최상승 절학이라는 뜻은, 입문도 더럽게 어렵고 숙련도 쌓기도 더럽게 힘들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즉, 아무리 최상승 무공이라더라도 수행이 따르지 않는다면,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는 뜻이었다.
물론 내가 그냥 일류따리였다면, 미숙한 월녀검을 꺼내든 순간 내가 패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전생에 현경의 절대고수이자 황궁제일고수였던 자.
실제로 소검후의 월녀검은 언뜻 보기에 화려했고, 강력해 보였지만 현경의 경지에 이른 내 안목에는 빈틈이 구멍 숭숭 뚫린 스펀지처럼 보였다.
월녀검의 은빛 검기를 보면서, 나는 역라순혈공을 끌어올렸다.
쿠콰콰콰콰콰콰!
음양이기의 진기가 혼원공의 컨트롤을 거쳐 역라순혈공의 인도를 따라 혈도를 거꾸로 주천하며 내력을 증폭했다.
순식간에 늘어난 내력이 깃든 철검에서 강력한 흑색 검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그 상태로 지금까지 수없이 수련한 복마검법의 최후절초이자 공방일체의 일격.
위타복마를 날렸다.
번쩍.
흑색 검광이 월녀검의 은빛 검기를 정확히 꿰뚫고 그녀의 머리를 묶고 있던 끈을 스치고 지나갔다.
스르르.
그녀의 머리카락이 봉두난발처럼 어지럽게 흩어진 순간, 내 철검은 이미 그녀의 목젖 바로 앞에 도착해 있었다.
주륵.
소검후의 이마에 식은땀이 한 줄기 흘렀다.
“이 비무의 승자는 공동괴협 이철수 소협입니다.”
뒤이어 자리에서 일어난 검후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렸다.
그렇다.
내 승리였다.
검후의 승리 선언과 함께 나는 검을 거두며 역라순혈공의 운용을 해제했다.
‘크윽.’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른 핏물을 삼켰다.
지금은 정사지쟁 때 흑사룡과의 결전에서처럼 약한 척을 할 때가 아니라, 강한 척을 할 때였다.
항산파 장문제자 소검후를 천무지체로 유명한 유진휘도 아닌 이철수가 꺾었다.
언더 독의 반란이라는 서사에 마침표를 멋있게 찍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소검후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공자님. 이렇게까지······. 소녀의 연심을 짓밟을 생각인가요? 흑, 흐흑······.”
소검후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선즙필승이라니.
뭐 상관없다.
눈물을 흘린다는 건, 최후의 발악을 의미하는 거니까.
나는 천소빈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천 소저가 그렇게 시험해도, 검후 선배를 향한 내 일편단심은 절대 흔들리지 않소. 어차피 이 비무는 내가 승리했으며, 나는 검후 선배를 향한 도전자 자격을 항산파와 정파 무림의 동도들 앞에서 입증했으니.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이해하지만, 이제 다 끝났소. 그러니 마음에도 없는 연정 고백은 그만하셔도 좋소.”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천소빈에게 건넸다.
“그러니 그만 우시오. 중인들이 보고 있지 않소.”
“흑, 히끅······. 흐아아아앙!”
내 손수건을 받아든 천소빈이 눈물을 흘리며 대연무장을 뛰쳐나갔다.
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 싫은가? 아니면 패배의 충격? 뭐 상관 없다.
이번 즉석 비무에서 도전자 자격을 내가 승리하며 입증했으니, 항산파 측에서 검후를 향한 도전을 막을 명분은 소멸했다.
내 시선이 검후를 향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검후가 살짝 움찔했다.
그녀의 눈처럼 새하얀 얼굴에 살짝 홍조가 감돌았다.
나는 검후를 향해 말했다.
“검후 선배, 거기서 조금만 기다리시오. 성년이 되는 날, 검후 선배를 뛰어넘었다고 생각되는 날. 그대를 내 검으로 쓰러뜨려 내 여인으로 만들 터이니. 선배는 절대 내게서 벗어날 수 없소.”
수없이 연습했던 멋진 대사를 나는 비장한 표정과 내시 시절에는 양물이 잘려 불가능했던, 남자다운 중후한 발성으로 내뱉었다.
그래.
이거지.
환관이었던 시절, 아무리 연습해도 사극 내시 목소리처럼 나왔던 그때의 끔찍한 기억은 이제 안녕이다.
나도 이제 꿀성대, 여심을 유혹하는 허니 보이스를 소유한 마성의 남자로 새로 태어난 것이다.
물론 쌍발색검, 공동색협의 오명이 이것으로 전부 사라지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의 이 시나리오는 1년 후에 있을 용봉지회를 위한 포석이다.
용봉지회.
정파 무림의 후기지수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청춘과 낭만이 젖과 꿀처럼 흐르는 축제.
나는 용봉지회의 절정에서 검룡의 이름을 탈취하고 강호 무림의 진정한 인기 아이돌로 거듭날 것이다.
영웅호색 십년대계의 주춧돌을 놓고 말리라.
내 시선을 받은 검후가 움찔했다.
언제나 무표정을 유지하던, 냉미녀로 유명한 그녀의 차가운 얼굴에 한 줄기 호선이 그려졌다.
희미한 미소. 하지만 잘 웃지 않는, 눈 같은 피부와 얼음 같은 은발과 냉랭한 인상이 어우러져 한겨울 같았던 검후의 예쁜 얼굴이 눈 녹듯 사르르 봄처럼 바뀌었다.
“기다리겠습니다. 소협.”
짧은 한 마디.
내게는 그걸로 충분했다.
반드시 검후를 내 여자로, 삼처사첩의 일원으로 만들 것이다.
나와 검후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힌 순간.
“공동괴협 이 소협이 소검후 천 소저를 이기다니······.”
“허허, 천무지체 공동신협 유 소협도 아닌 이 소협이 항산파의 장문제자를 이길 줄이야······. 아미타불.”
“공동파의 위상이 날로 높아지는구려. 이대로라면 과거의 성세를 되찾는 일도 시간문제일지도 모르오.”
“흐음. 이 소협은 비무에서 여인을 상대로 음란 행위를 한다 들었는데, 이번 비무에서는 안 그런 걸 봐서는 색협이라는 소문이 헛소문일지도 모르겠소.”
“실로 정파 무림의 동량지재나 다름없소. 사파 놈들이 부르는 쌍발색검은 헛소문이었구려.”
“그래도 행실이 행실이니, 앞으로 이 소협의 행적을 지켜봐야겠소이다.”
중인들의 술렁임이 들려왔다.
다들 사형이 아닌 내가 천소빈을 꺾은 의외의 결과에 놀라는 반응이었다.
거기에 상대 옷을 찢지 않고 얌전히 비무를 마무리한 결과 때문에 공동색협의 오명에 의문을 제기하는 모습까지.
실로 만족스러운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좋아. 이대로 용봉지회까지 성공적으로 내 이미지 세탁을 해야 했다.
“······천 대사저를 꺾다니, 음적 주제에 제법 하는군요.”
“분합니다. 어떻게 공동색협 따위한테······.”
“소검후 님이 저 색마한테 고백한 이유가 뭘까요?”
“감히······. 검후 님한테 저런 무례한 도발이라니······.”
반면에 항산파 제자들은 나를 바라보면서 이를 뿌득뿌득 갈고 있었다.
뭐, 다들 검후 팬클럽이니까.
저런 반응은 이해한다. 실컷 떠들라고 해라.
어차피 이번 비무로 항산파에서 내 도전자 자격에 제동을 걸 명분은 완전히 소멸했다. 소검후 본인이 직접 패했으니 말이다.
결국 검후는 내 여자가 될 테니까.
나는 마지막으로 차갑게, 멋진 웃음을 날려주면서 내 탐스러운 검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공동파 지정석으로 향했다.
와. 오늘 나 너무 멋있는 거 아니야?
흐흐.
*
예상치 못한 즉석 비무를 제외한다면 경연 첫날 행사는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경연이 끝난 뒤. 항산파 본산 월은각.
‘오늘은 상공께서······. 소빈이를 이기고 소첩께 다시 한번 청혼하셨다. 상공······. 그렇게 소첩을 뜨겁게 각별히 여겨주시지 않아도 괜찮은데······. 소첩은 너무 감동이에요······.’
슥슥.
검후는 세필을 들어 비밀 일기장에 오늘 있던 일을 기록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비무가 끝난 뒤 상공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꺄아, 상공. 절대 벗어날 수 없다니. 소첩은 이미 상공의 포로인걸요. 연모하는 상공의 품에서 소첩이 벗어날 리가 없잖아요······.’
헤헤.
언제나 차갑게만 보였던 검후의 얼굴에 봄바람처럼 풋풋하고 따뜻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졌다.
‘어쩜. 그렇게 목소리까지 멋있을까요. 상공.’
첫날부터 이렇게 그녀의 심장을 설레게 만들다니.
얼어붙은 검후의 심장을 뛰게 할 수 있는 사내는 오직 상공뿐이다.
검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춘기 소녀처럼 달아오른 뺨을 살짝 두드리며 헤실헤실 웃었다.
슥슥.
그렇게 오늘의 일기를 마무리한 검후는 지필묵을 정리한 뒤 먹을 전부 말린 일기장을 궤짝에 집어넣고 잠갔다.
딸칵.
궤짝 정리를 마무리한 순간.
“사부님. 제자 천소빈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문 밖에서 천소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자의 목소리를 들은 검후는 빠르게 얼굴 표정을 관리했다. 붉게 물들었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변했다. 헤실헤실하던 봄바람 같던 미소는 북풍한설을 닮은 겨울의 무표정으로 변했다.
싸늘한 냉미녀의 모습으로 돌아간 검후가 나직하게 말했다.
“들어오너라.”
드르륵.
검후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미닫이문이 열렸다.
그 너머에서 그녀의 제자, 소검후 천소빈이 나타났다.
탐스러운 흑발 사이사이에 은빛 머리카락이 새치처럼 섞인, 10대 후반 미모의 미소녀.
천소빈을 본 검후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소검후가 이철수에게 고백하던 광경이 선명했다.
비무에서 패배하고도 계속 마음을 고백하려던 소검후의 모습도 말이다.
비록 상공께서는 그녀를 버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소검후가 한 행동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오늘 경연에서 왜······. 이 공자한테 그런 말을 한 것이냐?”
검후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검후의 차가운 시선을 받은 소검후가 고개를 숙였다.
“설마 정말로 이 공자를 연모해서 그런 것이더냐?”
그녀의 손이 떨렸다.
절대 패배하면 안 되는 비무에서 패배했다. 하지만······.
천소빈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아직 그날 훔쳐봤던 일기장의 한 구절이 선명한 모습으로 떠돌고 있었다.
‘반드시 패배라니, 절대로 안 돼요!’
사부님께서는 그 망나니에게 반드시 패배할 거라고 일기장에 써 놓은 것이다.
그런 일은 그녀의 눈에 흙이 들어가더라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천소빈은 입술을 깨물면서, 사부님을 응시하며 말했다.
“네. 사부님. 제자는······. 이 공자를 마음에 두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