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환관이 남성을 되찾음-95화 (95/171)

95화 당신은 저의 지아비

강호의 방식.

이철수의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온 순간, 좌중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특히 천소빈.

그녀의 얼굴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고, 공자님, 어떻게······.”

천소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방금의 공개 고백은 그녀에게 있어서 최선이자 최고의 한 수였다.

이 자리에는 공동파와 항산파 관계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산서진상을 포함한 산서성의 귀빈과 산서 무림의 명숙은 물론 인근 지역의 대문파인 화산, 종남, 팽가, 소림, 개방의 명숙과 제자들까지.

그야말로 정파 무림과 중원 상계 전체가 주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자리에서 그를 사모한다고 고백한 것이다.

고백이 진심이건 아니건, 사석이 아닌 공석에서 구파일방의 일좌인 대문파 항산파의 장문제자가 한 발언이었다.

따라서 아녀자인 그녀가 먼저 내뱉은 고백은 사실상 이철수와의 혼약을 기정사실로 만드는 것과도 같았다.

그 파급력을 생각해본다면, 사실상 그녀의 체면과 인생을 대가로 이철수도 함께 궁지로 몰아넣은 알면서도 피할 수 없으며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동귀어진의 절초였다.

‘대체 어떻게······.’

하지만 이철수의 대처는 그녀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그는 뛰어난 화술로 순식간에 그녀의 고백을 거짓으로 만들고, 스스로를 오직 검후만 사모하는 사내로 포장했다.

졸지에 그녀는 검후와 이철수의 연정을 방해하는 시험관 역할이 되고 말았다.

이철수의 세 치 혀에 놀아난 것이다.

그래서 또 고백했다.

아무리 말을 유려하게 한다 한들, 결국 강호 무림은 힘이 지배하는 세상.

최근 정사지쟁의 승리로 위세가 조금 올랐다지만, 공동파의 입지는 아직 항산파의 그것에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항산파의 장문제자인 그녀가 고백을 우긴다면, 이철수는 한 수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철수는 그런 취약점을 정확히 간파하면서 극단적인 수단을 꺼내들었다.

강호 무림의 방식으로 해결하자.

그 말인즉, 서로 무공을 겨뤄서 승자의 말에 패자가 따르자는 말이었다.

“천 소저와의 비무에서 제가 이긴다면, 천 소저를 포함한 항산파의 모든 제자분께서는 이제 더 이상 검후 선배를 향한 제 도전자 자격에 이의를 제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강호 무림에 도는 풍문대로, 검후 선배의 지아비 될 자격을 입증한 셈이니까요. 하지만 제가 패배하고 천 소저가 승리한다면······.”

이철수의 시선이 천소빈을 향했다.

그의 몸에서 약한 기파가 일어났다. 고작 일류의 무인. 게다가 동등한 경지라더라도 일류의 끝자락이며 이미 절정의 벽을 마주보고 있는 소검후 본인과 이제 원숙한 일류의 경지에 오른 이철수와는 반수 정도 차이가 난다.

그녀가 우위다.

분명 객관적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 이철수의 몸에서는 고작 열다섯 소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지배자의 기세가 피어올랐다.

그건 무공을 통해 쌓은 기도가 아니었다. 북경 조정을 호령하는 재상, 북방 전선을 담당하는 대장군과 같은 수많은 음모와 모략을 거쳐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에 오른 권력자의 기세였다.

이철수의 기파가 순식간에 대연무장을 가득 채웠다.

“······그때는 천 소저의 뜻대로, 소저의 마음을 받아주겠소. 비무는 지금 당장, 여기서 하는 걸로.”

이철수의 말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당사자 천소빈마저 그랬다.

그의 말에는 내력을 넘어, 거스를 수 없는 무언의 권위가 깃들어 있었다.

마치 자금성에 앉아 중원의 억조창생을 다스리는 천자의 말처럼.

이철수의 말을 들은 검후의 손이 떨렸다.

털썩.

그녀의 다리가 힘이 풀렸다.

검후가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어어, 검후 님께서······! 충격받으신 건가?!”

“그럴 만하지. 쯧쯧. 일문의 동량지재인 장문제자가 사사로이 공석에서 사내에게 연모를 운운한 것만 해도 체면이 깎이는 일인데, 이제는 그 연모와 도전 자격을 두고 이철수가 강호의 방식으로 해결하자 했으니, 나라도 충격받았을 걸세.”

“하긴. 그렇기도 하군.”

중인들이 술렁거렸지만, 그녀의 귓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두근.

두근, 두근.

검후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녀는 붉어지려는 얼굴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자리에 앉은 검후가 고개를 숙였다. 무릎 위에 다소곳하게 올려진 그녀의 양 손이 치맛자락을 꽉 잡았다.

‘상공께서는 소첩을 버리지 않으셨어······.’

방금 이철수가 했던 말이 그녀의 귓가에, 머릿속에 계속 맴돌고 있었다.

‘사, 상공께서 소, 소첩을 마음에 품으셨다고······.’

마음에 품었다.

이철수의 방금 그 말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계속 울렸다.

‘상공께서······. 소첩을······. 소빈이가 아닌 소첩을······.’

상공께서는 소빈이의 고백을 사실상 거절했다.

심지어 그녀와 항산파의 체면을 생각해서 제자를 설득하려고 했다.

실패했는데도, 물러서지 않았다.

제자와 맞서고자 했다. 강호 무림의 방식으로 자격을 증명하려 했다.

그녀의 지아비가 될 자격을 말이다.

그 사실이 너무 기뻐서.

너무 좋았다. 꿈만 같았다. 상공께서는 그녀를 외면하지 않았다. 나이가 많아도, 배분이 높아도, 공동파와 항산파라는 껄끄러운 관계라도.

이 모든 현실의 장애물에도 굴하지 않고 그녀를 본인의 여인으로 삼겠다 다시 한 번 천명했다.

일 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에도 상공의 마음은 변치 않은 것이다.

그 사실이 너무 좋아서.

너무 설레서. 검후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잠시나마 상공의 진의를 의심했던 소첩을 용서해주셔요······.’

그와 동시에 검후는 수치를 느꼈다.

잠시나마 그녀를 향한 상공의 마음을 의심했다. 상공께서 그녀를 버리리라 생각했다. 천소빈을 택하리라 생각했다. 제자에게 추하게 질투하고야 말았다.

그 사실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상공에게 너무나 미안해서.

검후는 견딜 수 없었다.

‘역시 이 죄는······. 하룻밤 만에 전부 갚지 못할지도······. 후후. 어쩔 수 없네요. 소첩이 상공의 곁에 머무르면서 평생 몸으로 속죄하지 않으면······!’

검후의 무표정한 얼굴에 살짝 홍조가 피어올랐다.

혼인한 이후 매일 상공의 곁에 평생 함께하면서 심신을 전부 바쳐 갚을 것이다.

다행히 햇살이 뜨거운 낮이었기에, 그녀의 홍조는 그리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상공······. 소첩을 몇 번이나 부끄럽게 하시고, 몇 번이고 또 반하게 하시다니. 만날 때마다 상공을 향한 소첩의 연정을 더욱 깊게 만드시다니······. 역시 소첩한테는 상공이 없으면 안 돼요.’

상공이 더 좋아졌다. 이토록 진심으로 부딪히는 사내를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검후가 그렇게 속으로 꺄아꺄아 소리를 내며 겉으로는 애써 무표정을 가장하며 대연무장을 보던 그때.

검후와는 반대로 소검후 천소빈은 이를 뿌득뿌득 갈며 손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모두가 보는 앞이다.

이철수의 제안을 거절하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이철수가 교묘하게 그녀가 퍼뜨렸던 소문을 역이용해서 순식간에 이 즉석 비무를 사부님을 향한 도전 자격 검증 자리로 만들어버린 이상.

사문의 체면을 위해서, 나아가 그녀의 궁극적인 목적인 사부님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천소빈은 이철수의 도전을 거절할 수 없었다.

천소빈이 입술을 깨물었다.

확실히 직접 만나보니 기도가 범상치 않은 이철수였다. 하지만 그녀도 정파 무림에서 손꼽히는 일대기재.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니 이겨야 한다. 반드시.

천소빈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검을 뽑았다.

“······좋아요. 받아들이죠.”

천소빈의 말이 끝나는 순간.

이철수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

“흐흐흐.”

내 입에서 상남자의 웃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좋아.

내게 유리한 판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무대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정사지쟁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번 서문세가 대 공동파 비무보다는 큰 무대였다.

정파 무림이 보고 있는 자리다.

이번 기회에 반드시, 내가 쌓은 공동색협과 쌍발색검의 오명을 떨쳐 내야 했다.

지난 1년 동안, 저 빌어먹을 헛소문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던가!

오늘을 위해, 별호를 바꾸기 위해, 나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복마검법을 실전과 같은 훈련으로 단련했다.

그리고 이제 소검후 천소빈을 상대로 그 실력을 선보여 내 오명도 씻고 여인에게 인기 많은 공동검협 이철수로 다시 태어날 시간이었다.

“그 음침한 웃음은 뭐죠? 기분 나빠요!”

소검후가 내 상남자의 웃음소리를 비웃었다.

“음흉한 웃음이라니, 연작(燕雀, 제비와 참새)이 어찌 홍곡(鴻鵠, 기러기와 고니)이 품은 큰 뜻을 아리오. 내 오늘······.”

나는 소검후를 노려보면서 고금제일고자 사마천이 집필한 위대한 역사서 사기에 기록된 연작홍곡(燕雀鴻鵠)의 고사를 논하며 삼음진결과 소양심법을 운용했다.

그래.

눈앞의 소검후는 내가 품은 큰 뜻, 영웅호색 십년대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쿠콰콰콰콰콰콰콰!

단전에서 치솟은 음양이기가 혈도를 거칠게 내달리는 순간, 혼원공을 일으켜 내력을 통제했다.

머리가 차가워지고 단전이 뜨거워졌다. 수승화강이 순식간에 이루어지며 공동파 특유의 거칠면서 폭발적인 내력이 사지백해에 깃들었다.

“······반드시 천 소저와의 비무에서 승리하여 구주팔황에 이 이철수가 검후 은설란의 지아비 될 자라 천명할 것이오!”

삼처사첩. 주지육림. 운우지락. 영웅호색.

내 욕망이 깃든 행운유수의 일보가 한 조각 구름처럼 유유히 소검후의 지척까지 내 몸을 이끌었다. 나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철검을 복마검법의 구결에 따라 휘둘렀다.

“누, 누구 마음대로요! 다, 당신은 제 지아비가 될 사람이라고요! 사부(師父)님의 사부(師夫)님이 아니라!”

내 말에 당황한 소검후가 얼굴을 붉히면서 내 복마검을 막아냈다.

항산파의 장문제자답게 극성에 이른 월향귀로검(月鄕歸路劍)이 펼쳐졌다.

번쩍!

흑색 검광과 은빛 검광이 부딪히며 기파가 대연무장을 흔들었다.

멋있게 보이기 위해 동백기름을 발라 넘긴 내 윤기 넘치는 흑발이 기파를 받아 흔들렸다.

나는 웃으면서 그대로 계속 검을 휘둘렀다.

번쩍!

흑색 검광과 검영이 어지럽게 피어올랐다.

복마검법은 공격 일변도의 강검이면서 공방일체의 검법. 당연히 공격을 계속 퍼부어 콤보를 쌓을수록 더 강력해졌다.

“이이이이익!!”

소검후가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월향귀로검이 펼쳐졌다. 그와 함께 달빛을 연상시키는 도도한 은빛 검광이 물결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방어 후 반격에 특화된 항산파의 상승절학답게 물샐틈없이 펼쳐지는 검광과 검영의 방어.

1년 전이었다면, 검후와 붙어보지 않았다면 여기서 당황했을지도 몰랐다.

물론 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문청하와의 비무 때처럼 구화음백조의 묘리를 응용하면 승리는 가능했을 테니.

하지만 그렇게 이겨서 남는 건 상처뿐인 영광뿐. 그런 승리는 피로스의 승리에 불과하다.

구화음백조. 그 게이 같은 무공의 묘리를 섞는다면 소검후 천소빈의 옷을 또 찢을 위험성이 있었다.

안 그래도 서문세가와의 비무에서 서문청하의 옷을 찢는 바람에 색협으로 억울하게 낙인찍힌 나였다.

그런데 정파 무림이 지켜보는 이번 즉석 비무에서 천소빈의 옷을 또 그때처럼 찢는다?

‘그건 안 돼. 절대 안 돼.’

그랬다가는 공동색협이 아니라 공동색마가 되는 수가 있었다.

당연히 내 영웅호색 십년대계가 물 건너가는 건 물론이요, 강호 무림의 인기남이 된다는 내 원대한 꿈은 그대로 시궁창에 박혀 소멸될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나는 색마가 아니다. 색도의 일대종사다. 나처럼 선량하고 순수한 협객이 어디 있다고. 억울하다.

내 살아생전에 반드시 공동파 산문 앞에 수북이 쌓인 정파 무림의 미소녀들이 보내는 팬레터를 봐야 했다.

그러려면, 이번 비무에서 정정당당하게 공동파의 절학으로 소검후을 이겨야 했다.

확실히 소검후의 성취는 나이치고는 대단했다.

‘하지만 1년 전 봤던 검후의 월향귀로검에 비하면······. 애들 장난 수준이군.’

검후가 펼쳤던 월향귀로검은 그야말로 철벽과도 같았다. 빈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소검후의 월향귀로검은 달랐다. 현경의 경지에 오른 내 감각이 속삭이고 있었다. 빈틈은 여기라고.

나는 검병을 잡았다. 우웅. 철검에서 검명이 울렸다. 마치 검이 내 손, 아니 내 꼿꼿이 선 양물처럼 내 신체의 소중한 일부분이 된 기분 좋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 이거다.

씨익.

입가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쉴 새 없이 월향귀로검의 방어 초식을 두드리던 내 철검의 궤적이 일순간 궤이막측(詭異莫測)한 궤적으로 검은 검영을 짙게 남기며 움직였다.

“?!”

소검후의 눈동자가 흔들린 그때.

번쩍.

한 줄기 검은 섬광이 대연무장에 내리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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