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버리지 말아주세요
항산파 대연무장에 죽음과 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소검후 천소빈.
그녀의 예상치 못한 공개 고백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북해의 설원처럼 얼어붙은 좌중 사이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귀빈석에 앉은 천일상단주 천무전이었다.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는 초로의 중년인.
올해로 46세, 검후 은설란보다 한 살 어린 천무전의 표정이 굳었다.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소, 소빈아. 그게 무슨 말이더냐······. 저 놈팡이를 사모한다니!! 어젯밤 있었다는 일은 또 대체 무엇이고!!”
천무전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어려서부터 금지옥엽처럼 소중히 키웠던 딸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막내딸. 하나뿐인 딸이었다. 그래서 딸이 혼약을 거부하고 항산파에 가겠다고 해도 선뜻 허락해줬다.
무려 이백 년이 넘도록 산서제일상단으로 군림했던 천일상단(泉溢商團)이었다.
당연히 산서제일문파인 항산파와는 끈끈한 유착관계를 맺고 있었다.
험하기 짝이 없는 풍진강호에서 장사하려면 어느 정도 무력을 갖추는 게 필수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문파 역시 운영 자금이 필요하니, 지역 상단과 유착해서 상단은 자금을, 문파는 무력을 서로 제공하며 상부상조하는 공생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대형 상단주들이 괜히 지역 유력 문파에 후계자가 아닌 자제들을 입문시키는 게 아니었다.
천소빈의 항산파 입문은 상단주인 그의 입장에서도 이득이었던 셈이다. 물론 아끼는 딸이 잘 되라고, 아버지로서 딸의 선택을 응원하는 마음도 있었다.
“지금까지 주선한 혼약을 전부 거부한 것이 저 빌어먹을 망나니 때문이었더냐! 으윽! 으윽!”
천무전이 뒷목을 잡았다.
그의 혈압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상인에게도 정보는 중요하다. 특히 중원 전역을 상대로 장사하는 천일상단이라면 더더욱. 게다가 오늘은 항산대전이 열리는 날이 아니던가?
딸의 상대가 될 수 있는 공동파 후기지수에 대한 정보는 이미 수집해뒀다.
공동괴협 이철수.
아니 공동색협 이철수. 덕분에 그에 대해서 천무전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사천제일기녀 능월향에게 가가라고 불리면서 검봉 서문청하를 시비로 데리고 다니는 천하의 화화공자. 망나니. 사사로이는 공동색협으로 불리며 사파에서는 쌍발색검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호를 가진 자.
그의 딸이 가장 싫어할 만한 요소를 전부 지닌 사내가 이철수였다.
그런데 그런 사내에게 반했다고?
의미심장한 어젯밤 이야기는 또 대체 무어란 말인가?
상단주가 아닌 딸의 아버지로서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지금까지 그가 천소빈과 혼약을 주선했던 공자 중에 이철수보다 부족한 사내가 한 명도 없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랬다.
“천 대인의 말이 맞다. 소빈아. 대체 이게 무슨 일이더냐?”
천무전의 말을 이어받은 건 검후였다.
검후 은설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자연스럽게 대월신공(大越神功)의 기파가 피어올랐다.
은설란의 전신에서 은빛이 은은하게 반짝였다.
그녀의 은빛 눈동자가 천소빈을 향했다.
무표정한 얼굴. 하지만 북풍한설을 연상시키는 냉기가 그녀의 얼굴에 감돌았다.
‘어, 어떻게 소빈이 네가······. 네가 나의 상공을······.’
검후의 마음은 동요하고 있었다.
소검후 천소빈.
수많은 항산파 제자 중에서 가장 그녀를 잘 따랐던, 그녀 또한 딸처럼 생각하고 가르쳤던 그녀의 하나뿐인 제자였다.
나아가 장차 항산파를 물려받을 장문제자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어째서······.
‘어째서······. 다른 사내가 아닌 하필 상공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단 말이더냐······.’
검후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북받치려는 감정을 꾸욱 눌러냈다. 당장이라도 울고 싶었다. 혼자였다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공석이다.
울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답답했다. 가슴이 꽉 막혔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어째서.
어째서 도대체 왜.
다른 사내도 아닌.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그녀의 지아비가 될 사내인 상공을 사모한다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대체 왜.
심장이 떨렸다.
사부로서, 딸처럼 여기는 제자 천소빈이 정인을 사귄다면 상대가 누군지 살펴보고 응원해줄 생각은 있었다.
안 그래도 요즘 그녀를 따라 문파 규율에는 혼인 금지가 없는데도 금혼을 천명하는 항산파 제자가 늘어서 고민되던 참이었다.
누구라도 혼인한다면, 특히 제자인 소검후가 혼인한다면 검후인 그녀의 혼인에 대한 문도들의 거부감도 옅어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던 검후였다. 그러니 얼마든지 소검후의 통정도, 혼인도 응원해줄 수 있었다. 상대의 자격이 충분하다면, 소검후가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말이다.
그래야 그녀도 상공과 이어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소검후의 상대가 하필 상공이라니.
30년 만에 드디어 나타난 운명의 상대였다. 지아비는 오직 그분뿐이라 생각했다. 그런 상공을 하필 그녀의 하나뿐인 제자가 사랑한다니.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라는 말인가.
검후가 주먹을 꽈악 쥐었다. 그녀의 뺨이 부르르 떨렸다.
‘제자가 상공을 좋아한다면, 소첩은, 소첩은 어찌해야 될까요······.’
그녀의 시야에 천소빈의 모습이 들어왔다.
탐스러운 흑발 사이로 은발 몇 가닥이 뒤섞인 그녀의 모습이, 입을 앙다문 그녀의 분홍색 입술이, 이팔청춘의 꽃된 나이와 어울리는 풋풋한 아름다움을 지닌 미소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결코 갖지 못할, 그 나이대의 소녀만이 가질 수 있는 젊음이 거기 있었다.
‘······소첩은······. 소첩은······.’
그에 반해서 그녀의 나이는 마흔일곱이었다. 고절한 무공 때문에 젊음은 유지하고 있지만 그뿐. 항렬도 어머니, 아니 할머니뻘이요, 배분은 사부뻘이다.
그녀와 배분이 같은, 용봉지회에서 한때 봉(鳳)의 이름을 받았던 여인 중에는 이철수만한 손자가 있는 사람도 있었다.
배분도 높아서 부담스럽다. 화경의 고수와 비무에서 승리해야 혼인이 가능하다는 점도 걸림돌이다. 상공께서는 배분도 지위도 나이도 상관없다고 했지만, 현실적으로 봤을 때는 아니었다.
제자와 비교했을 때, 그녀는 모든 면에서 열세였다.
검후는 슬프게도 그 사실을 자각했다.
‘······소첩이 사내였더라도, 나이만 많은, 배분이 쓸데없이 높아 부담스러운 늙은 여인보다는 배분도 같고 나이도 비슷한 또래 여인을 선택할 테지요······.’
검후가 고개를 숙였다.
제자와 상공.
딸처럼 아끼는 소녀와 47년 일생에서 처음으로 마음에 품은 사랑하는 사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니.
이렇게 잔인한 상황에 놓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 잔인한 사실은, 소검후의 고백을 들은 순간 검후 마음 깊은 곳에는 이미 딸 같은 소검후에 대한 질투가 독버섯처럼 돋아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상공에게 버림받고 싶지 않다.
제자만 아니었더라면, 그렇다면······.
거기까지 생각한 소검후가 추한 질투를 억눌렀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상공, 소첩은 어찌해야 할까요. 소첩을 버리지는 말아주세요. 염치없지만······. 소첩을······. 소첩이······. 소첩이 더······. 잘할 테니까······. 소첩은, 이미 상공이 없으면 안 되는 몸이 되었으니까······.’
그녀의 어깨가 떨렸다. 시야가 흐려졌다. 참아왔던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이제 그분이 없으면 안 된다.
그분이 아닌 다른 사내는 싫다. 오직 그만이 그녀의 지아비가 될 수 있었다.
나를 선택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30년 전, 철없을 때 내뱉은 저주받은 선언이 아직 그녀를 구속하고 있었으니까.
정파 무림이 보는 앞이다.
공석이다.
이런 장소에서 항산을 대표하는 검후인 그녀가 울어서는 안 됐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터져 나오는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또르륵.
그녀의 은빛 눈동자에서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어젯밤이라니, 대체 공동괴협과 천 소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괜히 색협이라는 소문이 돌았겠소? 둘 사이에 거사가 치러진 것이 분명하오!”
“허, 그 도도한 천 소저를 홀리다니. 공동괴협의 솜씨가 보통이 아니구려.”
“차가운 은 여협께서 눈물을 흘리다니, 대체 얼마나 충격을 받으셨으면······.”
“그만큼 청천벽력이라는 뜻이지. 나라도 그랬을 걸세. 에잉, 쯧쯧. 일문의 장문인이 될 대제자가 중인환시리에 공석에서 사사로이 사내한테 연모의 정을 고백하다니. 항산파의 체면이 말이 아니겠어.”
중인들이 웅성거렸다.
웅성거림을 들은 소검후 천소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부님께서 흘리는 눈물도, 아버지의 호통도 아직 그녀의 귓가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죄송해요. 사부님. 아버님. 하지만 모두를 위해서는······. 체면도 수치도 모르는 색마 이철수를 상대하려면······. 제가 희생하는 방법밖에는 없었어요.’
하지만 소검후 천소빈은 멈추지 않았다.
중인들의 손가락질도, 아버님과 사부님의 질타도 이미 각오했던 일이었다.
‘어째서······. 다른 사내가 아닌 하필 상공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단 말이더냐······.’
검후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북받치려는 감정을 꾸욱 눌러냈다. 당장이라도 울고 싶었다. 혼자였다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공석이다.
울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답답했다. 가슴이 꽉 막혔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어째서.
어째서 도대체 왜.
다른 사내도 아닌.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그녀의 지아비가 될 사내인 상공을 사모한다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대체 왜.
심장이 떨렸다.
사부로서, 딸처럼 여기는 제자 천소빈이 정인을 사귄다면 상대가 누군지 살펴보고 응원해줄 생각은 있었다.
안 그래도 요즘 그녀를 따라 문파 규율에는 혼인 금지가 없는데도 금혼을 천명하는 항산파 제자가 늘어서 고민되던 참이었다.
누구라도 혼인한다면, 특히 제자인 소검후가 혼인한다면 검후인 그녀의 혼인에 대한 문도들의 거부감도 옅어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던 검후였다. 그러니 얼마든지 소검후의 통정도, 혼인도 응원해줄 수 있었다. 상대의 자격이 충분하다면, 소검후가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말이다.
그래야 그녀도 상공과 이어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소검후의 상대가 하필 상공이라니.
30년 만에 드디어 나타난 운명의 상대였다. 지아비는 오직 그분뿐이라 생각했다. 그런 상공을 하필 그녀의 하나뿐인 제자가 사랑한다니.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라는 말인가.
검후가 주먹을 꽈악 쥐었다. 그녀의 뺨이 부르르 떨렸다.
‘제자가 상공을 좋아한다면, 소첩은, 소첩은 어찌해야 될까요······.’
그녀의 시야에 천소빈의 모습이 들어왔다.
탐스러운 흑발 사이로 은발 몇 가닥이 뒤섞인 그녀의 모습이, 입을 앙다문 그녀의 분홍색 입술이, 이팔청춘의 꽃된 나이와 어울리는 풋풋한 아름다움을 지닌 미소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결코 갖지 못할, 그 나이대의 소녀만이 가질 수 있는 젊음이 거기 있었다.
‘······소첩은······. 소첩은······.’
그에 반해서 그녀의 나이는 마흔일곱이었다. 고절한 무공 때문에 젊음은 유지하고 있지만 그뿐. 항렬도 어머니, 아니 할머니뻘이요, 배분은 사부뻘이다.
그녀와 배분이 같은, 용봉지회에서 한때 봉(鳳)의 이름을 받았던 여인 중에는 이철수만한 손자가 있는 사람도 있었다.
배분도 높아서 부담스럽다. 화경의 고수와 비무에서 승리해야 혼인이 가능하다는 점도 걸림돌이다. 상공께서는 배분도 지위도 나이도 상관없다고 했지만, 현실적으로 봤을 때는 아니었다.
제자와 비교했을 때, 그녀는 모든 면에서 열세였다.
검후는 슬프게도 그 사실을 자각했다.
‘······소첩이 사내였더라도, 나이만 많은, 배분이 쓸데없이 높아 부담스러운 늙은 여인보다는 배분도 같고 나이도 비슷한 또래 여인을 선택할 테지요······.’
검후가 고개를 숙였다.
제자와 상공.
딸처럼 아끼는 소녀와 47년 일생에서 처음으로 마음에 품은 사랑하는 사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니.
이렇게 잔인한 상황에 놓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 잔인한 사실은, 소검후의 고백을 들은 순간 검후 마음 깊은 곳에는 이미 딸 같은 소검후에 대한 질투가 독버섯처럼 돋아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상공에게 버림받고 싶지 않다.
제자만 아니었더라면, 그렇다면······.
거기까지 생각한 소검후가 추한 질투를 억눌렀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상공, 소첩은 어찌해야 할까요. 소첩을 버리지는 말아주세요. 염치없지만······. 소첩을······. 소첩이······. 소첩이 더······. 잘할 테니까······. 소첩은, 이미 상공이 없으면 안 되는 몸이 되었으니까······.’
그녀의 어깨가 떨렸다. 시야가 흐려졌다. 참아왔던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이제 그분이 없으면 안 된다.
그분이 아닌 다른 사내는 싫다. 오직 그만이 그녀의 지아비가 될 수 있었다.
나를 선택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30년 전, 철없을 때 내뱉은 저주받은 선언이 아직 그녀를 구속하고 있었으니까.
정파 무림이 보는 앞이다.
공석이다.
이런 장소에서 항산을 대표하는 검후인 그녀가 울어서는 안 됐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터져 나오는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또르륵.
그녀의 은빛 눈동자에서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어젯밤이라니, 대체 공동괴협과 천 소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괜히 색협이라는 소문이 돌았겠소? 둘 사이에 거사가 치러진 것이 분명하오!”
“허, 그 도도한 천 소저를 홀리다니. 공동괴협의 솜씨가 보통이 아니구려.”
“차가운 은 여협께서 눈물을 흘리다니, 대체 얼마나 충격을 받으셨으면······.”
“그만큼 청천벽력이라는 뜻이지. 나라도 그랬을 걸세. 에잉, 쯧쯧. 일문의 장문인이 될 대제자가 중인환시리에 공석에서 사사로이 사내한테 연모의 정을 고백하다니. 항산파의 체면이 말이 아니겠어.”
중인들이 웅성거렸다.
웅성거림을 들은 소검후 천소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부님께서 흘리는 눈물도, 아버지의 호통도 아직 그녀의 귓가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죄송해요. 사부님. 아버님. 하지만 모두를 위해서는······. 체면도 수치도 모르는 색마 이철수를 상대하려면······. 제가 희생하는 방법밖에는 없었어요.’
하지만 소검후 천소빈은 멈추지 않았다.
중인들의 손가락질도, 아버님과 사부님의 질타도 이미 각오했던 일이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리라 각오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사부님만 행복할 수 있다면, 다시 모두 원래대로 돌릴 수 있다면.
천소빈은 그 어떤 오명도 감수할 것이다.
그렇게 다짐했다.
천소빈이 떨리는 목소리로, 이철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예, 아버님. 사부님. 소녀는······. 소녀는 이철수 공자님을 이미 마음 깊이 연모하고 있어요. 어젯밤에 공자님과 있었던 일을······. 소녀는 결코 잊을 수 없어요. 공자님을 향한 소녀의 마음은 사부님과 아버님이 아무리 다시 물어도 변하지 않아요. 소녀는······. 이 공자님과 백년가약을 맺을 거예요!”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내뱉은 선언이다.
되돌릴 수 없다.
설령 이철수라도, 어제처럼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물론 그녀도 마찬가지지만, 이미 더럽히리라 각오한 몸이다.
두렵지 않았다.
사부님을 위해서라면.
“아, 안 된다. 소빈아. 안 돼······!!”
천소빈의 굳은 얼굴에 아버지가 뒷목을 잡고 쓰러지고, 검후가 입술을 깨문 그때.
“······정말, 감탄이 나오는군요. 천 소저.”
살얼음 같은 고요를 깨뜨리는 목소리가 대연무장을 울렸다.
곧이어 웅성대는 중인들 사이를 헤치고 검은 무복을 입은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동괴협 이철수.
소검후 고백 당사자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소검후가 입술을 깨물었다.
*
공개 고백이라니.
소검후가 아무리 검후 사생팬 1호라지만, 이런 미친 수까지는 쓸 거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그야 이건 현대식으로 따지자면 자폭 테러나 마찬가지였다. 내게 공개 고백을 했다는 건 유교랜드인 이세계 중세 무림에서는 나 말고 다른 사내에게는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천명하는 것.
그래도 재벌 3세 아가씨에 강호 무림 유망주인데.
대체 왜 이런 미친 짓을 하는 거지? 어이가 없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북경 조정에서 동림당 대신들을 모조리 족치고 절대 권력을 쥐고 서출 공주를 황제로 앉혀 대명제국을 지배한 구천구백구십구세의 간신. 망탁조의와 호형호제하고 중원은 물론 왜국과 조선에서도 천조(天朝)에 망조가 들었다며 손가락질하던 망국의 권신 이철수다.
북경 조정이라고 다 정상인만 있는 건 아니었다. 소검후처럼 미친 놈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미친놈을 상대하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검후 님에 대한 저의 마음을, 저의 의지를 시험하기 위해 이렇게 스스로를 희생해서 제게 거짓으로 연정을 고백하다니!”
그건 바로 프레임을 거꾸로 뒤집어 내게 유리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 말을 들은 소검후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천 소저의 심정, 제가 모르는 바 아닙니다. 제가 어디서 굴러들어온 지 모르는 어중이떠중이처럼 보였겠죠. 천 소저한테는 사부님. 사사로이는 어머님처럼 여기는 존경하는 사부님을 저 같은 망나니한테 내줄 수 없다는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래서 혼삿길이 막힐 각오까지 하면서 제게 그런 말을 한 거겠죠. 하지만 방법이 잘못되었습니다. 천 소저. 그렇게 거짓으로 연정을 고백하며 스스로를 희생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뚜벅뚜벅 걸으면서, 천소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왜냐하면 저는······. 제가 검후 선배한테 도전을 천명한 건, 그분을 마음에 품었기 때문이니까요. 만일 성년이 되어 그분과의 비무에서 승리해서 검후 선배를 아내로 맞이한다면······. 선배와 백년해로하는 건 물론이요, 천 소저도 잘 대해드릴 것이······.”
내 말을 듣던 검후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내가 말을 이어가던 그때.
“거짓이 아니에요! 공자님! 진심이에요! 그러니 제 마음을······. 부디 받아주세요!”
천소빈이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나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프레임을 뒤집었는데도 이렇게 나오다니.
좋게 좋게 소검후 평판도 수습하고 이 일을 잘 끝내보려고 했더니.
어쩔 수 없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정녕 천 소저께서 검후 선배에 대한 제 마음을 시험하고 싶으시다면······.”
스르릉.
나는 검을 뽑았다. 싸구려에서 하등품으로 업그레이드된 철검의 칼날이 항산을 비추는 햇빛을 받아 빛났다.
“······천 소저와 강호의 방식으로 시시비비를 가릴 수밖에 없겠군요.”
내가 검을 뽑자 관중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검후의 은빛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천소빈의 아버지인 천무전의 불타는 눈동자도 내게 향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조정에서도 그랬다.
말로 해서 좋게 끝날 일을, 괜히 반항해서 옥사도 당하고 귀양도 가고 고문받고 목 날아가고 그랬다.
강호 무림도 똑같다.
하여간 꼭 이렇게 일을 키워서 매를 번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