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마음에 품은 상대
소검후 천소빈.
사룡오봉에 드는 후기지수는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실력을 지닌 후기지수.
산서제일상단이자 중원 십대 상방의 일좌로도 꼽히는 산서진상(山西晉商)의 수좌인 천일상단이 본가인 금수저.
현대로 치면 재벌 3세인데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재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만큼 중요한 인물이기에 그녀에 대한 정보는 이미 회귀 전부터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미래에 그녀가 도달하는 경지는 초절정. 미래의 천소빈은 화경의 벽을 끝내 넘지 못했다.
하지만 초절정까지 그녀는 빠르게 경지를 돌파했다. 아마 지금쯤 나와는 달리 절정의 벽을 마주하고 있겠지.
내가 설마 구파일방 한복판, 내 숙소에 쳐들어오는 미친놈이 있겠어? 라고 피곤해서 잠시 기감을 느슨하게 한 것도 그녀의 침입을 허용하게 된 원인이기도 하고.
그런데 그런 귀하게 자란 아가씨가, 밤에 내 배 위에 올라탄 채로 뭐?
운우지락을 하자고?
내 시선과 천소빈의 시선이 마주쳤다.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설마 미친 건가? 그건 아니다.
천소빈은 멍청하지 않다. 오히려 똑똑한 편에 속한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감정 교류도 없었다.’
운우지락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남녀 두 사람의 통정이 극에 이르렀을 때, 맺히는 사랑의 결실. 심신을 모두 만족하는 종합예술의 즐거움이다.
정이 없는 운우지락(雲雨之樂)은 즐거움(樂)이라 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저 추잡하고 공허한 육체적 교접일 뿐이었다.
‘육체적 교접으로만 끝나면 다행이지.’
어쩌면 그 이상으로 최악의 결과가 기다릴 수도 있었다.
소검후와 나는 감정은커녕 제대로 말조차 섞은 기억도 없었다.
얼굴만 알지 초면이나 다름없는 사이.
그게 나와 소검후의 사이였다.
그런 사이에서 갑자기 운우지락을 한다고 내 방에 숨어들어온다? 어쩌면 이 상황 자체가 함정일 수도 있었다. 내게 누명을 씌워 나락으로 빠뜨리려는 함정 말이다.
현대식 표현으로 하자면 허니 트랩.
동창에서도 자주 쓰던 방식이었다. 미인계로 유혹한 뒤 성 추문을 퍼뜨려 누명을 씌우고 상대를 나락으로 빠뜨리는.
물론 이렇게 너무 대놓고, 속이 다 보이게 작업하지는 않지만.
나와 시선이 마주친 그녀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왜, 대, 대답하지 않는 거죠? 흥. 무, 무려 소검후인 제가 당신과 자, 잠자리를 함께하고 싶다고 말하는 거예요! 여, 영광이라고 생각은 못할망정······.”
소검후가 붉어진 얼굴로 횡설수설했다.
덥석. 나는 금나수의 수법을 응용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
소검후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제압해서 침대에 눕혔다.
“······조, 좋아요. 어, 얼마든지······. 마음껏 해도 좋아요. 대, 대신 반드시 절 책임······.”
소검후가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시선을 돌리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여전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완맥을 제압해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채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한다고 한 적이 없는데.”
“······네?”
“너랑 운우지락을 나누겠다고 답한 적 없단 이야기다. 이건, 네가 허튼수작 부릴까 봐 제압한 거고.”
“허, 허튼수작이라니······. 그게 무슨······. 저, 저는 순수하게 당신을 사모해서······. 당신의 품에 안기려고 세간의 눈을 피해 이렇게······. 온 건데······.”
천소빈이 내 시선을 피하면서 말했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야밤중에 미소녀가 얼굴을 붉히고 사랑 고백하면서 안아달라고 말한다. 내가 색마였다면 여기에 바로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색마가 아니다. 나는 욕망의 노예가 아니다. 나는 욕망의 주인이자 색도의 일대종사.
색마처럼 양물이 아닌 냉철한 이성으로 사고하는 사내.
그러니 소검후의 허니 트랩에는 넘어가지 않는다.
“네 말에는 진심이 없어.”
나는 소검후를 진지하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지, 진심이 없다뇨······. 저는······.”
“너는 날 사모하지 않아. 그런데도 내 침대에 숨어들었다는 건, 네게 다른 의도가 있어서겠지.”
나는 그녀의 완맥을 단단히 제압한 채로 소검후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머리가 차가워졌다.
“다, 다른 의도라뇨?!”
내 말에 물고기처럼 펄떡 뛰는 소검후.
그녀의 눈동자가 떨렸다.
거참 연기 더럽게 못 하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는 정을 통하지 않은 여인과 밤을 같이 보내지 않는다. 네가 뭘 노린 건지는 대강 짐작이 가지만, 너와 함께 밤을 보내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내가 마음에 품은 상대는 네가 아니라 검후 은설란이니까.”
이게 어디서 나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나와 눈이 마주친 소검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거짓말, 아녀자라면 다 좋아하는 새, 색마인 주제에······. 어, 어째서 저를 거부하는 거죠?! 저는 소검후 천소빈이에요. 소검후인 제가 당신을 좋아한다고, 당신과 함께 운우지락을 나누고 당신을 지아비로 맞이하겠다는 말이라고요! 어차피 당신이 사부님을 좋아한다는 말도 진심이 아니······.”
“진심이야.”
나는 소검후 천소빈을 바라보며 말했다.
군사부일체.
강호 무림에서 사제관계는 부모자식관계와 같이 여긴다. 따라서 내가 검후와 소검후를 동시에 취하는 건 정파 무림의 지탄을 받을 일이다.
물론 부정적인 여론마저 압살할 정도로 압도적인 위치, 내가 위소련에게 말한 대로 정사 무림을 아우르는 영웅이 된다면 상관없겠지만.
그걸 떠나 눈앞의 소검후 천소빈은 나를 정말로 사랑해서 침대에 숨어든 것이 아니다.
‘검후와 나의 관계를 방해하기 위해서로군.’
소검후인 본인이 나와 맺어진다면, 검후와 나는 맺어질 수 없다.
그런 발상으로 검후 사생팬 1호인 그녀가 내게 몸을 던지러 온 것이다.
당연히 마음은 없다.
그러니 이것은 올바른 색도가 아니다.
“나는 검후 은설란을 마음에 품었다. 그러니 헛짓 그만하고 나가. 소검후 천소빈. 아니, 이대로면 네가 안 나갈 테니, 차라리 내가 나가도록 하지. 나가서 검후 님께 하나뿐인 제자가 한 음란 행위를 그대로 고하겠다.”
나는 완맥을 제압한 채로 소검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항산파의 장문제자이자 검후의 하나뿐인 제자가 야밤에 공동파 소년 제자의 방에 몰래 숨어들어서 운우지락을 나누자 청했다?
지금 공동파는 어쨌거나 항산파에 손님으로 온 상황.
그런데 이런 스캔들이 터진다면, 소검후의 지위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이세계 중세 무림은 아직 유교가 지배하는 세상이었으니.
여인이 먼저 사내의 숙소에 침입하는 건 음란하다고 지탄받을 일인 것이다.
“지, 진심인가요?!”
“그래. 진심이다.”
나는 소검후를 바라보면서, 제압한 그녀를 내버려 둔 채로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드르륵하고 열었다.
내가 막 발걸음을 밖으로 옮기려던 그때.
“잠깐만요. 나, 나가면 되잖아요. 나가면······.”
소검후가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주섬주섬 옷맵시를 매만지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그녀의 흑발과 은발이 뒤섞인 투톤헤어가 달빛을 받아 빛났다.
그녀가 나를 찌릿하고 노려보면서, 방을 나가면서 내게 말했다.
“오늘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저는 공자님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니까요! 제 마음을 반드시 공자님한테 전달하고 말겠어요!”
마지막까지 어색한 연기라니.
애쓴다.
“마음대로 해라.”
드르륵.
나는 소검후를 내보내면서 매정하게 미닫이문을 닫았다.
기감으로 소검후의 기척이 빠르게 별채에서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잠이 다 깼다. 한창 성장기라 키가 클려면 일찍 자야 하는데.
나는 한숨을 쉬면서 봇짐을 뒤져 끈과 무게추 역할을 하는 돌멩이를 꺼냈다.
이왕 잠에서 깼으니 행잉이나 하고 자야지.
*
달빛이 내려앉은 항산파.
고루거각이 끊임없이 늘어선 본산 내부.
경계를 서는 제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잠자리에 들었는지 고요에 빠진 본산 내부를 소검후 천소빈은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치욕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가, 감히 저, 저를 거부하다니······. 색마 주제에······!’
탁.
천소빈의 발걸음이 멈춰섰다.
그녀의 시선이 공동파 일행이 머무르는 접객당 별채 쪽을 향했다.
‘고백까지 했는데······!’
믿을 수 없었다.
정파제일미인 사부님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강호 무림의 후기지수 중에서는 손에 꼽힐 정도의 미모를 자랑하는 그녀였다.
박색이라면 모를까, 제법 미색이 출중하다 평가받는 여인인 그녀를 이렇게 매몰차게 차버릴 줄은 그녀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색마 주제에 말이다.
천소빈이 입술을 깨물었다.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에도 없지만, 무려 소검후인 그녀가 먼저 그에게 고백까지 했다.
그를 연모하고 있다 속삭였다.
안아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차였다.
그것도 매몰차게.
비참했다. 그녀의 뺨이 파르르 떨렸다.
굴욕적이었다. 색마 따위가 감히······. 산서제일상단 천일상단의 금지옥엽이자 항산파의 장문제자인 소검후 천소빈을 차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보통의 사내라면 오히려 그녀를 떠받들어야 정상이었다. 색마라면 앞뒤 안 가리고 그녀를 덮쳐야 정상이었다.
‘가, 감히 제가 모, 몸을 내주겠다고 했는데도······!’
사부님을 위해서라면.
색마 이철수에게 몸을 더럽힐 각오 정도는 되어 있었다. 그렇게 오늘 이철수와 하룻밤을 보낸 뒤 이철수와 혼인할 생각이었다.
모든 건 사부님을 위해서였다.
사부님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색마 이철수와의 혼인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철수가 역으로 그녀를 침대에 눕힌 순간, 천소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뭐가 사부님을 진심으로 마음에 담았다는 거죠? 색마 주제에······!’
이철수의 말이 천소빈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검후 은설란을 마음에 담았으니, 너는 받아줄 수 없다.
네 마음은 진심이 아니다.
그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렇게 말하며 그녀를 바라보던 이철수의 시선이 그녀의 뇌리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천산의 만년설처럼, 북해의 빙산처럼 그녀의 본심을 꿰뚫는 듯한 차갑고 냉정한 시선.
도저히 소문처럼 색마라고 여겨지지 않는 그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어쩌면 사부님께서 이철수에게 반한 것도 그의 그런 모습 때문은 아닐까?
세간의 소문은 거짓말이고, 사부님과 이철수는 정말로 순수하게 서로 정을 통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실낱 같은 의문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 천소빈이 입술을 깨물었다.
“말도 안 돼. 거짓말이에요. 전부 거짓말!”
천소빈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래.
전부 거짓말이다.
전부 이철수의 더러운 가식이자 역겨운 위선일 뿐이다. 놈은 색마다. 이번에는 그녀가 실수했을 뿐이다.
첫 번째 계획은 실패했다.
그러니 사부님을 지키기 위해서.
내일, 생각만 해둔 다음 계획을 실행해야 했다.
내일 계획이 성공적으로 실행된다면, 이철수도 이제 그녀의 진심을 의심하지 못할 것이다.
‘모든 건 사부님을 위해서예요!’
천소빈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
항산파와 공동파의 교류 경연.
세간에서 일컫기를 항산대전이라 불리는 이 대회는 이철수를 견제하려 퍼뜨린 소문 때문에 지역 무림 사회는 물론 강호 무림 전체에서도 제법 화제였다.
1년 전의 정사지쟁 이후 이렇다 할 대외 활동이 없었던 공동파였다.
거기에 1년 후에는 용봉지회가 소림에서 개최 예정이었다. 항산대전은 장막으로 가려져 있던 공동파의 후기지수 전력을 가늠할 수 있는 지렛대가 되기에 충분했다.
거기에 소림과 개방이 공존하는 하남, 화산과 종남이 서안을 두고 눈을 부라리는 섬서와는 달리 산서에는 오직 항산파만이 정점에서 군림하고 있었다.
그런 항산파가 여는 경연이었다. 지역 유지들의 관심을 안 받을 수가 없었다.
특히 산서성은 중원 십대 상방 중에서도 가장 역사가 깊은 산서진상의 본거지였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항산대전 당일에 수많은 외부 방문객이 항산파에 몰려든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상인들은 물론 산서 무림의 명숙들, 거기에 산서성과 접경한 지역인 하남, 섬서, 하북의 대문파인 소림, 개방, 화산, 종남, 팽가의 무인들까지 모두 항산파에 결집한 지금.
정파 무림의 시선이 모두 집중된 항산대전이 열리는 항산파 대연무장에서 지금, 충격적인 선언이 하늘을 울렸다.
“이철수 공자님! 저, 천소빈은······. 아니 소녀는······. 어젯밤 공자님의 대장부다운 모습에 반하고 말았어요! 부디 소녀의 마음을 받아주세요!”
소검후 천소빈.
그가 천하의 공동괴협, 아니 사사로이는 색협이라고도 불리는 이철수에게 공개 고백을 내뱉은 것이다.
바야흐로 정사지쟁에서 이철수가 검후에게 내지른 고백 공격이 태극의 묘리처럼 역으로 되돌아오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