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환관이 남성을 되찾음-92화 (92/171)

92화 사부님을 위해서

소검후는 황급히 서책을 덮었다.

더 이상 서책을 보는 건, 사부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누가 봐도 이 일기는 사적인 일기였다. 타인에게 보여주려고 만든 기록이 아니다. 제자된 몸으로서 함부로 엿볼 수 없는 거였다.

그리고 천소빈은 더 이상 일기를 읽는 것 자체가 두려웠다.

잠깐 훔쳐본 내용만 해도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일기 전체를 읽는다면?

소검후는 진실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덮었다.

“이건······.”

그녀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상공, 소첩.

이 단어가 문맥상 누구를 의미하는지 모를 정도로 천소빈은 멍청하지 않았다.

항산파에 입문하기 전부터 본가에서 재녀라 불렸던 그녀였다.

그녀의 똑똑한 머리는 그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잠깐 스쳐봤던 검후 일기 내용을 완벽히 기억했다.

“······사부님이······. 사부님이······.”

스스로 지아비를 선택하기 위해 30년이 넘도록 독수공방을 자처했다.

천소빈이 동경했던 사부는 그랬다.

실제로 사부님은 지금까지 어떤 사내에게도 정을 주지 않고 원칙을 지켰다.

냉랭한 얼굴로 말이다.

모든 강호 여고수의 우상인 사부였다.

그래, 그랬는데.

이 남보기에도 부끄러운, 냉철한 사부님이 적었다고는 믿을 수 없는 남사스러운 일기는 대체 무엇인가.

믿을 수 없다.

하지만 일기의 필체는 그녀가 동경하는 사부님과 정확히 일치했다.

이건 사부님의 일기다.

그녀의 똑똑한 머리는 그렇게 판단했다.

천소빈이 손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사부님이 누군가에게, 특히 30년은 어린 홍안(紅顔)의 소년을 진심으로 좋아할 리 없다. 배분은 제자, 항렬은 자식에서 손자뻘인 상대를 말이다.

그래.

사부님은 틀리지 않았다.

검후의 광신도인 소검후 천소빈의 머릿속에 있는 대전제가 사고를 왜곡했다.

검후는 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를 이렇게 타락하고 유혹한 건······.

“······이철수 이 빌어먹을 화화공자가 기어코······!!”

이철수였다.

부끄러움도 수치도 모르고 사부님에게 정사지쟁이라는 공석(公席)에서 사사로이 사부님에게 도전을 신청하며 모욕을 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게다가 이철수라는 사내의 주변에는 염문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은 공동파의 시비로 전락한 서문세가의 금지옥엽, 검봉 서문청하부터 사천제일기녀 염희 능월향까지.

여인을 쉴 새 없이 갈아치우는 화화공자 이철수가, 30년을 넘게 독수공방한 검후의 마음을 농락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사부님께서는 놈한테 속은 것이 분명해······!’

놈의 매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절벽 위의 꽃이자 모든 풍류공자의 우상이라는 능월향에게 가가라는 호칭을 받아낸 자가 이철수였다.

능수능란한 풍류공자인 그의 감언이설에 30년을 넘게 독수공방한 순진한 소녀 같은 그녀의 사부님이 넘어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이철수를 막아야 해······!”

천소빈의 손이 떨렸다.

이철수의 추악한 진실을 깨달은 그녀의 뺨이 떨렸다. 그런 파렴치한에게 사부님을 내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 직접 도전자 자격을 인정한 이상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기껏해야 소문을 퍼뜨려 그에게 망신을 주는 것이 전부일 뿐이었다.

수치를 아는 사내라면 소문을 듣고 도전을 철회할 것이다.

하지만 이철수는 정사지쟁의 자리에서 공개 고백을 할 정도로 부끄러움도 체면도 모르는 파렴치한.

그는 그런 소문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부님의 이 일기를 외부에 알리는 건 불가능했다. 이건 사문의 치부이자, 사부님의 비밀이었다. 타인의 비밀을 몰래 엿본 것에 불과한 그녀가 이 사실을 누설하는 건 예의에도 어긋나며 항산파의 체면을 무너뜨리는 행위였다.

그녀가 봤던 일기의 내용은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됐다.

특히 이철수와 사부님에게는 더더욱.

철면피 화화공자 이철수가 이 사실을 안다면 순진무구한 사부님을 더 노골적으로 이용하려 들 것이다.

그러니 문제의 근원을 제거하는 건 불가능했다.

“아니야······.”

불가능?

아닐 수도 있었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차라리 사부님 대신 제자인 내가 희생한다면······.”

그녀의 몸이 떨렸다.

정파제일미녀라 칭해지는 사부님만큼은 아니지만, 그녀 역시 제법 미소녀였다.

게다가 사부님과는 달리 그녀는 이철수와 항렬도 같았다. 한 살 연상이라는 사소한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철수도 사내.

또래 여인을 더 선호할 것이다.

“내가 막아야 해.”

사부님을 위해서라면.

소검후는 뭐든 할 수 있었다. 그 일이 설령 사내에게 몸을 바치는 일이라도.

그녀가 지옥에 떨어져도 사부님께서 극락에 간다면, 기꺼이 팔열지옥의 불구덩이에 몸을 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다.

소검후가 입술을 깨물었다.

“내 몸을 바쳐서라도.”

사부님을 지킬 수만 있다면.

그녀는 기꺼이 이철수에게 몸을 바칠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 구원해준 인생이었다. 사부님의 은혜를 갚으려면 그 정도로도 모자랐다.

그러니 괜찮았다.

정략결혼과는 달랐다. 이건 그녀의 선택이었다. 사부님을 구하기 위한 선택. 사부님을 지키기 위한 선택. 사부님의 은혜를 갚기 위한 선택이었다.

소검후의 눈이 타올랐다.

“여자라면 모두 좋다면, 좋아요. 제가 사부님을 대신하죠. 이철수. 당신은 절대 사부님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릴 수 없어요.”

결심한 소검후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녀가 이철수의 여인이 된다면, 이철수도 사부님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철수는 사부님을 장모처럼 모셔야 할 테니 말이다.

그녀 하나만 희생한다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전부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다.

소검후는 그렇게 결심하면서 입술을 깨물며 일기를 원래 상태로 돌려놓았다.

*

공동파 일행과 함께 산을 오르는 검후는 필사적인 심정으로 얼굴 근육을 통제하며 무표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녀의 심장은 계속해서 뛰고 있었다.

‘상공께서 지금 내 옆을 걷고 있어. 상공······. 어찌 이리 1년 사이에 더 멋져지셨는지······. 소첩의 심장은 벌써 상공을 향해 뛰고 있어요······.’

검후는 화경의 경지에 이른 무위를 이용, 주변의 항산파 문도와 공동파 일행이 눈치채지 못하게 이철수의 모습을 흘끔흘끔 눈에 담았다.

1년 전보다 확연히 훌쩍 커버린 키와 무복 아래 탄탄해진 근육, 더 잘생겨진 외모까지.

침상 위에서 잠들기 전 밤마다 상상으로 그렸던 모습보다 더 멋져진 상공이 거기 있었다.

‘상공, 소첩. 상공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담아두고 싶어요.’

검후가 속으로 웃었다.

오늘부터다.

오늘부터 보름이라는 시간 동안 상공께서 항산에 머무를 예정이다.

일 년 전 그날처럼 계속 그분을 볼 수 있다.

일기에 상공의 행적과 성장기를 기록할 수 있다.

상공의 실력을 볼 수 있다.

그 사실이 검후의 가슴을 계속 설레게 했다.

험준하기 짝이 없는 절벽길이 계속 이어지는 산행이었지만, 검후의 발길은 깃털처럼 가뿐했고 마음은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두근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검후의 시야에 검각(劍閣)이라는 글씨가 쓰인 현판이 달린 대문이 보였다.

항산파 산문이다.

검각의 현판은 항산파 초대 장문인이자 검각의 마지막 장문인이었던 이십대 검후가 혈교의 난 당시 불타던 검각에서 챙겨나온 유물.

언젠가 절강성 보타산의 검각 본산을 되찾았을 때, 산문에 걸기 위해 지금까지 간직해온 항산파의 신물이었다.

탁.

검후가 산문 앞에 섰다.

그녀의 시야에 공동파 일행과 그녀와 함께 안내역을 맡은 제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두근.

검후의 심장이 다시 뛰었다. 마침내, 상공을 마음껏 쳐다봐도 되는 시간이 도래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마음껏 상공의 모습을 시야에 담으리라.

‘꺄아!’

검후는 속으로 기쁨의 비명을 지르면서 상공과 공동파 일행을 바라보며 말했다.

“항산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끼이이익.

그녀의 말과 함께 육중한 산문이 열렸다.

산문 너머에는 구대문파의 일좌를 차지하는 명문대파에 걸맞게 운해(雲海)를 배경으로 끝없이 들어선 고루거각들이 늘어서 있었다.

마치 전성기 공동파를 보는 듯한 압도적인 규모의 항산파 본산에 서하린과 유진휘의 눈동자가 커졌다.

자금성을 제 집처럼 사용했던 이철수, 서문세가 출신 금지옥엽 아가씨인 서문청하, 강호행 경험이 많은 전영과는 달리 서하린과 유진휘는 이번 항산파 행 전까지 평생 감숙성을 벗어나 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난주의 서문세가와 비견될 만한 규모였지만, 도시 한복판에 있는 서문세가 본가와는 달리 항산파 본산은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을 감싼 구름 위에 세워진 형상이라 더더욱 신비로워 보였다.

두근.

본산을 공개한 검후의 심장은 계속해서 뛰고 있었다.

‘사, 상공께서 본 파의 풍경을 좋아하셔야 할 텐데······.’

검후에게 공동파가 시댁이라면 항산파는 친정.

친정에 처음으로 상공께서 발걸음한 것이다.

오늘을 대비해서 소검후와 제자들에게 본산 구석구석 대청소를 지시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불안했다.

흘끔.

검후의 은빛 눈동자가 이철수의 안색을 살폈다.

다행히 이철수의 표정은 무덤덤하고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역시 상공. 침착한 모습도 멋져요. 후후. 놀란 표정을 짓는 유 아주버님과 서 아가씨도 귀여워요.’

검후는 속으로 그렇게 말하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안내를 계속했다.

“접객당은 이쪽입니다.”

그렇게 도착한 항산파의 접객당은 웬만한 고급 객잔보다 더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그리고 검후가 직접 지정한 공동파 일행의 처소는 그 접객당에서도 가장 귀한 손님들에게만 내어준다는 별채였다.

“공동파 손님 분들이 머무를 장소는 이 별채입니다. 방 앞에 미리 손님분들의 명패를 걸어뒀으니 확인해주시길. 그럼 먼 길 오느라 고생했습니다.”

“검후 님의 환대에 감사합니다. 본 파는 귀 파의 환대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전 대협. 저야말로 본 파의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영의 인사에 검후는 황급히 마주 포권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사부인 전영은 그녀에게 시아버지뻘 될 사람.

잘 보여야 하는 건 당연했다.

검후는 마지막으로 이철수의 안색을 살폈다. 고급 별채를 보는 이철수의 눈빛에 만족스러운 감정이 담기는 걸 본 검후의 입꼬리가 떨렸다.

그녀의 마음에 환희가 차올랐다.

동시에 이제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검후의 마음이 찢어질 듯 슬펐다.

‘상공께서 숙소가 마음에 드신 것 같아서 다행이야. 상공. 소첩은 이제 상공과 헤어져야만 해요. 더 보고 싶지만······. 내일 또 상공을 뵐 수 있으니 소첩은 참을게요.’

검후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면서 인사했다.

“손님분들 집이라고 생각하시고 편하게 지내면서 여독을 푸시길.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검후는 마지막까지 이철수의 모습을 눈동자에 담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두근.

그녀의 심장이 미칠 듯이 계속 뛰었다.

*

검후와 항산파 제자들이 물러난 뒤.

우리는 항산파에서 제공한 석식을 먹은 후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항산파 별채는 하나의 장원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였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일행은 각자 개인실을 쓸 수 있었다.

‘개인실을 쓸 수 있어 다행이군.’

아니면 사형과 같이 잤을 텐데.

남자와 같은 침대를 쓴다니, 내 사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케겔 운동과 함께 침대에 누웠다.

중원의 변방인 감숙성에서 산서성까지 꽤 먼 거리를 여행해온 탓일까.

여행 도중에도 케겔, 젤크, 행잉 운동을 멈추지 않은 탓일까.

몸에 제법 피로가 쌓였다.

슬슬 눈이 감긴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케겔 운동을 진행하면서, 스르르 눈을 감았다.

기감이 무뎌진다. 의식이 어둠 저편으로 날아가려던 그때.

“······어나세요!”

귓가에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제 막 자려던 참이었는데.

대체 누가 깨우는 거지?

“일어나세요!”

낯선 목소리는 여자 목소리였다.

잠깐, 여자 목소리라고? 이 밤에? 내 개인실에?

게다가 내 배에 뭔가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무게감이라니?

갑자기 소름이 돋은 나는 눈꺼풀을 번쩍 들어 올렸다.

시야는 금방 또렷해졌고, 나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일어나셨군요.”

흑발 사이사이에 은색 머리카락이 브릿지 비슷하게 섞인 투톤헤어가 인상적인 내 또래의 미소녀.

소검후 천소빈.

그녀가 붉어진 얼굴로, 내 배 위에 올라탄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천소빈이, 오밤중에 내 방에 침입해서 내 배 위에 올라탔다고?

이게 무슨 미친 상황이지?

“야, 너······.”

“딱 한 번만 말할게요. 그 귀 열고 잘 들어요!”

내가 뭔가 말하려던 그때, 천소빈이 단호한 목소리로 내 말허리를 잘랐다.

그녀가 가슴 위에 손을 얹으면서, 심호흡하면서 눈을 감았다 뜨며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천소빈의 입술이 열렸다.

“······해요. 운우지락. 저랑. 지금 당장.”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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