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진실의 무게
항산파 본산. 월은각.
장문인 집무실의 미닫이문이 열렸다.
“사부님!”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소검후 천소빈.
검후의 하나뿐인 제자이자 장차 항산파의 장문인 자리와 검후의 별호를 이어받을 항산파의 장문제자였다.
천소빈의 은발이 섞인 흑발이 흩날렸다.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급한 것이더냐. 소빈아. 매사에 그렇게 성급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 천소빈을 바라보던 은발 미녀, 검후가 조용한 목소리로 소검후를 타일렀다.
천소빈이 숨을 고르면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사부님. 하지만 워낙 급보라서······.”
“어떤 소식이길래 그러느냐.”
탁.
검후가 조용히 쓰던 일기장을 소검후가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덮으면서 말했다.
“이철수와 공동파 일행이 지금 산 아래에 도착······.”
하지만 뒤이어 나온 소식의 내용에 검후는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상공께서 벌써······!’
경연이 열리기 하루 전이었다.
물론 산서성에 들어온 이후 공동파 일행의 행보에 대해서는 그래도 내일 도착하겠거니 했다.
약속일은 경연 당일이었지 전날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루 전에 상공께서 도착한 것이다.
‘상공······. 소첩이 그렇게 보고 싶으셨던 걸까요? 꺄아! 후후. 소첩, 너무 좋아요. 상공을 하루 일찍 볼 수 있어서······!’
두근.
검후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볼 수 있다. 그분의 늠름한 모습을.
사모하는 임의 모습을.
그 사실을 깨달은 검후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럴 때가 아니야, 어서 상공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상공과 함께하지 않으면······.’
상공이 온 이상, 일각이라도 빨리 그분과 만나야 했다.
아직은 정인이 아니니 사적으로 만날 수 없다.
그러니 상공과 만날 수 있는 공적인 명분이 있는 지금 최대한 명분을 활용해서 상공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려야 했다.
‘······그래야 상공께서 소첩을 사랑해주실 거야.’
상공의 주변에는 그녀만 있는 게 아니었다.
사천제일기녀 능월향부터 시작해서 사매인 서하린에 전속 시비로 전락한 검봉 서문청하까지.
그녀만큼은 아니지만 매력적인 여인들이 포진해있었다.
그런 그녀들을 견제하려면, 명분이 있을 때 상공과 일각이라도 더 함께해야 했다. 검후 본인이야말로 하나뿐인 현모양처라는 사실을 그분께 알려드려야 했다.
마음이 다급해진 검후가 결론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말이 정말이더냐? 손님이 왔다니. 장문인으로서 손님맞이를 소홀히 할 수는 없지. 지금 마중을 나가야겠구나. 소빈이 너는 나 대신 본산에서 경연 준비를 마무리하거라.”
“알겠어요.”
소검후에게 지시를 내린 검후가 빠르게 경공을 펼쳐 월은각을 나갔다.
지금 다른 일을 할 때가 아니다.
그녀에게는 상공이야말로 최우선이요, 그분과의 만남이야말로 촌각을 다퉈야 할 시급한 사안이었다.
팔랑.
그녀가 미처 궤짝에 넣지 못한 일기장이 바람을 맞아 팔랑거렸다.
*
항산.
중원 오악 중 북악으로 일컬어지는 명산이다.
참고로 이 오악 중에는 그 유명한 화산도 있었다. 화산파가 있는 그 화산 맞다.
북악은 예로부터 깎아지르는 듯한 바위 절벽으로 이루어진 험한 산세로 유명했다. 현대 중국에서 항산의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가 절벽에 지어진 절인 현공사(懸空寺)일 정도.
공동산도 서역으로부터 중원을 지키던 요충지이니만큼 제법 험한 산이었지만, 온통 절벽, 절벽, 절벽만 보이는 항산만큼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항산에 도착한 우리를 가장 먼저 맞이한 건, 백색 무복에 수레바퀴 문양, 법륜을 새긴 항산파의 제자였다.
“공동파 분들이군요. 본산에 기별을 넣었으니 잠시 기다려 주시길 바랍니다.”
항산파의 전신은 검각.
검각은 절강성 보타산에 있는, 당나라 시대에 건립된 사찰인 보제사(普濟寺)를 해적, 특히 왜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재가(在家) 무력대가 기원이다. 보제사가 비구니 사찰인만큼, 검각 역시 여인 단체였다.
보제사를 중심으로 보타산에 수많은 사찰이 들어서면서 재가 무력대 역시 확장되었고, 끝내 문파의 형태로 발전한 것이 과거의 검각이었다.
그래서 검각은 원래 불가 문파였으며, 춘추전국시대부터 내려오는 유명한 여인절학인 월녀검을 포함한 옛 강남의 절학과 함께 소림에 비견되는 항마절학을 보유한, 위세가 구파일방에 버금가는 명문정파였다.
물론 혈세신마와 혈교가 검각을 멸문시키고 보타산의 사찰을 전부 불태우고 불문에서 유래된 항마절학의 무맥이 혈교에 의해 강제로 끊어진 이후 새로 세워진 항산파에서는 불가의 성향이 옅어졌지만.
본질적으로는 불가 문파였기도 하고 보타산으로의 권토중래를 위해 아직 불교의 상징인 법륜을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항산파는 아미파 같은 비구니 문파는 아니라 재가 문파였기에 문도들의 혼인을 금지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역대 검후들은 미혼자보다는 기혼자가 더 많았다.
그러나 하필 당대의 검후가 독신이며, 지금의 항산파는 당대 검후 은설란의 팬클럽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항산파 제자들은 검후를 너무 지나치게 동경한 나머지, 검후의 독신까지 따라했다. 그래서 대부분 항산파의 제자는 검후가 혼인하기 전까지 본인들도 혼인하지 않겠다며 금혼을 불문율처럼 지키고 있었다.
심지어는 원래 금남의 구역도 아니었는데도 사내들의 방문을 자체적으로 꺼릴 정도.
이대로면 항산파가 독신 여고수들의 성지가 될 판국이다.
“······.”
항산으로 입산할 수 있는 입구를 지키는 항산파 제자들의 눈초리가 제법 매서웠다.
공동파와 항산파는 은원으로 이어진 관계기는 하지만, 원래부터 사이가 안 좋은 건 아니었다.
원래 공동파와 항산파 모두 혈교에 맞서 싸운 동지였으며, 초대 항산파 장문인이자 검각의 마지막 장문인인 이십 대 검후와 혼원검제는 맹우이자 전우였다.
하지만 50년 전 항산파가 공동파 대신 구대문파의 자리에 오르면서부터 미묘한 은원이 생겼는데, 지금 저 눈초리는 그런 단순한 은원 때문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이거 별로 환대받는 느낌은 아니군요.”
나는 나를 노골적으로 노려보는 항산파 제자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흥. 그럼 검후 님한테 중인환시리에 그, 그런 망언을 하고도 항산파에서 환대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신 건가요?!”
내 말에 즉답한 건 서문청하.
“그 정도는 나도 알거든.”
나는 서문청하의 말에 대꾸했다.
그래, 내가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고. 지금 항산파 제자들의 경계심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등신도 아니다.
그날의 공개 고백 이후. 가장 동요한 건 항산파였을 거다. 검후의 악성 팬클럽 말이다. 당연히 내가 직접 오는 오늘 경연 날만을 벼르고 있었을 테지.
실제로 공동산에서 항산까지 이동하면서 나는 객잔에서 이번 경연에 대한 소문을 엿들을 수 있었다.
항산대전에서 항산파의 제자들이 검후에게 도전하는 공동색협의 자격을 직접 시험한다는 둥, 항산대전에서 공동색협의 본색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는 둥 하는 소문들 말이다.
‘소검후의 짓이겠지.’
이렇게 수준 낮은 정보 공작과 유치해서 대응할 가치도 없는 3류 정치질.
굳이 구천구백구십구세 환관 이철수의 정치 경력을 들먹이지 않아도, 누가 한 짓인지 너무 뻔하다.
검후 사생팬 1호인 소검후가 한 일이 분명했다.
나라면 이렇게 안 했을 텐데.
공작을 숨길 생각은 있는지 모르겠다.
“흥. 나도 알거든이라니, 철면피가 따로 없군요! 우리가 지금 대체 누구 때문에 이런 따가운 시선을······.”
구시렁대는 서문청하를 무시하고 얼마나 기다렸을까.
기감에 저 멀리서 공기를 가르며 달려오는 압도적인 기파가 느껴졌다.
안 봐도 뻔하다.
검후다.
압도적인 존재감이 빠르게 가까워지더니, 곧이어 한 줄기 부드러운 바람과 함께 은빛 무복을 입은 은발 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십시오. 공동파 손님 여러분.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부족하지만 항산파의 장문인을 역임 중인 은설란이라 합니다.”
검후였다.
화경의 고수답게 그 험한 절벽을 뛰어넘으면서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멀쩡한 모습을 유지한 그녀가 우리 일행을 바라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포권을 취했다.
“검후 님을 다시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동파 장문인 전영이라고 합니다. 손님으로 머무르는 동안 귀 파에 신세를 조금 지겠습니다.”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전 대협. 그럼 본 파의 본산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의례적인 인사 교환이 끝났다.
특이한 점은 검후가 본산으로 향하는 길 안내를 자처했다는 점이다. 보통 인사만 하고 길 안내는 제자를 시키는 것이 국룰인데.
뭐 그만큼 항산파에서 경연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검후를 포함한 항산파 제자들의 안내를 받아 험준한 항산을 등반하기 시작했다.
*
검후가 이철수를 맞이하러 하산한 시각.
소검후 천소빈은 검후의 기척이 멀어지는 걸 감지하면서 웃었다.
“호호호호. 역시 사부님이에요.”
사부님.
검후 은설란.
모든 강호 여인의 우상이자, 그녀가 천하에서 가장 존경하고 동경하는 분.
누구보다 정파다우며 항상 타의 모범이 되는 사부님답게 오늘도 굳이 환대할 필요가 없는 공동파 일당을 직접 맞이하러 가지 않았는가?
‘공동파와 이철수는 꼴 보기 싫지만, 그래도 본 파의 체면이 있으니까요! 사부님께서는 본 파의 체면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신 거예요! 이 얼마나 존경스러운 모습일까요!’
아무리 상대와 은원 관계에 있더라도 일단 공동파는 항산파의 초대 손님.
당연히 문파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장문인이 직접 환대해야 했다.
물론 말이 그렇지, 실제로는 장문인도 사람이고 감정이 없을 수가 없기에 직접 실천하는 건 어려웠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저들에 대한 은원은 접어두고 문파를 위해 희생한 것이다.
그 모습이 소검후에게는 더없이 고귀해 보였다.
“아, 이럴 때가 아니죠. 사부님께서 지시하신 경연 준비를 마무리하지 않으면······.”
천소빈이 정신을 차렸다.
사부님께서 내린 명령이야말로 그녀에게는 최우선 순위였다.
천소빈은 사부님이 업무를 보던 탁자로 다가갔다.
“사부님, 제자가 잠시 사부님의 자리에 실례하겠어요.”
이 자리에 없는 검후를 향해 극진한 예의를 표하며 자리에 앉는 소검후 천소빈.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
‘사부님의 자리에 제가 앉다니!’
그녀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평생을 걸쳐 동경했던 사부님이었다.
산서제일상단의 아가씨로 태어나서 모자란 것 없이 자라난 천소빈이었다.
하지만 아가씨라도 혼인이라는 여인의 운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특히 상단주의 딸이니만큼 더더욱.
천소빈은 그녀를 기다리는 정략결혼의 운명을 받아들이기 싫었다.
그래서였다. 어릴 때부터 들었던 지아비는 스스로 선택하겠다는 검후의 이야기를 동경하기 시작한 건.
그래서 항산파에 입문했고, 나아가 피나는 노력 끝에 동경하는 검후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
소검후의 이름을 받은 이후부터, 본가에서는 더 이상 그녀에게 정략결혼을 강요하지 않았다.
천소빈은 태어날 때부터 그녀를 구속했던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제자는 사부님 덕분에 구원받았어요.’
이 모든 것이 사부님께서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검후를 동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평생을 걸쳐도 갚아도 모자랐다.
천소빈은 그렇게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탁자 위에 놓인 서책을 아무 생각 없이 펼쳤다.
팔랑팔랑.
그리고 서책의 내용을 본 순간.
천소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의 손이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렸다.
“상, 상공······? 소, 소첩······?”
그렇다.
천소빈이 펼친 서책의 정체는······.
이철수가 항산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나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검후의 비밀 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