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15세
“대비라니······.”
“그게 무슨 소리죠?!”
유진휘가 말끝을 흐리고 서문청하가 서하린을 바라봤다.
서하린은 알고 있었다.
유진휘.
그는 사내였지만, 이철수를 필요 이상으로 신경 쓰고 있었다.
서문청하.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은연중에 이철수에게 접근하는 모습을 서하린은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능월향······. 그녀는 보통 상대가 아닙니다. 그녀를 대적하려면······. 협력이 필요합니다.”
“제, 제가 왜 협력해야 하죠? 왜 능월향과 대적을······.”
서하린의 말에 서문청하가 말을 더듬었다.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서문 소저는 이 사형을 이대로 능월향한테 빼앗길 생각입니까?”
서문청하의 귓가에 서하린의 서늘한 말이 꽂혔다.
빼앗긴다.
적나라한 표현에 서문청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이철수가 했던 말이 맴돌았다. 음란 행위를 저지르는 일을 분명 그는 책임진다고 말했다.
게다가 그녀는 알고 있었다. 능월향이 정말로 이철수를 사모한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능월향이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오해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부터, 그가 책임진다고 말할 때부터.
쓸데없이 자꾸 이철수가 눈에 밟혔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 어쨌거나 이철수의 전속 시비가 아닌가?
전속 시비로서, 정파 무림의 동도로서 이철수가 기녀와 놀아나는 일탈을 용납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끝낸 서문청하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흥. 이철수 같은 사내 따위, 어떻게 되건 제 알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은 이 공자를 모시는 시비로서 그의 품행을 관리할 의무는 있으니······. 어쩔 수 없죠. 일단 들어는 보죠!”
서문청하의 말에 서하린이 이번에는 유진휘에게 고개를 돌렸다.
“유 사형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직도······. 저를 경계하고 계십니까?”
서하린의 말을 들은 유진휘가 침묵했다.
유진휘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능월향······.’
유진휘 역시 능월향의 충격적인 미모를 목격했다.
천하제일을 논해도 될 정도로 아름다운 그녀의 미모는, 유진휘가 생각하기에 본인의 미모보다 몇 배는 뛰어나 보였다.
‘나는······. 능월향을 이길 수 없어······.’
유진휘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이제 인정했다. 사형과 사제의 관계가 아닌, 여인으로서 사제를 사모했다.
그가 없으면 안 됐다. 그가 존재하지 않는 천하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무슨 수를 써도 사제를 지키고 싶다.
그의 곁에 있고 싶다. 천하제일인이 되어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강호 무림의 하늘이 되어서······.
그의 정부가 되고 싶다.
그것이 유진휘의 소망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사제가 능월향의 품에 안긴다면? 그녀가 봐도 매력적인 능월향이었다.
사제가 빠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거기에 이제는 검후마저 사제를 노리고 있지 않은가?
‘······.’
유진휘와 서하린의 시선이 마주쳤다.
텅 비어버린 서하린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마찬가지로 초점이 사라져 무겁게 가라앉은 유진휘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유 사형······.’
서하린은 유진휘를 의심하고 있었다.
유진휘는, 본인은 신경 쓴다고는 했지만 서하린의 눈에는 보였다.
그의 행동은 통상적인 사형제를 벗어나 있었다.
마치······. 연모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다. 거기에······. 묘하게 중성적인 외모까지.
서하린은 뛰어난 눈치로 유진휘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확실한 건 있었다.
‘······저는 알아요. 사형은 결국 절 선택할 수밖에 없어요.’
유진휘가 어떤 사람이건.
서하린은 그가 본인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형제인 그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손에 사형이 떨어진다면, 유진휘가 바라는 바가 무엇이건 성취하기 힘들어질 테니까.
‘나는······.’
유진휘 또한 그것을 알았다.
지금까지 연적 중에서 그녀에게 먼저 손을 내민 건 오직 서하린뿐이었다.
검후는 물론이고, 능월향까지.
그녀와 협력은커녕 안면도 튼 적 없었다.
게다가 검후와 능월향은 공동파가 아닌 타 문파 소속이다.
그녀들에게 사제가 가버린다면, 그렇다면 영원히 떠나버릴지도 몰랐다. 유진휘 본인의 손이 닿지 않는, 볼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릴지도 몰랐다.
그런 건 싫었다.
홀로 남기 싫었다.
사제가 필요했다. 그의 곁에 계속 있어야 했다.
‘사제의 곁에 계속 있으려면······. 사매와의 협력이 필요해.’
검후와 능월향에게 사제를 내어줄 수는 없다.
차라리 사매가 낫다.
같은 문파인 사매라면, 어쨌거나 계속 사제를 곁에 둘 수 있으니까.
유진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매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니. 사매를 내가 경계할 리가 없잖아? 필요한 일 있으면 불러. 나는 먼저 가볼게. 야밤에 사내인 내가 아녀자들과 만나는 건 결례니까.”
유진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입술을 깨물고 등을 돌렸다.
그녀는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았다.
결함이 있는 몸이다. 여인이되 여인이 아닌 괴물이다. 그러니 사제의 곁에 여인으로서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사매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런 현실이 너무 비참했다.
유진휘는 이를 악물면서 몸을 날려 접객당을 벗어났다.
“······그런데 유 공자는 왜 부른 거죠? 그는 사내잖아요?”
유진휘가 사라진 뒤, 서문청하가 서하린에게 물었다.
“유 사형도 이 사형의 사형이니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서문 소저도 저와 협력할 겁니까?”
서하린이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돌렸다.
고저 없는 목소리, 텅 비어버린 벽안을 마주한 서문청하가 살짝 떨었다.
귀하게 자란 아가씨인 그녀였다. 서하린처럼, 감정을 잃어버린 텅 빈 눈동자와 무표정한 얼굴을 지닌 소녀에게는 본능적으로 경계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지만······.’
그렇지만 뭔가 꺼려졌다.
“물론이죠. 흥. 그럼 저도 이만 가볼게요. 서 소저도 빨리 주무세요.”
서문청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접객당에 배정된 본인 방으로 돌아갔다.
홀로 남겨진 서하린의 텅 빈 눈동자가 무너진 벽 너머로 보이는 달로 향했다.
‘이 사형······.’
그녀의 머릿속에 이철수가 떠올랐다.
두근.
그녀의 심장이 뛰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무림인에게 죽은 이후 다시는 뛰지 않던 심장을 움직이는 이 감정을 서하린은 이제 알고 있었다.
그건 사랑이었다.
사형은 그녀의 구원자였다.
그녀의 전부였다.
대가 없는 호의를 베풀고, 나락으로 떨어질 뻔한 그녀의 인생을 구원해줬다.
사형의 곁에 있으면 심장이 움직이고, 메마른 감정이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살아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처음 느낀 생기를 서하린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소유하고 싶었다.
사형의 숨소리 하나마저 그녀의 소유물로 만들고 싶었다.
‘아녀자라도, 운명은 스스로 정하라고 하셨죠? 저는 결정했어요. 사형.’
서하린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갔다.
표정을 오랫동안 잃은 서하린이 짓는 진심이 담긴 어색한 미소였다.
‘······소녀는 사형을 가질 거예요. 그것이 소녀가 정한 운명이에요.’
텅 비어버린 눈동자. 누가 봐도 어색한 웃음. 떨리는 뺨.
두근대는 심장.
사형을 가질 것이다. 생기를 놓치기 싫었다.
겨우 되찾은 마음을 다시 잃어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소녀가 성년이 될 때까지······.’
성년이 되어야 했다.
그래야 비로소, 사형이 그녀를 여인으로 봐줄 것이다.
왜냐하면 사형은 성숙한 여인을 선호하니까.
하지만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서서히, 사형의 마음에 스며들 것이다.
그러니까 당분간은, 사형과 서문청하와 협력할 수밖에 없다.
서하린은 그렇게 다짐하면서 어색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매만졌다.
“아······.”
웃는 모습도 연습해야겠다.
사내들은 여인의 아름다운 미소를 좋아하니까.
서하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한 해가 지난 나는 드디어 열다섯이 되었다. 열다섯! 현실이었다면 15세 이용가 영화, 게임, 애니메이션, 만화를 마음껏 볼 수 있는, 중2병이 막 시작될 시기가 마침내 다가온 것이다.
질풍노도의 시기.
어느덧 내 대물 근처에도 조금씩 수풀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2차 성징.
신체가 점점 어른이 될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흐흐흐흐.’
자연스럽게 내 몸도 점점 틀이 잡혀가며 내가 바라던 몸짱의 형태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오래 수련한 외공 트레이닝의 효과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변화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공동파 본산.
귀신 나올까 두려운 폐가와 흉가들만 가득 들어찼던 1년 전과는 달리, 지금의 공동파 본산은 제법 건물 꼴이 제대로 갖춰져 있었다.
적사월이 기부한 재물에 내 비무 토토 배당금이 더해진 결과였다.
뚝딱뚝딱.
하지만 공사가 1년 만에 끝날 리는 없었기에, 우선 가장 급한 시설인 접객당과 향화객을 받을 삼청전만 수리를 완료한 상황.
나머지 전각은 아직 수리중이었다.
삼청전 수리가 끝난 뒤에는 우리 공동파에도 제법 알음알음 향화객이 와서 기부금을 주고 가는 경우가 왕왕 있었기에 재정 상태도 보다 건전해졌다.
삼시세끼 돼지고기는 무리라도, 하루에 한 끼 정도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두 나로서는 아주 긍정적인 변화였다.
물론 이걸로는 아직 부족했다.
삼시세끼 돼지고기는 물론, 다른 정력제들도 복용해야 했다.
궁극의 정력 식단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돈을 뜯어내기 위해서는······. 당연히 투자 설명회를 열어서 투자자를 유치해야 했다.
그 투자자를 유치하려면······.
‘경연에서 좋은 성과를 내야 한다.’
정사지쟁으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앞으로 훌쩍 다가온 항산파와의 경연, 아니 투자 설명회에서 좋은 성과를 내야만 했다.
그래야 투자금도 유치하고 공동파 재건도 박차를 가해서 더 좋은 정력 식단을 확보할 것이 아닌가?
더 완벽한 정력 식단을 위해서.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오늘도 개인 수련장에서 케겔 운동과 행잉 운동을 병행했다.
이제 곧이다.
검후.
다시 만나겠군.
*
같은 시각.
어두운 동굴.
야명주의 불빛을 받아 섬뜩하게 빛나는 핏빛 연못에서 거품이 보글보글 솟아올랐다.
스으윽.
동굴의 그림자에서 혈의를 입고 복면을 쓴 사내가 솟아올랐다.
그가 핏빛 연못을 향해 오체투지했다.
“혈마군림! 혈교천하! 만세 만세 만만세! 혈마지존을 뵙습니다!”
혈의인의 말에 연못이 갑자기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푸화핫.
곧이어 핏빛 물보라와 함께 장발 사내가 연못에서 솟아올랐다.
혈교주였다.
혈교주의 감긴 눈이 떠졌다.
번쩍.
그의 눈에서 핏빛 광망이 피어올랐다.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심마가 일어나고 공력을 진탕시키는 요력이 깃든 마안이었다.
동굴 안에 핏빛 기파가 가득 피어올랐다.
극성에 이른 혈마신공의 기세가 요사스럽게 일어났다.
“무슨 일이지?”
“······검후비동의 소재를 파악할 단서를 찾았습니다.”
혈의인의 말에 혈교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렇다면 검후비동의 위치를 먼저 찾고, 찾은 뒤에는 은밀히 움직여 심향검과 검각의 항마절학을 수습하도록.”
“존명!”
혈의인의 오체투지를 받은 혈교주가 눈을 감았다.
부글부글.
그의 몸이 핏빛 연못의 끓어오르는 물에 삼켜졌다.
중원과 멀리 떨어진 새외에서 항산파와 공동파의 경연을 하루 앞두고 있었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