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소녀의 눈물
향화(香火)라는 말이 있다.
절이나 도관에 향을 바치면서 참배하는 행위를 이르는 말인데, 향화를 할 때는 도관 또는 절에 기부금을 내는 것이 의례였다.
그리고 구대문파는 거의 대부분이 불가 또는 도가 문파. 그 자체로 중원에서 유명한 사원인만큼 향화객이 끝없이 몰려들었다.
소림사 같은 경우에는 향화객이 시주하는 기부금만으로 재정 지탱이 가능할 정도.
하지만 공동파는 간판만 도가지 사실상 속가의 성향으로 전향한 지 오래되기도 했고, 본산 자체가 무너져서 폐허만 남은 탓에 향화객의 발걸음이 뚝 끊긴 상황이었다.
다들 공동파가 망한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서문세가의 공작 때문이기도 했다.
문파를 재건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건 역시 돈.
그러니 공동파의 재건을 막으려는 서문세가가 가장 먼저 자금줄인 향화객의 발걸음을 끊어버린 것이다.
공동산 자체는 서래제일산이라 불릴 정도로 청성산과 더불어 도교의 성지라 관광객이 꾸준히 들렀지만, 정작 공동파에는 그 낙수효과가 돌아가지 않는 거였다.
그래서 공동파는 다른 구파의 도문, 불문과는 달리 조용했다.
그래, 분명 그랬었는데.
“······향화를 하러 왔다는 말씀입니까?”
오늘.
그 공동파의 고요함이 깨졌다.
면사로 얼굴을 가렸는데도 몸 전체에서 풍기는 미(美)의 아우라가 인상적인, 평소와는 달리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옷을 입었는데도 부풀어오른 가슴 커튼이 인상적인 미녀.
능월향, 아니 적사월이 수레 세 대 분량의 재물과 함께 공동파 앞에 도달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혹시 실례가 되었을까요?”
적사월이 커다란 가슴에 손을 얹은 채로, 놀랍도록 공손한 말투와 저자세로 허리를 숙였다.
사파제일인의 허리가 이렇게 쉽게 숙여져도 되는 건가.
그 모습을 본 전영이 살짝 당황했다.
“저 뒤의 재물은······.”
“기부금입니다. 혹여 소문이 퍼질까 두려우시면, 오늘 제가 향화한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수레 세 대 분량의 재물이라니.
적사월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전영의 뒤에 있는 나를 힐끔힐끔 향했다.
대체 왜 온 거지.
설마 날 만나려고 저 많은 돈을 들고 온 건가?
물론 사파제일인인만큼, 실제 본인이 보유한 재산에 비하면 새 발의 피겠지만 그래도 다 쓰러져가는 공동파에는 지나치게 많은 재물이기는 하다.
순간 엄격한 전영마저 눈빛이 흔들릴 정도.
전영이 말했다.
“······본 파에 이리 많은 기부금은 필요 없소.”
“전 대협······.”
“지나치게 많은 재물은 화를 부르는 법. 아직 본 파는 이리 많은 재물을 보유할 역량이 되지 않소. 돌아가시오.”
전영이 축객령을 내리자 적사월의 면사가 흔들렸다.
그녀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기부금만 있는 게 아닙니다.”
적사월의 말에 모두가 굳었다.
“공동파의 이 공자와 서문 소저께서 저와 관련된 추문 때문에 곤혹을 겪으셨다 들었습니다. 그에 대한 저의 사죄입니다. 물론 재물로 전부 해결할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적사월이 말끝을 흐렸다.
그러니까 배상금으로 저걸 들고 왔다 이건가?
물론 돈이 필요하기는 하다. 하지만 설마 돈으로만 퉁치려는 건 아니겠······.
“······기부금, 받는 걸로 하죠. 전 대협.”
내가 뭐라하려던 그때.
서문청하가 나섰다.
“저에 대한 사과라니, 제가 끼어들어도 괜찮은 일이죠? 저는 받고 싶은데요. 저 흉가 같은 접객당 좀 보세요! 여기가 정녕 사람 사는 전각이 맞나요?”
서문청하가 얼굴을 붉히면서 열변을 토했다.
어쨌거나 공동파의 시비이자 식객이라며 대외적으로는 서문세가의 검봉이면서 공동파의 인질이라는 미묘하면서도 특수한 위치에 있는 그녀의 숙소는 접객당.
하지만 접객당은 흉가였다.
문제는 그게 공동파에서 그나마 멀쩡한 건물이라는 사실이었다.
조사와 사조들의 위패를 모신 주천검부, 장문인의 처소인 현천궁, 제자들의 숙소인 청운각, 그리고 모여서 밥을 먹는 식당을 제외한 다른 건물은 흉가가 뭐야, 그냥 불타서 터만 남은 흉물 수준이었다.
“크흠······.”
“그러니까 건물을 정비해야 다른 향화객들도 찾아오지 않을까요? 공동파가 비상하려면 말이죠.”
서문청하의 말에 전영이 침음을 흘렸다.
그녀의 논리는 완벽했다.
내가 1000냥을 벌기는 했지만, 그 돈으로 폐허가 된 공동파를 전부 다시 세우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공동파가 있는 곳은 공동산 취병봉 꼭대기. 평지도 아니고 험준한 산꼭대기에서 공사를 벌이려면 당연히 추가 비용이 눈 돌아갈 정도로 청구될 게 분명했다.
단지 그걸 말한 상대가 서문청하라는게 문제인데, 어쨌거나 적사월이 그녀에게도 사과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이상 그녀가 끼어들 수 있는 당위성이 부여된 거나 다름없었다.
물론 서문청하 본인은 접객당의 시설이 마음에 안 들어서 말한 거겠지만, 솔직히 내가 봐도 너무한 수준이기는 했다.
“······물론 이 공자님께도 직접 단둘이 만나서 진심으로 사죄할 생각입니다.”
고민하는 전영에게 적사월이 결정타를 날렸다.
그녀의 말에 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런 의도라면······. 받아들이지.”
서문청하의 주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형식이라.
서문청하가 적사월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적사월은 오늘 산문 앞에서 돌아갔어야 하리라.
나와 눈이 마주친 서문청하가 고개를 돌렸다.
“흥.”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는 서문청하.
낡아빠진 산문의 문이 삐걱 열리면서 재물이 실린 수레가 들어왔다.
스으윽.
적사월이 면사를 벗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가 드러났다. 본캐의 80% 수준으로 구현했다는 능월향의 미모는 그 자체만으로 엄청난 파괴력이 있었다.
전영의 손이 떨렸다. 사매 서하린과 사형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본모습을 본,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헛바람을 삼켰다.
적사월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전 대협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죠.”
*
공동파를 찾은 적사월은 도교의 주요 삼신인 삼청(三淸)을 모신, 그나마 건물 꼴은 갖추고 있는 삼청전 앞에 있는 녹슨 거대 향로에 고급 향을 피웠다.
불을 붙인 향이 타들어 갔다. 향내음이 공동파 본산을 가득 채웠다.
향화를 마친 적사월이 내게 말했다.
“이제 이 공자님께 사죄를 드리고 싶습니다.”
“접객당으로 모시겠습니다.”
나는 적사월과 함께 접객당으로 이동했다.
걷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접객당에 도착한 나는 가장 멀쩡한 방으로 그녀를 데리고 들어갔다.
처음부터 일대일 사과를 하겠다고 주장한 적사월이었으니, 일단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볼 필요는 있었다.
드르륵.
삐걱대는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바닥에 쌓인 먼지를 치우고 앉았다.
탁.
곧이어 적사월이 문을 닫고 들어왔다.
무너진 창살 너머로 햇빛이 비쳤다.
“······제게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먼저 말을 건 건 나였다.
내 질문을 들은 적사월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손이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화면호검으로부터 공자님의 답변을 전해 들었습니다. 공자님께서는······. 정직한 여인을 좋아하고, 할 말이 있으면 직접 와서 오라고 하셨다지요?”
화면호검도 능월향도 전부 본인인데 다른 사람처럼 말하는 모습에 나는 얼굴 근육을 통제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서 왔습니다. 헛소문을 퍼뜨려 공자님께 민폐를 끼친 점, 진심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그녀가 다소곳하게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적사월의 손이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어깨가 떨렸다.
“왜 그랬습니까?”
솔직히 적사월이 퍼뜨린 헛소문 때문에 피해가 간 건 사실이었다.
영웅호색 십년대계.
강호 무림의 영웅이 되어 삼처사첩을 누리며 주지육림에서 호색한 삶을 살며 색도를 실천하겠다는 내게 색마라는 소문은 치명적이었으니까.
강호 무림의 인기남이 되는 걸 바라기는 했지만, 색마처럼 부정적인 인기를 얻는 건 바라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공자님.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소녀는······. 소녀는 그저······.”
내 추궁에 적사월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적사월이 눈물을 흘리면서 내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님과 저, 정인이 되고 싶어서······.”
정인(情人).
중세 무림에서 애인, 연인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나랑 사귀고 싶어서 그런 소문을 퍼뜨렸다는 건가?
선화공주랑 결혼하려고 서라벌에 서동요를 퍼뜨린 백제 무왕처럼?
‘그걸 나더러 믿으라는 건가.’
물론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겠지.
하지만 내가 볼때 그건 집착이었다.
결국 또 하오문 비밀 안가에 감금해서 이하생략할 생각일 것이다.
본캐로 오라는 내 속뜻을 못 알아들은 거야 그럴 수도 있다고 치지만, 지금은······.
“······물론 잘못된 행동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자님을 만나지 못하는 동안······. 소녀의 여기가 너무 아파서······. 숨쉬기가 힘들어서······.”
적사월이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다른 손을 풍만한 가슴 위에 올리면서 내게 말했다.
“······이렇게라도······. 공자님을 뵙고 싶었······. 습니다······. 용서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계속 뚝뚝 떨어졌다.
그래.
여기서 그녀의 사과를 안 받았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어쩌면 정말로 적사월 본인이 쳐들어와서 나를 납치해서 이하생략 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지금은 밀당에서 당길 때였다.
나는 사과를 받기로 결심했다.
“······알았어. 사과, 받아주지.”
내 말이 떨어진 순간.
그녀의 몸이 멈칫했다.
스윽.
그녀가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저, 정말입니까······. 고, 공자님······. 소녀의 사과를 받아주시는 겁니까?”
적사월이 초롱초롱한 적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음부터 그러지 마라.”
“······.”
내 말을 들은 적사월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 눈물이 다시 가득 고였다.
“고마워요, 가가. 으아아앙······! 잘못했어요······. 가가 말대로 다시는 안 그럴게요······.”
와락.
그녀가 내게 갑자기 달려들면서 나를 끌어안았다.
적사월의 풍만한 가슴이 내 품에 뭉개졌다.
60세 사파제일인이 내 품에 안겨서 아이처럼 엉엉 우는 꼴이라니.
게다가 은근슬쩍 호칭도 다시 가가로 변했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 그녀를 내려다봤다.
안 그래도 빨간 눈동자가 퉁퉁 부을 정도로 우는 적사월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 뭐.
이 정도면 다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반성했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적사월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래.”
내 가슴이 그녀의 뜨거운 눈물로 젖었다.
나는 조용히 손을 뻗어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품에 안긴 적사월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머리에 기름을 바른 건지, 부드러운 촉감과 향기가 제법 기분이 좋았다.
“흐윽, 흑······. 히끅······. 고마워요오······. 가가······.”
내 품에 안긴 적사월의 고맙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렇게 나는 한참을 그녀를 안고 있었다.
코 끝에 적사월의 달콤한 향기가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