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후회와 사과
나는 수풀 속에서 나타난 화면호검을 응시하며 기감을 넓혀 주변을 탐지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주변에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이 근방에는 나와 화면호검, 아니 적사월 단 둘뿐이었다.
“······여 선배는 이번에도 강호 무림의 금기를 범했구려.”
나는 적사월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계정이 차단당했다고 다른 계정으로 이렇게 다중이 짓을 할 줄은 몰랐는데.
“그건······.”
적사월이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내 시선을 피하면서 말했다.
“······미안하구나.”
작은 목소리로 사과하는 적사월.
하긴 부캐라도 자존심이 하늘보다 더 높은 그녀였다.
사과가 익숙할 리 없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야밤에 무슨 일로 본 파를 찾아오셨소? 흑룡방과의 일은 이미 마무리되었을 터인데······.”
“흑룡방에서는 나왔다.”
내 말에 적사월이 답했다.
“······정사지쟁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축하하지.”
그녀는 여전히 내 시선을 피한 채로, 내게 의미 없는 축하 인사를 건넸다.
살다 살다 사파제일인에게 정파의 승리를 축하받는 상황을 다 겪게 되는군.
“감사드리오. 그래서 본 파를 찾아온 용무는······.”
“공동파가 아니라, 너한테 볼일이 있느니라.”
“어떤 용무요?”
나는 적사월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짐작가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걸 굳이 내 입으로 말할 필요는 없겠지.
내 말을 들은 적사월이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말했다.
“······곤화루의 능 소저가 한 가지 질문과 그에 대한 너의 대답을 전해달라더군. 어째서 요즘은 곤화루에 들리지 않느냐고.”
내 이럴 줄 알았다.
결국 또 그 문제인가.
곤화루라, 솔직히 말해서 그녀가 퍼뜨린 소문 때문에 내가 곤욕을 치르고 여색을 밝히는 망나니로 소문한 걸 생각하면 아직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망나니라니! 색마라니! 나는 그런, 색욕과 양물이 뇌를 지배하는 욕망의 노예가 아니다.
나 이철수는 색도의 일대종사. 욕망의 주인 되는 자이다.
내가 추구하는 색도는 육체의 쾌락이 아닌 심신 모두의 쾌락을 추구하는 도인 것이다.
그런데 소문 때문에 지금의 나는 이미 엽색 행각을 즐기는 망나니가 되어 있었으니.
이런 점이 아니더라도, 사부에게 당분간 하오문과 접촉하지 말라는 주의를 듣기도 했고.
지금은 멀리해야 할 때였다.
어차피 당분간 하오문을 이용할 일도 없기도 하고 말이다.
내 시선이 적사월에게 향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일전의 소문 때문에 사부님께 주의받았소. 망나니 소문이 사그라들 때까지 사파의 무리와 너무 가까이 어울리지 말라더군. 그래서 당분간 곤화루를 멀리해야 할 것 같소.”
“······소문이라면······. 그, 그건······.”
“능 소저와 나, 서문청하가 삼각 관계라는 소문이오.”
내 말을 들은 적사월이 침묵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건 나도 안다. 지금부터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겠다. 너, 능 소저와 통정한다는 세간의 소문은 사실이냐? 능 소저가 너를 가가라고 불렀다고 들었다. 내, 내게는 구름과 비의 즐거움을 즐기자고 해놓고······. 뒤로는 능 소저와 통정하고 있었던 것이더냐?!”
그녀가 내게 물었다.
적사월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뺨이 떨렸다.
지금은 밀당에서 적사월을 밀어낼 때였다.
그녀는 아직 내게 진짜 신분을 밝히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나도 적사월을 믿을 수 없다.
전에도 다짐했듯, 나는 그녀의 트로피가 될 생각이 없었다.
“······물론 그때 내가 했던 말은 진심이었소. 지금도 화면호검 선배가 아름답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하지만······?”
“나는 이미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이 있소. 그러니 일전에 말한 구름과 비의 즐거움은 잊어주시오. 마음 없는 하룻밤 불장난으로 화면호검 선배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싶지 않소. 그 마음에 둔 여인이 능 소저는 아니오. 그녀와의 관계는······.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소문이 퍼진 이후부터는 당분간 만나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소.”
“······능 소저가 아니라면 누구냐. 설마 검후는 아니겠지?”
“마음에도 없는 여인에게 청혼하는 일은 없소.”
내 말을 들은 적사월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어깨가 떨렸다.
그녀가 등을 돌렸다.
“······하지만 부, 부인을 하나만 두라는 법은 없지 않느냐······.”
적사월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삼처사첩을 두려는 건 어떻게 알고.
속으로 살짝 소름이 돋았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물론 그렇소.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진정한 운우지락은 서로 마음이 통해야 즐길 수 있는 법이니 말이요.”
“······그 말은······. 나는, 능 소저와는······. 검후와 달리 마음이 통하지 않다는 뜻이더냐?”
“나는 정직한 여인이 좋소. 그리고······. 다음부터는 할 말이 있으면 능 소저 본인이 직접 오라 전하시오. 사람을 보내지 말고.”
“······.”
적사월이 침묵했다.
이 정도면 알아들었겠지. 적사월이 본캐로 안 오는 이상 나는 그녀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
“이만 밤이 늦었소. 자러 갈 시간이오. 내가 오지 않으면 사형제들이 의심할 거요. 그럼 이만.”
이제 진짜 잘 시간이었다.
나를 쓸데없이 끔찍이 걱정하는 사형이었다. 내가 원래 시간보다 늦게 오면 일어나서 날 찾으러 다닐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적사월과 마주한 나를 보면, 아니 적사월이 사형에게 무슨 일이라도 저지른다면.
어느 쪽이건 좋은 결과는 아니다.
“자, 잠깐······.”
“편안한 밤 되시오.”
나는 적사월의 말을 끊어버리고는 그대로 몸을 날렸다.
이제 1년 뒤에 있을 항산파 경연을 대비해야 했다.
‘항산파 초대 장문인 유물도 찾고 말이야.’
옛 검각의 양대 신물 중 하나이자 항산파의 잃어버린 신물인 심향검.
난 그걸 1년 뒤에 되찾아줘서 항산파의 은인이 될 생각이었다.
검후와의 비무에서 이기더라도, 항산파와 공동파는 서로 은원 관계에 있는 상황.
게다가 항산파 문도의 80%는 검후 팬덤이고 소검후는 팬클럽 회장쯤 된다.
그녀들의 우상인 검후를 내 여자로 만드는데 항산파 내부 반발이 없는 건 불가능하다.
반발을 없애려면 내가 항산파에 은혜를 입히는 수밖에 없다.
적사월은······.
그녀가 본 모습을 드러내려면 시간이 걸리겠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청운각으로 향했다.
*
미련 없이 그대로 몸을 날린 이철수의 모습을 본 적사월이 입술을 깨물었다.
타탁.
그녀의 몸이 공동산의 밤공기를 가로질렀다.
지금만큼은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적사월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하염없이 공동산의 험한 산세를 헤집고 다니다가 쫄쫄쫄 흐르는 개울 앞에 도착했다.
환한 보름달이 떠오른 하늘.
달빛 아래 비친 개울물에 화면호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섬섬옥수가 화면호검의 인피면구를 벗기자, 그 너머에서 적사월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천하제일을 넘어 고금제일을 다투는, 섭혼술의 영역에 이른 절세의 미모가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천상의 선녀보다 더 아름다운 듯한 본인의 모습을 본 적사월이 입술을 깨물었다.
“······나쁜 새끼.”
그녀의 목소리에서 물기가 묻어나왔다.
적사월이 고개를 떨궜다.
뚝, 뚜둑.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진짜 천하에서 제일 나쁜 놈 같으니······.”
냇가 바위에 한 폭의 미인도처럼 걸터앉은 적사월의 눈물이 소매를 적셨다.
능월향이 아닌 화면호검의 모습이라면, 그가 아름답다고 해준 모습이라면 받아주리라 여겼다.
정말 운우지락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하지만 그는 거절했다.
마음에 둔 여인이 있다고 말했다.
그녀가 그렇게 싫어하고, 인정하지는 않지만 무의식적으로 질투했던 검후가 그 상대라고 했다.
적사월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나이만 어린 년이 뭐가 좋다고······.”
마음에 뒀으니 청혼했다.
그 말을 들은 적사월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 통증을 느꼈다.
눈물이 차오르는 걸, 울먹거리려는 목소리를 간신히 참았다. 참아왔던 모든 눈물이 쏟아졌다.
타인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본녀가 대체 뭐가 부족하다고······. 향매라고 불러줬으면서······.”
향매.
그는 분명 그렇게 불러줬었다. 능월향에게 그렇게 불러줬었다. 쓰담쓰담도 해줬었다.
그때의 감촉이 아직도 선명하다. 품 안에 안았던 그의 체온이 아직도 몸을 달구는 느낌이었다.
두근.
그날의 일, 이제는 마지막 만남이 된 그때를 떠올리자 적사월의 심장이 야속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를 떠올리기만 해도 두근거린다. 설렌다. 60년 일생에서 처음 느껴보는 생소한 감정.
그리고 지금도 생소한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감정을 느낀 적은 단언컨대 결코 없었다.
그녀의 출신은 비천했다. 어미는 퇴물 창기였고, 아버지는 누군지 알 수 없었다.어렸을 때부터 타고난 절색의 미모는 그녀에게 저주였다. 그녀의 미모에 질투를 느낀 어미는 그녀를 해치려고 했다. 창기로 팔아먹으려 했다.
그래서 집을 떠났다. 창기가 되기 싫었다. 누군가에게 구속당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먹고 살아야 해서 예기가 되었다.
세상이 싫었다.
세상 모든 사내는 그녀에게 음심을 품고 접근했다. 세상 모든 여인은 그녀의 미모를 질투했다.
미모 때문에 위험에 처한 일은 수도 없이 많았다. 납치 시도는 너무 흔해서 이제 세는 걸 포기할 정도였다.
그래서 일신의 안위를 위해 하오문에 입문했고 무공을 배웠다. 다행히 하늘이 내린 재능을 지니고 있어 성취는 빠르게 깊어졌다.
하지만 그녀에게 무공을 가르쳤던, 그녀를 친딸처럼 대했던 사부마저, 그녀의 미모에 반했다.
군사부일체의 천륜을 어기고 그녀에게 음심을 품고 야밤에 방에 들어왔던, 조금이나마 믿었던 사부의 목을 그녀의 손으로 날렸을 때부터.
적사월은 인간을 믿지 않았다.
그녀가 믿는 건 본인뿐이었다. 그렇기에 누구도 그녀의 안위를 해할 수 없도록, 누구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절대고수의 경지에 오르리라 다짐했다.
결국 적사월은 현경의 경지에 올라 하오문의 문주, 나아가 사도련의 련주가 되었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온전히 주지 않았다. 제자인 백면암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 있어 사내들은 추악한 음심 덩어리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
믿지 않았다.
마음을 주지 않겠다.
사내들은 다 음심 덩어리들 뿐이다. 외모에만 집착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대체 언제부터.
“······그 나쁜 새끼의 모습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거야······.”
적사월이 흐느꼈다.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뛰고 얼굴이 붉어지는 본인의 모습이 싫었다.
그의 품에 안기는 상상만 해도 몸이 달아오르고, 쓰담쓰담을 받으면 얼굴이 녹아버리며 진심으로 환한 웃음을 짓는 본인의 모습이 싫었다.
매일매일.
백면암군이 하오문의 정보망을 통해 작성한 이철수의 보고서를 받으면서, 보고서에 적힌 행적을 토대로 그의 모습을 상상하고, 비밀 궤짝에 이철수의 보고서와 용모파기를 은밀히 모아두는 그녀의 모습이 싫었다.
매일매일 그와의 만남을 망부석처럼 기다리던 본인의 모습이 싫었다.
사파가 아닌 정파, 이철수의 승리에 내심 기뻐하는 본인의 모습이 싫었다.
“그건 본녀의 진짜 모습이 아니야······. 본녀는 천하제일미니까······.”
그를 만나고 싶다.
예전처럼 다시, 능월향의 모습으로 가가라고 부르고 싶었다.
천하제일미 적사월은 그러면 아니 되지만, 천(天)급 예기 능월향은 그를 가가라고 부르고 그와 정인이 되어도 괜찮으니까.
하지만 다시 찾아간 그는 당분간 멀리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좋은 느낌이었지만, 소문이 퍼진 이후부터는 꺼려진다고 말했다.
“······소문······.”
검후에게서 그를 빼앗기 위해 낸 소문이었다.
기정사실로 만들기 위해서.
거지새끼들이 방해해서 문제였지, 중간까지만 해도 잘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소문 때문에 이철수는 그녀를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덧붙여 정직한 여인이 좋다고 했었다.
“······가가는 본녀가 소문을 퍼뜨렸다는 걸 알았던 거야······. 그래서······.”
정파와 사파 사이였다.
염문설이 돌면 치명적인 건 맞았다. 더군다나 소문이 계속 와전되며 결국은 색협이라는 별호까지 만들어졌으니.
세속적인 성격이 강한 무림세가의 공자라도 치명적인 소문이다. 하물며 과거 구대문파이자 도문의 성향을 지닌 공동파의 제자로서는 더 치명적일 것이다.
세간의 시선에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본녀가 잘못한 것인가. 본녀가······. 그런 소문을 퍼뜨려서······. 가가가 나를······. 안 만나주는 것이더냐······.”
결국 본인의 잘못이다.
그런 결론에 도달한 적사월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렀다.
그녀가 어깨를 떨며 흐느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이철수를 그녀의 치마폭에 가둘 수 있었다. 검후와 혼인해도 상관없었다. 그의 마음을 그녀가, 능월향이 가진다면 그건 그녀의 승리였으니까.
하지만 다급해졌다.
검후 그 어린 년이 불여우처럼 꼬리를 치는 바람에, 그녀답지 않게 다급해져서 실수를 했다.
그래서였다.
가가가 차가워진 건, 그녀를 매몰차게 돌려보낸 건, 만나려고 하지 않은 건.
전부.
그녀의 잘못이었다.
“······가가······.”
보고 싶다.
그러려면······.
이철수는 이미 정답을 제시해줬다.
할 말이 있으면 능월향 본인이 직접 오라고, 정직한 여인이 좋다고 말이다.
그 말은, 직접 와서 사과한다면······.
“······가가가 다시 만나줄지도 몰라.”
사과.
평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진심으로 해본 적 없던 사과를 해야 했다.
46년이나 어린 소년에게.
현경의 절대고수이자 우내삼존의 일원이며 하오문의 태상문주인 천하제일미인 사도련주 염왕 적사월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적사월이 아니라 능월향이면 괜찮아.”
하지만 능월향이면 괜찮았다.
능월향의 마음이면, 얼마든지 그에게 줘도 괜찮았다. 능월향의 모습으로는 그와 정인이 되어도 괜찮았다.
적사월은 첫만남이지만, 능월향은 이미 몇 번이고 그와 만났으니까.
그러니까 괜찮았다.
······나아가 능월향의 모습으로, 그의 마음을 전부 독점하리라.
그렇게 다짐한 적사월이 눈물을 소맷자락으로 닦아내면서 일어섰다.
“가가와 다시 만날 것이야.”
두근.
그를 생각하자 다시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면서, 적사월은 공동산 아래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이틀 뒤.
한산한 공동파에 손님이 찾아왔다.
염희 능월향.
그리고 그녀가 가져온 수레 세 대 분량의 재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