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내 주인님이라니!
전표를 품에 넣은 서문청하는 공동산을 향해 경공을 펼치면서 생각에 빠졌다.
지금까지 그녀는 이철수를 파렴치한 색마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정사지쟁 때에도, 이번 비무에서도 음란 행위를 저질렀으니까.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가 저지른 일을 이해할 생각도 없었다.
첫 만남부터 최악이었으니까.
그녀가 이철수에 갖고 있던 협객이라는 기대가 전부 실망으로 바뀌었으니까.
이철수는 여색을 밝히는, 공동파에 어울리지 않는 망나니다. 그래서 반드시 시비가 된 그녀를 건드릴 거라 생각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이철수는 이미 색마였으니까. 검후에게 공개적으로 구애한 것도 여색을 밝혀서, 정파제일미녀인 검후에게 주제도 모르고 저지른 일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능월향을 만난 이후.
서문청하는 이철수의 행동을 다시 되짚었다.
생각해보면, 이철수를 대하는 공동파 장문인 전영과 사형 유진휘, 사매 서하린의 태도는 망나니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전영과 유진휘, 서하린은 지나칠 정도로 이철수에게 잘 대해주었다.
이철수가 정말 여색이나 밝히는 망나니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능월향의 태도도 그랬어요······.’
사천제일기녀 염희 능월향.
그녀에 대해서는 서문청하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이철수와 서문청하, 능월향의 삼각관계 염문설 때문에 능월향이 어떤 인물인지 알아본 그녀였으니까.
능월향은 사천제일기루인 백화루의 유일한 천(天)급 예기.
사천을 넘어 중원 전역에 명성을 떨치는, 모든 풍류공자가 사모하는 절벽 위의 꽃.
차기 천하제일미.
단 한 번도 누군가를 가가라고 부른 적 없다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도도한 미녀.
정보로 봤을 때는 그러려니 했던 정보였다.
하지만 오늘, 능월향의 실물을 본 순간 서문청하는 충격을 받았다.
필설로는 형용할 수 없는, 같은 여인조차 마음을 동요하게 만드는 절정의 미색을 지닌 미녀.
그런 미녀조차 이철수의 마음을 얻지 못해서 그녀에게 매달렸다.
소문처럼 이철수를 가가라고 부르며 말이다.
이철수가 정말 망나니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내라면 누구나 반할 만한 미색을 지닌 미녀의 구애를 거절한다는 건 말이다.
‘설마······. 지금까지 제가 이철수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건······.’
서문청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모든 정황 증거는 한 가지 결론으로 이어졌다.
이철수는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색마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서문청하의 머릿속에 지금까지 이철수가 보인 행적이 줄줄이 떠올랐다.
작은 객잔을 지키기 위해 사도팔문의 일좌를 차지하는 거대 사파 흑룡방에게 비무를 제안하고, 흑룡방 후기지수 두 명을 상대로 이겼으며 사파제일 후기지수 흑사룡에게도 날카로운 일검을 날렸다.
사문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공동파 대신 구대문파의 자리에 오른 항산파와 그 장문인 검후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나아가 같은 감숙성 대문파인 서문세가의 견제를 차단하기 위해 그녀에게 비무를 신청했다.거기에 같은 일류의 고수라는 사실까지.
이철수는 그녀가 처음에 생각했던 협객이 맞았다.
실제로 비무 끝에 의복이 찢어졌을 때, 이철수가 급히 겉옷을 벗어 그녀의 나신을 가려주지 않았던가?
생각해보면 그때 그의 손길과 눈빛에는 한 치의 음심도 없었다.
그저 전부 그녀의 오해였을 뿐이었다.
‘그, 그럼 저는······.’
서문청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마음속에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그는 처음부터 그대로였다.
단지 그녀가 처음부터 편견을 가지고 그를 바라보고, 계속해서 오해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서문청하의 발길이 멈췄다.
“으으으······.”
그녀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그녀를 하인처럼 대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이철수의 입장이었어도 본인을 오해하면서 계속 엇나가는 상대에게 좋게 대할 수는 없었다.
“저는 대체 무슨 짓을······.”
서문청하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모든 오해가 풀리고 난 뒤에 생각하니, 잘못한 건 그녀 본인 쪽이었다.
오히려 이철수야말로, 그녀가 그토록 동경하던 협객의 모습과도 같았다.
무너진 사문을 일으키고, 힘없는 민초를 위해 사파에 대적한 이철수가 협객이 아니라면 누가 협객이라는 말인가?
심지어 그는 사문의 재건을 위해 본인을 미끼로 도박까지 하지 않았던가?
‘대체 얼마나······. 힘들었던 걸까요······.’
이철수가 고아 출신이라는 사실이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가난한 공동파의 광경도.
풍족하게 자랐던 서문청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이철수는 얼마나 분투했던 걸까.
‘검후 님도 그래서 이철수를······.’
서문청하는 검후와 친분이 있었기에,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다.
검후는 아무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 상대가 사내라면 더더욱. 그런 검후가 비무 당시에는 이철수의 손을 들어주었다.
검후는 진작에 이철수의 진가를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녀의 몸에 이철수가 덮어줬던 겉옷의 감촉이 되살아났다.
그의 체취가 코 끝에 되살아났다.
그녀의 가슴에 묘한 감정이 싹텄다.
서문청하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 아무튼 됐어요! 지금이라도 알았으니까······.”
사과하면 된다.
서문청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몸을 날려 이철수와 만났던 본산 구석으로 향했다.
타닥.
서문청하의 몸이 사뿐히 폐허에 내려앉았다.
그녀의 시야에 이철수의 모습이 보였다.
“왔냐?”
이철수의 목소리를 들은 서문청하의 가슴이 두근댔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이면서, 이철수의 시선을 괜히 피하며 품에서 전표 뭉치를 꺼내 건넸다.
“자, 여기! 시킨 대로 하고 왔어요! 고, 공자님······.”
“······금액은 정확하군. 수고했다.”
이철수의 칭찬을 들은 서문청하의 몸이 움찔했다.
“이제 가 봐도 좋아.”
이철수가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서문청하의 발길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해한 걸 사과해야 하는데······.
막상 입 밖으로 꺼내려니 입술이 안 떨어졌다.
태어날 때부터 명가의 아가씨로 자라 한 번도 제대로 사과한 적이 없어서 그런 걸까.
알 수 없었다.
“······안 가고 뭐 하냐?”
우물쭈물하는 서문청하의 모습을 본 이철수가 눈썹을 꿈틀했다.
이철수의 말을 들은 서문청하가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고개를 홱하고 돌리며 말했다.
“······미, 미안해요.”
“뭐가?”
“미, 미안하다면 미안한 줄 알고 있어요! 흥!”
이철수의 말을 들은 서문청하는 소리를 빽하고 지른 뒤에 이철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그리고 비, 비무 때 그 일은 어, 어떻게 책임질 건가요?!”
서문청하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다.
잊고 있었지만, 그날. 그녀는 중인들에게 알몸을 보였던 것이다.
그녀는 무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무림세가의 금지옥엽. 그런데 만인의 앞에서 그렇게 입에 담지 못할 꼴을 보였으니, 이제 시집은 글렀다.
세간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게 분명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말을 돌리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난생처음 내뱉은 사과에서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
“아, 그거. 이미 책임지고 있잖아?”
“그게 무슨······.”
“넌 내 전속 시비니까. 주인인 내가 너의 전부를 이미 책임지고 있다는 말이야.”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은 서문청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주인이라니?
서문세가의 막내 아가씨이자 검봉인 그녀에게 감히 주인이라니?
혼란스러워하는 서문청하를 보면서 이철수가 씨익 웃었다.
“사문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앞으로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가 네 전부를 마지막까지 책임진다고. 주인으로서. 사내대장부니까, 내가 한 일에 대해서는 내가 확실히 책임진다. 그건 서문청하 너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걱정은 하지 말도록.”
이철수의 말을 들은 서문청하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주인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그녀의 심장이 미칠 듯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책임진다고 할 줄 몰랐다. 그것도 사문의 이름까지 걸어가면서.
아니, 이게 그의 본모습이겠지.
협객이니까. 본인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건 당연하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 이런 식으로 능월향의 마음도 훔친 건가요?! 그, 그런 거죠?!”
서문청하가 이철수를 바라보면서 소리쳤다.
“흥. 저는 서문세가의 검봉 서문청하! 능월향과는 달라요! 다, 당신 따위가 내 주인이라니! 저를 책임진다니! 백 년은 이르다고요!”
서문청하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으면서, 붉어진 얼굴을 감추면서 몸을 날렸다.
그녀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
서문청하가 떠난 뒤.
나는 혀를 내둘렀다.
능월향의 마음을 훔쳤다니, 적사월이 또 무슨 수작이라도 부린 건가?
하여간 서문청하는 망상이 너무 심해서 문제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뭐, 그래도 나는 마음이 넓은 남자.
서문청하가 어떤 여자건 상관없다.
어쨌거나 그녀 역시 성년이 된다면 당연히 책임질 생각이었으니까.
“흠. 돈이 꽤 짭짤하게 들어왔군.”
나는 전표 뭉치를 세어봤다.
거의 은자 천 냥에 가까운 무지막지한 돈.
만족스러웠다.
두 번의 비무 토토 끝에 나는 제법 꽤 많은 돈을 벌었다. 이제 이 돈을 공동파 재정으로 환원한 뒤 빠르게 정력제 및 수련 시설 확충 비용으로 사용해야 했다.
그래야 정력도 늘리고 육체미도 함양해서 장차 성년이 되었을 때 알파 메일로 거듭나지 않겠는가?
모든 건 알파 메일이 된 미래의 나를 위한 투자였다.
“흐흐흐······.”
나는 웃으면서 전표 뭉치를 전낭에 조심스럽게 집어넣은 뒤, 그대로 스쿼트와 함께 케겔 운동을 시작했다.
오늘 치 수행을 할 시간이었다.
“후우, 후우.”
스쿼트와 케겔 운동을 병행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몸에 비 오듯 땀이 흘러내렸다.
시간은 어느새 해가 진 뒤 검푸른 밤하늘에 달이 떠오른 자정.
움찔.
케겔 운동으로 자극받은 하물이 바지를 뚫을 듯 우뚝 솟아올랐다.
거물을 보니 그동안 젤크 운동, 케겔 운동, 행잉 운동을 수행한 보람이 있었다.
내가 거물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은 뒤에, 검을 뽑아 복마검법을 수련하려던 그때.
기감에 기척이 걸려들었다.
공동파 본산 안쪽이 아닌, 바깥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이었다.
그리고 바깥쪽이라면, 공동파 내부인이 아닌 외부인일 가능성이 높았다.
미간이 찌푸려졌다.
서문청하 때도 그렇고 검후 때도 그렇다. 왜 하필 항상 개인 수행 시간에 이렇게 자꾸 누가 방해하는 거지?
이러다가 정력 손실 오면 책임질 거도 아니고 말이다.
나는 재빨리 하물을 가라앉히면서 말했다.
“······누구냐. 빨리 나와라. 좋은 말 할때.”
내 말이 끝난 순간.
부스럭.
수풀 너머에서 인영이 하나 솟아올랐다.
얼굴의 반쪽이 화상으로 뒤덮인, 몸매가 드러나는 흑의 무복을 입은 여고수.
화면호검 여예령.
적사월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니, 적사월이 왜 여기 있어? 그것도 화면호검으로?
갑자기 나타난 그녀의 모습에 내가 당황하고 있던 그때.
“그 새, 색마 같은 수행은 여, 여전하구나. 이철수.”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