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싹트는 순간
같은 시각.
사천성 중경.
오늘도 안개가 뿌옇게 낀 대도시의 중심가에 있는 흑룡방 총타.
고루거각들이 끝없이 늘어선 총타의 심처에는 잠룡전이라고 쓰인 현판이 달린 전각이 있었다.
흑룡방 소방주가 머무르는 곳이었다.
잠룡전 내부.
거기에는 사파제일 후기지수로 그 이름이 아직 드높은 흑사룡 위소련이 있었다.
시비도, 시종도, 호위무사도 물린 채 혼자 방에 앉은 위소련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 비무도 승리했다는 말이지? 오, 오라버니가······.”
위소련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
뒤처리를 마친 흑룡방은 약조대로 감숙성에서 영구히 철수했다.
다시 흑룡방의 지부가 감숙성에 세워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감숙 무림의 정세는 당분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위소련은 굳이 감숙 무림의 일, 정확히는 이철수의 정보를 찾아 들었다.
그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그날.
정사를 아우르는 영웅이 되어 책임지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위소련은 그가 신경 쓰였다.
그리고 오늘, 이철수의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이다.
“흐, 흥. 서문청하 정도라면······. 다, 당연히 이겨야지······. 오, 오라버니니까······.”
위소련이 붉어진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정사지쟁에서 승리를 가져가고, 그녀에게 치욕을 안긴 이철수였다.
그녀의 옷자락을 찢었으니, 서문청하 정도는 무조건 이겨야 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정말로 이철수가 서문세가와의 비무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위소련은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는 기분이 들었다.
이철수가 서문청하의 옷을 아예 갈기갈기 찢어 그녀의 나신을 만천하에 드러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에는 더더욱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음적······. 색마······.”
두근.
위소련의 심장이 떨렸다.
그녀의 머릿속에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패배를 안긴 상대는 유진휘였지만, 그녀의 기억에 남은 사내는 옷을 찢어버린 이철수였다.
“나, 나뿐만 아니라 다른 아녀자한테도 그런······. 무도한······.”
위소련이 입술을 삐죽였다.
다른 아녀자의 옷까지 찢어버리다니.
그야말로 음적이 아닌가.
왠지 모를 질투심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설마 서문청하, 그 여자도 책임진다고 말하는 건······.’
이철수.
그는 비무 도중 음란 행위의 대가로 그녀를 책임지겠다 선언했다.
그런데 이번 비무에서도 또다시, 그녀보다 더 심각한 음란 행위가 발생했다.
당연히 이번에도 이철수가 그녀를 책임져야 할 터이다.
책임진다니.
나 말고 다른 여인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위소련의 머릿속에, 정사지쟁 때 봤던 서문청하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내처럼 아무렇게나, 꾸미지도 않고 부스스한 단발로 다니던 그녀와는 완전히 반대의 모습을 한 서문청하.
서문세가의 금지옥엽답게, 사랑스러운 미모와 여인다운 몸가짐, 누구보다 여인다운 자태를 한 미소녀였던 그녀의 모습이.
서문청하는 아마 바느질도, 자수도 잘할 것이다. 여인답게.
게다가 그녀는 이제 이철수의 시비가 되었다고 하지 않는가?
반짝반짝 빛나는 명문 정파 무림세가의 아가씨가 계속 그를 수행한다면······.
선머슴 같은, 사내처럼 하고 다니는 그녀 따위는 잊을지도 몰랐다.
서문청하는 정파고, 그녀는 사파니까. 정사의 간극은 그만큼 메우기 어려우니까.
공맹의 가르침에 따라 여인다움이 미덕인 시대.
여인답지 않은, 사내처럼 구는 선머슴을 좋아하는 사내는 어디에도 없다.
모든 면에서 그녀는 서문청하보다 모자랐다.
흑사룡 위소련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차갑게 그녀를 버리는 이철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철수가 말한 책임진다는 말은 아직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지 않은 위소련이었다.
‘그런 말,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을 리가······.’
정파와 사파의 사이였다.
혼담 비슷한 것이 오가는 건 불가능했다. 혹시라도 그의 발언을 발설한다면, 아버지인 광마도군이 노발대발할 것이 뻔했다. 정파의 위선자가 감히 사파의 동량지재인 그녀를 모욕했다고 말이다.
어쩌면 정사지쟁이 또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런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일을 키우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왠지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가슴에만 묻어뒀다. 어차피 둘만 있는 공간에서 나눈 대화다. 들은 사람은 없었다. 비밀로 하기에는 최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비밀이 그녀를 압박하고 있었다. 정파의 아가씨인 서문청하와는 달리 사파의 후기지수인 그녀는 이철수와의 약조를 대놓고 발설할 수 없다.
하지만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다.
그런 모순적인 감정이 그녀의 마음속에 차오르고 있었다.
위소련이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모순적인 감정을 흩어냈다.
“나는, 대체 뭘 기대하고······.”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구석으로 치워뒀던 동경에 그녀의 모습을 비췄다.
거기에는 여전히, 여인보다는 사내를 닮은 소녀의 모습이 있었다.
“빌어먹을······.”
지금까지는 별생각 없었던 본인의 모습이, 오늘따라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탁.
위소련은 몰래 숨겨둔 화장품을 꺼냈다.
분을 바르고, 연지를 입술에 그렸다.
“나도 꾸며본다면······.”
거의 처음 해보는 화장. 잘 될 리가 없었다.
그녀의 서툰 솜씨로 얼굴에 그려진 화장은 오히려 안 하느니만 못한 꼴이 되었다.
수하들이 봤다면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놀라며 속으로 비웃었으리라.
동경 속에 비친 도깨비 같은 모습을 본 위소련의 손이 떨렸다.
“아니야! 이건······.”
그녀의 고개가 숙여졌다.
“으으······. 빌어먹을 오라버니 같으니······.”
위소련의 손이 떨렸다.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꽈악 쥐었다.
*
이철수를 따라 서문청하가 도착한 곳은 공동파 본산 구석.
지금은 불타버린 전각 터만 남은 장소였다.
딱 봐도 으슥하기 짝이 없는 장소.
이곳에 선 서문청하가 이철수에게서 한 발짝 물러섰다.
‘이런 으슥한 곳까지 오다니······. 역시······.’
서문청하가 오른 팔목에 새겨진 수궁사를 매만졌다.
비무의 패배는 인정했다. 검후의 말대로 그녀는 여인이기 이전에 한 명의 강호인이자 긍지 높은 서문세가의 무인.
본인의 패배를 부정할 정도로 정신이 썩어빠지지는 않았다.
그때의 대결은 분명히 그녀의 패배였다. 이철수의 경지를 이류라고 오판해서 방심하다 허를 찔렸기에 일어난 참사.
하지만 패배의 과정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으으으으······. 색마, 음적!’
그날.
난주의 군중이 밀집한 가운데, 그녀는 이철수의 검기에 의해 옷이 갈기갈기 찢어져 나신을 노출했던 것이다.
비록 이철수가 빠르게 겉옷을 벗어 둘러준 덕분에 노출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은 그녀가 아녀자로서 치욕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이철수의 음란 행위는 이번 한 번만 그런 게 아니었다.
정사지쟁 당시 흑사룡의 옷도 찢어 망신을 준 전적이 있지 않던가?
합리적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합리적 의심과는 별개로, 이철수가 덮어준 겉옷의 감촉은 꽤나 좋았다. 체취도.
그 체취를 떠올리던 서문청하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대체 왜 그런 말을 내뱉어서는······.’
서문청하는 그녀의 결정을 후회했다. 몸종이 되겠다는 얼토당토않은 제안만 안 했더라도, 그녀가 이철수의 시비로 전락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공동파가 싫다는 건 아니었다. 이철수를 제외한 공동파 장문인 전영과 이철수의 사매 서하린, 사형 유진휘는 그녀를 그럭저럭 잘 대해주었으니까.
하지만 이철수는 아니었다.
이철수는 그녀를 사사건건 허드렛일과 심부름으로 부려먹었던 것이다.
‘감히 제게 하인들이나 하는 시, 심부름만 시키다니, 어, 어떻게 그런······.’
게다가 그날의 눈빛을 서문청하는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감숙제일미라고 불리는 그녀였다.
수궁사를 과시했던 그 날, 이철수가 보였던 ‘너 같은 건 여인으로도 안 본다’는 그 눈빛을 서문청하는 잊을 수 없었다.
감숙성 소년들의 우상인 그녀였다. 그런 그녀를 그렇게 대한 건 이철수가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빈말이라 생각했다.
수궁사가 있다더라도, 시비가 된 그녀를 향해 이철수가 색마의 본성을 드러내리라 생각했던 서문청하였다.
하지만 이철수는 지금까지 계속, 그녀를 말 그대로 허드렛일이나 하는 하녀로 취급했다.
‘감히 저를 이렇게 대하다니! 용서할 수 없어요! 저는 서문세가의 아가씨, 검봉 서문청하라고요!’
천하의 검봉 서문청하를, 강호 무림 어디에서도 인정받는 그녀를 이런 식으로 대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드디어.
오늘 이철수가 둘만 보자고 한 것이다.
‘결국 짐승처럼 저를······. 으슥한 곳에서 마구마구 범할 생각인 거죠? 색마답게? 흥. 그동안 욕망을 참느라 애썼겠군요!’
서문청하는 생각했다.
그동안 이철수는 욕망을 억누르고 있었던 거라고. 본산에 돌아오자마자 욕망을 발산할 생각이라고.
무려 대서문세가의 막내딸인 검봉 서문청하다. 그런 그녀를 시비로 삼고도 아무런 욕망을 느끼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서문청하는 그리 여겼다.
“시비인 네게 명령할 일이 있다. 이 일은 너와 나, 둘만의 비밀이어야만 한다.”
“뭐죠? 이상한 거면 안 들어줄 거예요!”
서문청하가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면서 그를 경계한 그때.
이철수가 품에서 목패를 꺼냈다.
하 총관이 건넨, 비무 도박 배당금을 받을 수 있는 증표였다.
목패를 본 서문청하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분명 그가 자신에게 입에 담을 수 없는 음란한 일을 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상한 목패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 목패를 가지고 산 아래 화정현의 곤화루라는 주루에 가서 비무 도박 배당금을 수령해서 나한테 가져오도록.”
뒤이은 이철수의 말을 들은 서문청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
정말.
이게 다라고?
검봉 서문청하를 으슥한 곳까지 불러놓고, 단둘이서 한다는 부탁이 고작 배당금 수령이라고?
그동안 그녀를 하녀처럼 부려먹던 이철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서문청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게, 정말 나를 하녀처럼 봐서 그런 거라고?
모든 상황을 파악한 서문청하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할 말은 그게 끝인가요?”
“끝인데?”
서문청하의 질문에 무감각한 눈동자로 바라보는 이철수.
마치 무슨 할 말이 더 있냐는 듯한, 길가의 돌멩이를 보는 듯한 무심한 눈빛이었다.
서문세가의 금지옥엽으로 태어난 그녀였다.
오라버니인 대공자, 이공자를 능가하는 검재를 보유하기도 했다. 용봉지회에서 검봉의 칭호를 따내면서 아버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정파 무림의 차세대 동량지재로 기대받으며, 언제나 사랑받고 주목받으며 화제의 중심에 섰던 서문청하였다.
정파 무림뿐만 아니라 사파에서도 그녀를 경계했었다.강호 무림의 모두가 동경하던 검봉이 바로 그녀였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철저히 무시당한 적은 처음이었다.
특히 언제나 그녀를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또래 소년에게 말이다.
묘한 패배감과 함께 그녀 본인도 모르는 새로운 감정이 그녀의 마음속에 싹트는 순간, 서문청하가 이철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공동산에 그녀의 아우성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