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검후의 일기
비무가 내 승리로 끝난 뒤.
환복을 완료한 서문청하를 우리 쪽으로 보내면서 진천검왕이 눈을 부라렸다.
“······청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 네놈이 피눈물을 흘리게 될 줄 알아라. 혹시 청하의 몸에 네놈의 그 더러운 손이라도 댄다면 내 네놈을 천참만륙할 것이다.”
“서문 소저의 안위는 염려하지 마시길. 알아서 잘 돌보겠습니다.”
“······이이이익!!”
내 말을 들은 진천검왕의 얼굴이 다이나믹하게 변했지만, 그 이상 협박을 들먹이지는 못했다.
내 뒤에서 검후가 진천검왕을 차갑게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금 비무대에서 억지 명분으로 우기다가 검후의 논리적인 반박에 전부 논파당한 진천검왕이었다.
이제 와서 검후에게 다시 대들 수 있을 리 없었다.
캬.
이래서 사람이 빽을 잘 둬야 한다니까.
빽, 아니 중국어로는 꽌시가 역시 최고인 거다.
“흥. 두고볼 것이다. 청하야.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본가로 연락하거라.”
“······알겠어요. 아버지.”
“······크으으윽······.”
서문청하의 대답을 듣고도 부들부들 떠는 진천검왕.
“안 가고 뭐 하시는 겁니까? 빨리 가시죠.”
그런 진천검왕을 바라보며 퇴장을 종용하는 검후.
그녀의 말에 진천검왕이 나와 서문청하, 검후와 사부, 사형, 사매를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애써 돌렸다.
“다음에 두고 보지. 이철수.”
삼류 악당 같은 대사를 마지막으로 사라지는 진천검왕과 그의 두 아들.
서문세가를 돌려보낸 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끝났다.
사실 진천검왕이 막내딸의 호위라면서 사실상 공동파에 감시요원을 심어두려는 걸 제지하는 게 더 힘들었다.
우리가 서문청하를 인질로 잡고 있으니, 서문세가는 함부로 공동파에 수작을 부리지 못할 것이다.
후후.
괜히 전근대 시절에 지방 호족 자제들을 수도로 불러 인질로 삼아 반란을 방지하는 기인제도가 만들어진 게 아니다.
“이제 다 마무리됐군요.”
검후가 내게 말했다. 나는 검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포권을 취했다.
“그렇습니다. 검후 여협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검후가 우리 편을 안 들어줬다면, 진천검왕의 억지 때문에 상당히 곤란해질 뻔했다.
아직 공동파의 힘이 서문세가의 힘을 넘어서지는 못했으니까.
“아닙니다. 이 공자. 공증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시길.”
“그래도 은 장문인께 큰 신세를 졌소. 이 은혜는 본 파가 일어선 뒤에 마땅히 갚도록 하겠소.”
검후의 말에 전영이 나서서 포권을 취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전 대협. 그저 같은 정파 무림의 동도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검후가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서문청하의 표정이 뚱해 있었다.
어색한 모습.
나는 그런 서문청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설마 아직도 패배를 인정 안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거든요?! 당신은 대체 절 뭘로 보는 거죠?!”
내 말에 발끈하는 서문청하.
자존심이 강한 무림세가 아가씨인 그녀였다.
패배를 인정 안 할리가 없었다.
“어허. 이제 내 전속 시비잖아. 호칭을 똑바로 해야지.”
나는 서문청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내 말을 들은 서문청하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녀가 작게 말했다.
“······공자님······. 이제 됐나요? 흥.”
서문청하가 내게서 한 발짝 떨어지면서 말했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면서 오른 소매를 스윽 걷었다.
“이 수궁사가 보이시나요? 흥. 당신이 제게 소, 소소손을 댄다면 천하가 다 알 테니 조심하라고요!”
그녀의 오른쪽 손목에는 붉은 문양이 하나 새겨져 있었다.
그건 수궁사(守宮砂)였다.
특수한 광물 먹이를 먹여 만든 도마뱀을 갈아서 만든 염료로 새기는 일종의 주술 문신.
효능은 처녀의 순결함 여부를 나타내는 것. 여인의 팔에 한 번 새긴 수궁사는 정조를 잃기 전까지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반대로 여인이 한 번이라도 관계를 맺어 순결을 잃으면 팔목의 수궁사는 저절로 사라진다.
현대 관점에서는 음습하기 짝이 없는 중세 무림의 정조 판별법인데, 저걸 딸 몸에 새겨놓을 줄이야.
어지간히 미친 딸바보인 모양이었다.
“아, 그래······. 실수로라도 손 안 대게 조심하지.”
나는 약간 질린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서 한 발짝 떨어졌다.
처음부터 성년 되기 전까지는 건드릴 생각도 없었는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그 모습을 본 서문청하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녀가 한 발짝 내게 다가왔다.
“공자님. 방금 그 표정 뭐죠? 그 한심하다는 눈빛!!”
나를 향해 쏘아붙이는 서문청하.
쟤는 또 왜 저래.
대체 이걸 뭐라 답해야 하지.
살짝 당황한 그때.
“자, 이제 돌아가도록 하죠. 본산으로.”
검후가 때마침 우리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검후가 나서자 서문청하가 한 발짝 물러나 입을 다물면서 나를 살짝 흘겨봤다.
왜 저러는 거야. 진짜.
*
검후는 서문청하까지 더해진 우리 일행을 본산까지 친절하게 데려다줬다.
그녀 덕분에 우리는 다시 한 번 편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물론 몸만 편하지 정신은 별로 편하지 않았다.
‘공동색협이라고? 진천검왕 이 인간이······!’
공동색협.
그 빌어먹을 별호를 기어이 내 귀로 들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색협이라니!누가 들으면 날 색마로 오해할까 두렵다.
나는 절대 위험한 사람이 아닌데, 대체 왜 내게는 이런 쓰레기 같은 별호만 붙는단 말인가?
이대로면 내 영웅호색 십년대계에 다양한 애로사항이 꽂피게 생겼다.
역시 안 되겠다.
빨리 용봉지회에 가서 내 별호를 검룡으로 바꿔야 한다. 진패천, 그 인간에게 검룡이라는 별호를 뺏어야 했다.
나는 이를 뿌득뿌득 갈면서 와신상담에 들어갔다.
그렇게 본산에 도착한 뒤에야 검후는 소검후와 함께 산서성에 있는 항산파 본산으로 돌아갔다.
물론 그냥 돌아간 건 아니다.
“전 대협. 전 대협께 본 파와 귀 파 사이의 교류 경연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돌아가기 전, 검후는 전영에게 교류 경연 제안을 했다.
교류 경연.
쉽게 말해서 교류 친목회 같은 행위였다. 내가 두 번이나 치렀던, 강호의 방식으로 은원을 해결하는 살벌한 비무와는 달리 적당히 서로 대련도 하고 친목도 나누는 그런 행사.
쉽게 말해서 문파 대 문파로 꽌시를 맺고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행사라 할 수 있었다.
이 경연을 구파일방 육대세가가 중심이 되어 대규모로 여는 것이 내가 그토록 바라는 2년 간격으로 열리는 정파 무림 후기지수 축제인 용봉지회였다.
그 외에도 같은 지역 문파라면 경연이라는 명목 아래 친목을 다지는 경우가 많았다. 사천에 있는 당문, 청성, 아미가 그랬고, 하남에 공존하는 소림과 개방도, 서안을 두고 서로 으르렁대는 화산파와 종남파도 주기적으로 경연을 개최해서 친목을 도모하고 꽌시를 과시했다.
“······검후 님의 제안이라면 좋소, 받아들이리다.”
그리고 구파일방 중 하나인 항산파와 공동파가 꽌시를 맺는다는 건, 아무리 서로 은원으로 얽힌 관계라더라도 다 망한 공동파에게는 이득이면 이득이지 손해는 아니었다.
항산파의 후광으로 서문세가의 간섭을 앞으로도 일정 부분 차단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오히려 항산파 쪽이 살짝 손해 보는 제안인 수준이었다.
전영도 잘 알고 있는지 검후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시일은 내년부터 일 년 간격으로, 장소는 귀 파와 본 파 사이에 번갈아가며 개최하는 건 어떨까요? 첫 경연은 본 파에서 준비하도록 하죠.”
“좋소.”
“좋아요. 그럼 내년에 다시 뵈어요. 공동파 여러분. 그리고······.”
마지막으로 산문에 서서, 검후가 우리를 바라보며 인사하더니 그녀의 은빛 시선이 내게 머물렀다.
“······이 소협. 고생 많으셨어요.”
그녀가 평소와 같은 차가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검후 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포권지례를 취하며 말했다.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뒤이어 불만을 애써 숨기는 표정의 소검후가 인사했다.
검후 일행을 배웅한 나는 서문청하를 불렀다.
“거기, 서문 시비.”
“왜 부르는 거죠? 공자님?”
내 말에 서문청하가 이를 악문 채로 대답했다.
난주에서 공동산으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철저히 그녀를 하녀로서 부려먹었다.
어차피 공식적으로 이제는 내 전속 시비, 메이드가 아닌가?
그녀 본인도 인정한 시비 신분이다. 공증인까지 입회한 정당한 비무의 결과니까 말이다.
그러니 노동력으로 부려먹어야 할 수밖에.
“둘이서 할 말이 있다. 따라오도록.”
내 말을 들은 서문청하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두, 둘이서라니, 서, 설마······! 드디어 저를······!”
화들짝 놀라면서 가슴을 양팔로 감싸는 서문청하.
쟤가 왜 저래.
어이가 없다. 대체 무슨 망상을 하는 거지?
“이상한 망상하지 말고 따라오라면 따라와.”
“흥. 만에 하나라도 불미스러운 일을 했다가는······. 가, 각오하는 게 좋을 거예요!”
내가 먼저 몸을 날리자, 서문청하가 입술을 삐죽이면서 나를 따라 몸을 날렸다.
*
같은 시각.
이철수의 배웅을 받아 공동산을 내려온 검후 일행은 미리 준비해둔 마차에 올라탔다.
“드디어 감숙에서의 지겨운 일정이 전부 끝나는군요! 사부님께서도 수고 많으셨어요! 호호호호호!”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소검후가 웃었다.
“그래. 너도 고생했구나.”
검후는 제자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마차 창문 밖으로 멀어져가는 공동산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상공······. 소첩, 너무 행복했어요. 후후. 상공과 함께 해서.’
공동산에서 그분과 함께 보냈던 시간은 검후에게 꿈만 같았다.
너무 행복했다. 마치 구름 위를 거니는 것 같은 기분. 극락이 있다면 여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행복했다.
‘소첩한테 여인의 행복을 일깨워주시다니······. 소첩, 이제 상공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그토록 바랐던 여인의 행복을 드디어 찾았다.
이제 상공을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더 있고 싶었다. 상공의 곁에 계속 머무르고 싶었다. 그분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항산파의 장문인이었기에, 상공과 아직은 백년가약을 맺지 않았기에.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마냥 슬프기만 한 건 아니었다.
‘상공과 다시 만나기로 했으니까······.’
약속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매년 항산파와 공동파가 서로 교류 경연을 열기로 했으니, 정기적으로 상공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경연을 핑계로 상공의 무공 성취도 점검하고, 상공의 무공 성취를 끌어올리기 위한 지도 대련도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를 넘어 일석삼조, 아니 그 이상의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상공, 매일 무공을 단련하던 상공의 모습, 소첩은 전부 기억하고 있어요.’
그날의 대련 이후.
검후는 기척을 숨긴 채로 이철수의 개인 수행을 몰래 훔쳐봤다.
물론 강호 무림의 금기를 범하는 거라는 인식은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검후는 상공의 모습을 일각이라도 더 눈에 담고 싶었다.
그래서 결례를 범했다.
‘소첩이 상공께 범한 결례는 꼭 혼인 후에 상공의 부인이 되어 밤마다 갚을게요, 소, 소첩의 몸으로······.’
그렇게 양심의 가책을 느껴가면서 훔쳐본 이철수의 수행은, 그녀를 또 반하게 만들었다.
이철수.
그녀의 상공은 매일매일, 꾸준히 외공과 내공, 검법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것도 범인의 연습량을 아득히 초월한, 살인적인 수준으로 말이다.
‘상공, 소첩과의 대결에 그렇게 진심으로 임하시다니······.’
그가 말한 대로 성년이 되어 그녀에게 공동의 검을 보여주기 위해.
검후 은설란과의 비무에서 승리하여 그녀를 아내로 삼기 위해.
상공은 끝없는 노력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말이다.
개인 수행에서 스스로와의 싸움이 얼마나 중요한지, 검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개인 수행의 가장 큰 적은 나태였다. 이쯤 하면 되겠지, 오늘은 쉬어도 되겠지. 같은 나태가 좀먹는 순간, 발전은 거기서 끝나는 거였다.
하지만 고수도 사람인 이상, 수행을 거르는 날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철수는 아니었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살인적인 수행을 계속해서 소화했던 것이다.
거기다 수행 중에 땀에 달라붙어서 드러나는 그분의 탄탄하고 아름다운 근육에 커다란 대물.
그분의 땀 냄새까지 전부.
검후는 상공의 전부를 사랑했다.
‘꺄아, 상공. 1년 뒤에는 얼마나 더 늠름해지실지, 소첩 벌써 기대해버려요.’
검후의 머릿속에 1년 후, 더 늠름해진 상공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이미 상공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1년 후를 기약하면서, 검후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본산으로 돌아가면 상공과의 일을 일기에 기록해야지.’
상공과의 만남을, 그녀만 볼 수 있는 비밀 일기에 기록하리라 다짐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