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진짜 억울하다고
“칭찬 고맙군.”
“흥.”
내 말을 들은 서문청하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내 앞에 선 서문청하 너머에는 서문세가 가주인 진천검왕 서문현천과 대공자인 서문표, 이공자인 서문위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공증인이 있었다.
연분홍색 위로 수놓아진 매화가 인상적인 무복을 입은 중년인.
구파일방 중에서 매화검법으로 그 이름이 중세 무림과 현대 한국 양쪽 세계 모두에 드높은 화산파의 장로였다.
장로 옆에는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소년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사형만큼은 아니지만 송옥과 반안을 논할 정도의 미남자.
정파제일 후기지수이자 검룡(劍龍)이라 불리는 화산파의 유망주 진패선이었다.
“서문세가 측 공증인으로 화산파가 참석하다니.”
“저 공자가 소문의 검룡인가요? 실물로 보니 더욱 잘생겼군요.”
“차세대 정파 무림의 동량지재라고 들었소.”
“정파제일 후기지수라더니······. 과연 기개가 헌앙하고 용모가 관옥과도 같구만.”
“송옥과 반안이 여기 있구나.”
천하제일검을 논할 수 있을 정도의 재능이자 화산파를 천하제일검문으로 만들 기재.
그것이 검룡이 화산파와 정파 무림에게 받는 기대였다.
물론 천무지체인 우리 사형이 등장하면서 1회차 미래에서 검룡은 천하제일검이 아닌 천하제이검으로 전락한다.
영원한 2인자의 자리에 열등감을 느낀 검룡은 자존심도 버린 채 훗날 비무행을 행하는 사형을 남궁세가, 점창파, 청성파의 최고수들과 급습해서 합공했지만, 그 대결에서도 패했다. 이후 검룡은 평생 속죄하겠다며 화산파에 칩거하고 다시는 강호에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전생에서 검룡이 걸었던 길.
하지만 계속 검룡을 찬양하는 말을 들으니 속이 뒤집혔다.
‘화산파가 뭐가 좋다고.’
매화나 날려대는 하남자 문파가 뭐가 좋다고. 화산파 무학은 정력에 쓸모도 없다. 화산파보다는 역시 종남파지.
게다가 종남파 무학은 천하삼십육검에서도 볼 수 있듯 지구력을 중시하는 무학. 역시 심폐 지구력이 중요한 정력과 궁합도 좋았다.
현대에서 무협소설을 읽었을 때부터 나는 종남파가 좋았다. 한 자루 검으로 중원을 평정한다니, 이 얼마나 간지 넘치는 상남자의 문파인가?
만일 내가 환생 대법으로 미래로 전생했다면 아마도 종남파에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공동신협도 만만치 않소.”
“천무지체라지? 용모도 지금 보니 송옥과 반안의 현신이라 할 만 하구만.”
“척과영거의 고사가 생각나는구려.”
“검룡보다 용모는 더 준수한 것 같소.”
귓가에 이번에는 사형을 칭찬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사형의 칭찬을 들은 검룡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기분이 상한 모양.
그래, 이거지.
오늘따라 사형이 예뻐 보였다.
그래도 우리 집 개가 남의 집 개보다는 더 귀여워 보이는 법이니까.
화산파 맞은 편에는 검후 은설란과 소검후 천소빈이 앉아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검후가 시선을 피했다.
옆에는 입이 댓 발 나온 소검후가 나를 흘겨보고 있었다.
“시간을 내서 참석해주신 강호 무림의 동도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드리오! 소인은 화산파의 진패선이라 하오!”
이번 비무 MC 역할은 검룡이 하는 모양.
“와아아아! 검룡!”
“정파제일 후기지수!”
“화산파의 일대기재!”
진패선의 말에 군중들이 환호했다.
환호성을 들은 진패선이 말했다.
“······본 비무는 서문세가의 서문청하와 공동파의 이철수 사이의 은원을······.”
이미 다 아는 비무 취지를 검룡이 줄줄 읊었다.
“하여 패자는 승자의 몸종이 되는 것으로······.”
하지만 문제는 대가 부분이었다.
검룡의 말에서 몸종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관중석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패자가 승자의 몸종이 된다고?”
“그 대가가 정녕 사실이었단 말인가?”
“이건 필시 공동괴협이 먼저 말한 제안이 분명하네!”“감숙제일미인 서문 소저를 노리다니······.”
“역시 쌍발색검······.”
또 쌍발색검이라고?
하.
어이가 없다.
게다가 내가 먼저 제안했다니. 어디서 이런 유언비어가 퍼진 거지.
역시 진천검왕의 짓이 틀림없다.
선동과 날조를 하다니······.
나와 눈이 마주친 진천검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대로 쌍발색검으로 살 수는 없다.
2년 후 용봉지회에서 내 별호를 반드시 바꿔야 했다.
진패선의 검룡, 저 별호를 반드시 내가 빼앗으리라. 그래서 내가 검룡이 되어 진패선보다 더 인기남이 될 것이다.
“······하여 지금부터 서문세가의 서문청하 대 공동파의 이철수, 두 사람의 비무를 시작하겠소!”
검룡의 입에서 비무 시작 선언이 울렷다.
그와 동시에 중인들의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스르릉.
나는 검을 뽑아 들었다.
“······정사지쟁에서 음란 행위를 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제가 당신과 통정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리다니······.”
서문청하가 나를 매도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검을 뽑았다.
“······이제 오늘, 그 대가를 치르게 해주죠! 쌍발색검 이철수!”
쌍발색검 아니라니까.
내가 얼마나 신사적인 사람인데. 어이가 없어진 내가 혀를 찬 그때.
쿠-웅!
서문청하의 발이 비무대를 찍으며 지축이 울렸다.
서문세가의 상승 보신경인 파황보(破荒步)였다. 그와 함께 서문청하의 몸에서 기세가 피어올랐다.
그녀가 검을 뽑았다. 평균 크기인 내 검과는 다른, 양손으로 들고 휘두르는 육중한 대검이었다.
서문세가의 무학은 내력을 검에 더해 무게를 높여 큰 한 방을 노리는 중검.
그리고 공간을 장악해서 반격의 여지를 봉쇄하며 후발선제의 묘리를 담은 둔검이었다.
그녀의 몸에서 피어오른 기세가 비무대 전체를 장악했다.
서문청하의 눈에서 안광이 번쩍였다.
“각오하세요!”
서문청하의 대검이 휘둘러졌다.
굉천패왕검(轟天霸王劍).
서문세가를 육대세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진산절학이 서문청하의 손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천천히 휘둘러지는 대검.
휘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뒤이어 대검에서 피어오르는 압도적인 검풍이 공간을 전부 장악했다.
쿠웅!
서문청하가 다시 일보를 내디뎠다. 지축이 울리며 검풍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모든 투로를 차단당한 상황에서 내게 천천히 다가오는 거대한 대검의 칼날.
느리지만 막을 수 없는 일격.
온몸으로 느껴지는 압박감.
과연 하늘마저 떨어 울린다는 서문세가의 검다웠다.
흑사룡만큼은 아니지만, 검봉이라 자처할 만한 실력이었다.
상대가 나만 아니라면 말이다.
나는 검을 들었다.
“흐흐흐······.”
음양이기를 끌어올리고 혼원공으로 통제했다. 음기가 백회혈로 양기가 기해혈로 향한다. 수승화강의 완성과 함께 폭발적인 내력이 전신에서 일어났다.
검을 들었다.
내 철검에서 검풍이 피어올랐다.
고오오오오오오오!
그때.
“웃음소리마저 음침하군요!”
내 웃음소리를 들은 서문청하가 나를 디스했다.
뭐?
음침하다고?
이 상남자의 웃음소리가?
어이가 없네.
나는 그대로 복마검법을 펼쳐 서문청하의 굉천패왕검을 받아쳤다.
콰-광!
내력이 실린 서문청하의 대검과 내 검이 맞부딪히며 폭음이 일어났다.
막대한 내력이 실린 대검을 정면으로 받아친 탓일까, 칼날을 타고 밀려든 반동이 손에 그대로 전해졌다.
손아귀가 찢어질 듯 아팠다.
이를 악물었다.
반면에 서문청하는 여유 넘치는 표정이었다.
“일격은 막아냈군요. 하지만 다음 초식도 막을 수 있을까요?”
그녀가 차갑게 웃었다.
서문청하가 곧바로 두 번째 검격을 날렸다.
휘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다시 공간을 장악하는 검풍의 폭풍. 느리지만 막을 수 없는 두 번째 검격을 보면서 나는 혀를 찼다.
공간을 장악하고 천천히 적을 압박하며 막을 수 없는 일격을 날리는 서문세가의 검과 공방일체와 강공을 지향하는 공동파의 검은 상성이 좋지 않다.
유능제강을 지향하는 무당파라면 모를까.
그녀와 나의 경지는 대동소이.
하지만 이대로면 상성 차이로 패배할 수밖에 없다. 흑사룡과 싸울 때처럼 힘을 끌어낸다면 승리하겠지만.
‘그건 안 되지.’
그러면 반드시 양물이 발기한다.
저번 정사지쟁 때 이기고도 양물을 세워서 쌍발색검이라는 오명을 얻은 것만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그렇게 이기면 안 된다.
나는 색마가 아니다.
‘어쩔 수 없군. 다신 쓰지 않겠다 생각했건만······.’
그러니 다른 방법으로 이겨야 했다.
구화음백조.
그 게이 같은 조법을 여기서 복마검법에 섞어서 응용해야 했다. 구화음백조는 음침한 고자 변태 내시 무공답게 졸렬한 빈틈 파고들기와 기습, 속임수와 카운터가 중점인 무공.
온몸에 압박감이 밀려들었다.
나는 그대로 행운유수를 펼쳤다.
일보를 내디디자 몸이 한 조각 구름처럼 자연스럽게 일순간 서문청하의 사각으로 빠져들었다.
“?!”
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서문청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와 나는 같은 일류의 경지.
내가 일류 초입이고 서문청하가 일류 끝자락이라는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건 잠깐이라면 서문청하의 이목과 기감을 속일 수 있었다.
찰나의 시간.
그것만으로 내게는 충분했다.
구화음백조의 묘리를 살짝 복마검법에 섞는다. 우웅.
내력을 받아들이며 검명이 울린 그때.
“거기였군요! 잔재주도 거기까지예요!”
서문청하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쿠-웅!
굉음과 함께 그녀의 일보가 지축을 재차 울렸다.
뒤이어 검풍이 휘몰아치며 사방을 압박해왔다. 나는 다시 행운유수의 보신경을 밟으며 내 명치를 향해 날아드는 그녀의 느린 대검을 구화음백조의 묘리가 섞인 복마검법으로 받아쳤다.
“이번에는 막을 수 없······.”
서문청하가 자신 넘치는 목소리로 말하는 걸 무시했다. 구화음백조의 졸렬한 무리가 발현된다. 꾸불꾸불.
그녀의 공격을 어느 정도 상쇄한 내 철검이 뱀처럼 대검을 타고 올라 그대로 서문청하의 목줄기를 향했다.
“?!”
서문청하의 눈빛이 흔들렸다.
서문세가의 무공은 한 방 한 방이 느리고 강력하고 동작이 큰 만큼, 한 번 정한 공격 방향을 바꾸기 힘들었다.
이대로면 그녀의 공격은 내게 경상을, 내 공격으로 그녀는 중상을 입을 상황.
서문청하가 이를 악물었다.
쿠웅.
그녀가 반대 방향으로 일보를 내디뎠다.
그와 함께 서문청하의 대검에 황토색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검기(劍氣)였다. 검기를 발현한 서문청하가 검의 궤도를 뒤틀었다.
사실상 전력을 다한 방어 후 반격을 하겠다는 의사였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저쪽이 검기를 사용했으면, 이쪽도 사용해야 했다. 지금 우세를 점하고 있을 때.
역라순혈공을 운용했다. 내공이 순식간에 몸을 휘돌면서 증폭되었다.
이제 멋지게, 마치 무협소설 주인공처럼 숨겨진 힘을 해방해서 역전할 차례인가?
좋아 전부 계획대로야.
우우우우우웅!
검명과 함께 칼날에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거, 검기라고요?!”
내 성취를 본 서문청하가 놀랐다. 그야 당연하겠지. 그녀는 날 일류가 아닌 이류라고 생각했을 테니. 나는 그대로 검기가 실린 철검을 서문청하를 향해 찔렀다.
콰-광!
그녀의 황토빛 검기와 내 흑색 검기가 부딪히며 폭음이 일어났다.
검기의 파편이 튀면서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생채기가 나면서 피가 주륵 흘렀다.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서문청하의 공격 대부분은 내 공격에 상쇄되어 위력을 잃었다.
반면에 내 공격은 구화음백조의 묘리를 통해 서문청하의 빈틈을 파고들어 적중했다.
물론 완전 적중한 건 아니다. 마지막에 그녀가 내 공격을 일부 쳐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겼다.
이거 흉터 남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안 되는데.
여인들에게 인기 많으려면 얼굴에 잡티 하나 없어야 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서문청하를 바라본 순간.
“꺄아아아아······!!”
뾰족한 비명이 비무대를 울렸다.
시야에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옷이 전부 찢겨버려 전신의 맨살이 그대로 만천하에 드러난, 반라의 서문청하가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는 가슴과 아랫도리를 양팔로 가리면서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쿠웅.
그녀의 대검이 손에서 떨어져 바닥에 꽂혔다.
순간.
비무대가 얼어붙었다.
“이, 이이이이 색마아아아아!!”
아니.
고의가 아닌데.
이번엔 진짜 억울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