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아직 어린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
기척이 멀어지는 걸 확인한 유진휘가 사제를 꼬옥 끌어안았다.
오랜만에 안아보는 사제의 몸이었다.
어렸을 때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지금은 그녀의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붕대로 애써 감춘 가슴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사제의 체취도, 감촉도, 체온도, 전부.
그녀가 애써 부정해왔던 여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실시간으로 상기시키고 있었다.
사실 알고 있었다.
무표정을 가장하는 검후였지만, 사제를 보는 시선만큼은 냉미녀라는 소문이 자자한 검후답지 않게 끈적한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화경의 고수인 검후의 기척이 이제 이류 끝자락에 이른 사제의 기감에 걸렸다는 검후의 말이 전제 자체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검후는 일부러 접근했다는 사실을.
아니 나아가서 서문청하가 사제와 통정한다는 소문을 듣고도, 거짓임이 분명한데도 불안에 떨었음을, 능월향과의 소문도 마찬가지였음을.
서하린과 사제 이철수가 맺어지면, 당연히 사문의 경사인데도 결코 기뻐할 수 없게 되었음을.
‘나는······.’
유진휘가 입술을 깨물었다.
전부 부정해왔다.
왜냐하면 사형이니까, 사내여야만 하니까. 맏이여야만 하니까. 장차 공동파를 재건해야 할 동량지재니까. 천무지체의 재능으로 공동파를 부흥해야 하니까.
······여인으로서 결함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사내로 살아야 했다.
하지만······.
‘······나는 사제가······. 좋아······.’
유진휘는 비로소 스스로의 연심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오래전부터, 어쩌면 사제가 영약을 양보했을 때부터······.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그녀는 사제를 사랑했다.
하나뿐인 사제가 좋았다. 그의 전부가 좋았다. 사문에 헌신하는 그의 모습이, 기껏 찾은 영약을 사형에게 양보하는 사제의 모습이, 사형인 그녀가 전부 짊어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손수건을 건네는 사제의 모습이 좋았다.
천무지체.
달리 세간에서 말하길, 천살성(天殺星)이라고도 했다. 둘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았다. 압도적인 무재를 타고난 천무지체의 소유자에게 세상은 더없이 하찮고 인간은 미물과 같은 존재로 보였다.
당연히 인간이 인간으로 안 느껴지는 만큼 인간성을 잃어버리기도 쉬웠다. 범인과는 체질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인간성을 잃어버린 천무지체는 천살(天殺)의 업을 짊어져 천살성(天殺星)이라 불렸다.
천하의 기재를 모두 모아도 발끝조차 따라가지 못하는, 인간을 초월하는 압도적인 재능 때문에 자칫하면 잃어버릴 뻔했던 그녀의 인간성. 그걸 붙잡아준 건 처음에는 사부와의 관계와 사부가 부여한 사문의 재건이라는 의무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사제가 그녀의 마음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제는 전부가 되었다.
하지만 멀리했다.
사제는 사내인 그녀를 별로 좋아하는 눈치가 아니었기에.
사제가 싫어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기에.
불완전한 몸으로 사제의 품에 안길 수 없었기에.
그랬는데.
‘······.’
유진휘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서하린에게 쓰러진 사제를 건넸다.
“사매가 사제를 좀 보살펴줘. 난 먼저······. 들어가 볼게.”“편안한 밤 되십시오. 유 사형.”
서하린의 고저 없는 배웅 인사를 들으면서 유진휘는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뒤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좋아해, 사제.’
결코 내뱉을 수 없는 말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유진휘가 저벅저벅 걸어가 방 한쪽 구석에 있는 궤짝의 자물쇠를 품에 있는 열쇠로 열었다.
딸칵.
궤짝 안에는, 그녀가 애써 사문 몰래 모아둔 물건들이 있었다.
거울부터 분가루, 비녀, 노리개 같은 여인의 물품이었다.
유진휘가 앞섬 안으로 손을 넣었다.
스르륵.
그녀의 붕대가 천천히 풀려 땅으로 떨어졌다. 붕대를 풀면서 축골공과 역용술도 동시에 해제했다.
체형이 서서히 달라지면서 완전히 여인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검후처럼은 아니지만, 제법 커다란 가슴이 창살 너머 들어오는 달빛에 비쳤다.
남장을 푼 유진휘의 시선이 거울을 향했다.
거기에는 절세미녀가 서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아름다운 머리카락, 반짝이는 눈동자가 인상적인 미소녀. 천하제일미 적사월과도 비견될만한 미색을 지닌 화용월태의 미소녀였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겉모습이 어쨌건 상관없었다. 그녀에게는 결함이 있었으니까.
공자가어(孔子家語)에서 이르기를 부유칠출 삼불거(婦有七出 三不去)라 했다.
먼 해동 땅에서는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 부른다는, 여인의 부덕함을 논하는 가르침이었다.
부인으로서 일곱 가지 추방인 칠출(七出)에는 무자자(無子者)가 있었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여인은 추방당해도 마땅했다. 실제로 불임임이 들통난 이후 소박맞는 여인들은 세간에 수없이 많았다.
그리고 그녀는 천무지체를 타고난 대가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유진휘의 손이 떨렸다.그녀의 떨리는 손이 자궁이 있는 복부를 쓰다듬었다.
‘이 몸으로는 사제의 여인이 될 수 없어.’
자식을 낳지 못해 대를 이을 수 없는 여인을 좋아하는 사내는 천하 어디에도 없었다.
여인이 아닌, 괴물에 불과한 그녀를 좋아할 수 있는 사내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평생 사랑받을 수 없다.
사제 역시 그럴 것이다.
이 사실을 알면, 사제는 그녀를 멀리할 것이다.
사제에게 사랑받지 못한다.
그녀의 전부인 사제가 자신을 미워한다.
그 사실이 유진휘는 너무나 무서웠다.
‘그러니까 여인이 아닌, 이 모습도······. 아무 의미 없어.’
유진휘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손을 휘두르자, 거울에 엉망진창 금이 갔다.
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더 이상 보기 싫다.
딸칵.
유진휘가 아무렇게나 궤짝을 닫았다.
여인의 모습을 한 그녀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런 몸이라도, 사제에게 안기고 싶었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미움받고 싶지는 않았다.
복잡한 감정이 그녀의 마음속에 소용돌이친 순간.
그녀의 머리에 한 줄기 희망이 떠올랐다.
유진휘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사제를 지켜줄게. 천하제일인이 되어서라도.”
천하제일(天下第一)이 된다면. 그래서 강호 무림에 군림할 수 있다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강호 무림의 하늘이 되어버린다면.
그래서 천하를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면.
어쩌면······.
여인으로서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도.
받아줄지도 몰랐다.
정처가 아니라도, 첩실이라도, 설령 정부(情婦)라도 좋으니까.
유진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얼굴을 무릎 사이에 파묻었다.
쉴 새 없이 흐르는 유진휘의 뜨거운 눈물이 무릎을 적셨다.
*
일류의 경지에 오른 그날.
나는 낮에 쓰러진 이후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깨어났다.
그동안 쌓인 피로가 잠으로 되돌아온 모양.
물론 더 쉴 필요는 없었기에 즉시 일어난 나는 다시 개인 수행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검후가 그날 이후로 나를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뭐, 검후 정도 되는 고수가 작정하고 기척을 감추고 나를 훔쳐보겠다면 지금의 내가 감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뭐 근데 설마 화경의 고수 주제에 고작 일류따리밖에 안 되는 내 수행을 계속 훔쳐보겠어?
시험도 통과했는데?
검후는 꽤나 엄격한 성격이고, 저번 시험도 잘 통과했으니 이제 더 이상 내 수행 같은 건 안 훔쳐볼 거다.
바쁜 양반이기도 하고.
아무튼 그렇게 일류에 오르고도 매일 외공 수행, 정력 수행, 케겔과 스쿼트와 검술 수행을 거르지 않고 꾸준히 반복하던 어느 날.
마침내 일주일 째가 되었다.
나는 수행을 빨리 끝낸 뒤, 공동산을 하산해 가장 먼저 곤화루부터 찾았다.
비무 토토 배팅을 위해서였다.
“어서 오십시오. 이 소협.”
낮이라 영업하지 않는 곤화루 1층.
테이블을 닦던 하 총관이 나를 반겼다. 이제는 자주 찾아와서인지, 제법 미운 정이 들은 건지 적사월이 뭐라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 총관은 이제 나를 깍듯이 손님으로 대하고 있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이번 서문세가 대 공동파 비무 도박판에도 돈을 걸어보려고.”
나는 하 총관에게 말했다.
이번 비무는 강호 무림 전체를 위진한 정사지쟁만큼은 아니지만, 감숙 무림을 뒤흔들 일대사건이었다.
당연히 하오문이 비무 도박판을 벌였을 터. 배당은 또 내가 낮을 것이다.
아무리 내가 저번 비무에서 흑룡방 후기지수 둘을 잡았다지만, 그건 이류따리 놈들에 불과했다
일류 고수이자 사룡오봉의 일원인 검봉 서문청하에 비비기에는 아직 내가 객관적 열세라는 소리였다.
물론 20배 배당은 아니겠지만, 어쨌건 이번에도 내가 역배인 것이다.
돈을 안 걸면 등신 호구다.
“아, 도박하시려면 특실로······.”
“안 가.”
자연스럽게 특실로 안내하려던 하 총관의 말에 나는 손을 내저었다.
특실이라고 말하는 걸 보니 이번에도 적사월이 날 만나려는 모양인데, 지금은 안 된다.
저번 루머 멋대로 퍼뜨린 것도 그거지만, 사부가 당부한 것도 있고 하니 당분간은 그녀를 피하는 쪽이 좋았다.
“네? 대, 대체 왜······.”
“원래 이 지부는 네가 담당이잖아. 그래서 나 말고 다른 도박꾼 돈들은 네가 받아서 관리하는 거 다 아니까, 네가 받아.”
내 말을 들은 하 총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대체 무슨 전음을 들은 거지.
하 총관이 빌듯이 내게 말했다.
“하, 하지만······. 이 소협, 아니 대협. 제발 특실로······.”
“안 가. 때려 죽어도 안 가. 또 특실로 가라고 하면 이 주루 다시는 안 올 거야.”
그래도 안 된다.
지금 적사월이랑 만나면 안 된다. 밀당으로 치면 지금은 밀어내야 할 때였다.
“그, 그게······.”
“······아무튼 네가 돈 받아.”
“그건······. 좀······. 윽······.”
내 말에 하 총관이 당황했다.
서로의 침묵이 이어지던 그때.
“······아, 알겠습니다. 네. 제가 받겠습니다.”
전음을 받은 듯한 하 총관이 내게 고개를 숙였다.
마침내 적사월이 백기를 든 것이다.
“배당은 얼마지?”
“공동파의 이 소협이······.”
내 말에 하 총관이 배당을 말했다.
나에게 걸린 배당률은 현대식으로 환산하면 5배.
저번의 20배만큼은 아니지만, 꽤 높은 역배당이었다.
나는 품에서 저번 비무 토토로 딴 배당금에서 개방에 정보료로 지불한 반 냥을 제외한 199.5냥을 전부 하 총관에게 건넸다.
“이번에도 이거 전부, 나한테 건다.”
“······네, 알겠습니다. 여기 목패입니다. 돈 찾으실 때는 꼭 좀 특실로 들러주십시오.”
나는 목패를 받아든 뒤에 품에 넣고 곤화루를 떠났다.
그렇게 곤화루를 떠난 내 발걸음이 닿은 곳은 화정현 외곽의 관제묘. 개방 화정현 지부였다.
관제묘 마당에 커다란 솥을 걸어놓고 보신탕을 끓여먹고 있는 거지 무리가 보였다.
그 사이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홍취개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게 누구인가? 우리 공동괴협 이철수 소협이 아닌가?”
취기가 오른 건지 얼굴이 벌개진 홍취개.
술냄새와 안 씻은 거지 냄새가 뒤섞이며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
나는 얼굴 근육을 통제하면서 말했다.
“칠 일이 지났으니, 왕삼, 장이현에 대한 정보를 들으러 왔다.”
내 말을 들은 홍취개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다.
홍취개가 눈을 감고 가부좌를 튼 뒤에 내력으로 취기를 전부 몰아냈다.
잠시 후, 숙취가 남아 있는 듯한 얼굴을 한 홍취개가 내게 말했다.
“마침 잘 왔군. 난주의 감숙 분타에서 방금 답장을 받은 참이야. 들어가세.”
이번에도 버려진 관제묘로 나를 안내하는 홍취개.
나는 내가 부순 나무 바닥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관제묘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아, 말하기 전에 우선. 손님이 왔는데 개방은 대접도 안 하나?”
나는 마당에서 보신탕 파티를 벌이는 거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신탕.
예로부터 개고기는 정력에 좋다고 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내 말을 들은 홍취개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개방에서 무슨 대접······. 설마 저 개고기를······.”
마치 거지에게 어떻게 뜯어낼 수 있냐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 이철수.
정력에 좋다면 벼룩의 간이라도 빼먹을 수 있었다.
“손님이 왔으면 대접하는 것이 예의거늘, 아무리 거지라 하더라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지켜야 할 도의마저 저버리는 것인가?”
보편적인 접대의 관습을 들이밀자 홍취개의 표정이 굳었다.
잠깐의 침묵.
“정말 먹으려고?”
“그래.”
식사 시간에 손님이 찾아온다면 대접하는 것이 이 시대의 예의.
내 제안은 아주 당연하고 논리적이었다.
“······이런 미친······. 살다 살다 거지 동냥을 뜯어먹는 미친놈은 처음 보는군.”
홍취개가 나를 극찬하면서 밖에 나갔다.
곧이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개고기 덩어리가 내 앞에 놓여졌다.
“자, 드시게.”
나는 그에게서 개고기를 받아먹어서 뜯었다.
음, 양념이 꽤 잘 되어있군. 오래 끓여서 살이 야들야들하게 푹 익은 건 덤이다.
거지들 꽤 하는데?
마찬가지로 본인 몫의 개고기를 뜯으면서, 홍취개가 기름으로 번들번들한 손가락을 쪽쪽 빨아대며 말했다.
“우선 노예상인 왕삼이라는 자는 이 년 전 상행을 떠났다가 실종되었다고 하네. 말이 실종이지 아직 행적을 못 찾은 걸 보면 산적이라도 만나 객사했을 테지. 거기까지는 별 특별할 일 없는 행적이네.”
치안이 남미보다 더 심각한 중세 무림에서 길 가다 칼 맞고 객사하는 건 뉴스거리도 못 됐다.
홍취개 말대로 너무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네. 놈의 행적을 조사해보니 자네 말대로 놈이 오 년 전부터 오갈곳 없는 고아나 빈민가의 아이들을 납치해다가 여아는 매음굴로, 남아는 거세해서 환관으로 매매한 정황이 포착되었네. 정말 천인공노한 악인이 따로 없어!”
이것도 내가 전생에서 왕삼을 조지기 위해 동창을 시켜 조사해 밝혀낸 내용이었다.
왕삼 그 새끼는 진짜 쓰레기였다.
내 양물의 위기만 아니었다면, 더 처참한 고통을 겪게 만들어줬을 것이다.
“그리고 왕삼과 결탁한 엄공 장이현. 이 자는 제법 수완 좋은 엄공으로 유명했지만, 뒤로는 왕삼이 납치한 아이들을 거세해서 화자로 만들어 환관으로 궁에 팔아넘기고 있었네. 하지만 그 장이현도 얼마 전에 집 안에서 목을 맨 채로 발견되었다고 하네. 본인의 죄를 고백하는 유서를 남기고 말일세. 저승으로 도피한 셈이지.”
뒤이은 홍취개의 말에 나는 뜯던 개고기를 멈췄다.
자살했다.
아니, 이건 자살이 아니다.
자살을 위장한 타살이었다. 동창이 자주 사용하는 수법이었다.
동창이 개입했다. 그것도 내 영향력이 닿지 않는 저 먼 북경에서.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이다.
‘황상, 정말로 돌아오셨군요.’
원화제 주가율.
내 손으로 보위에 올린 그녀가 나를 따라 회귀했다.
툭.
내 손에 들린, 뜯다 만 개고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