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아주버님과 아가씨
“아······.”
스르륵.
위타복마를 미처 막아내지 못했던 탓일까. 검후의 앞섬이 잘려 풀어졌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골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와 함께 정신을 잃은 이철수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검후는 황급히 그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푹신하고 풍만한 가슴에 이철수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묻혔다.
“훌륭했습니다.”
이철수가 들을 리 없었지만, 검후는 붉어진 얼굴로 그를 안은 채로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상공.’
검후가 뒷말을 삼켰다.
두근, 두근.
그녀의 가슴에 이철수의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검후의 심장이 뛰었다.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는 느낌. 얼굴이 새빨개졌다. 상공과 접촉하고 있다. 그를 안고 있다. 그건 지금까지 남자 손 한 번 잡아본 적 없던 검후에게는 지나친 자극이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검후는 그대로 상공을 계속, 소중히 꼬옥 안은 채로 얼굴을 잔뜩 붉힌 채 서 있었다.
이철수도 마찬가지로 그녀의 검격으로 무복이 찢긴 상태. 여인에게 인기를 얻겠다는 일념만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외공을 수행한 그의 탄탄한 근육 감촉이 그대로 검후에게 전해졌다
너무 좋았다.
첫날밤이 된다면, 이 탄탄한 가슴에 안기는 걸까.
상공께서 나를······.
그렇게 한참 이철수를 안고 망측한 상상을 하던 검후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내 정신 좀 봐. 상공, 괜찮으시겠지?’
검후가 조심스럽게 품에서 이철수를 떼어냈다.
그녀가 이철수를 부축한 채로, 조심스럽게 바닥에 뒹구는 이철수의 철검을 수습한 뒤에 지붕이 있는, 그나마 깨끗한 전각 쪽으로 향했다. 검후는 이철수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누이며 그의 머리를 허벅지로 받쳤다.
검후가 조심스럽게 이철수의 손목을 만져 진맥을 실행했다.
다행히 기혈은 정상이었다. 호흡도 정상적이었다.
‘심득을 얻은 반동으로 혼절하셨군요. 후후. 소첩, 상공의 깨달음에 도움을 줄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
이철수의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던 검후가 얼굴을 붉혔다.
‘상공. 어찌 이렇게 잘생기셨는지······. 몸도 탄탄하고······.’
그녀의 눈에 이철수는 이미 세상에서 제일가는 미남이었다. 하지만 몸은 콩깍지를 빼고도 객관적으로도 매우 아름다운, 이상적인 사내의 몸이었다.
여인이라면 누구라도 안기고 싶을 만큼 말이다.
그녀는 방금 있었던 상공과의 대련을 복기했다.
이철수의 경지는 이류. 그 정도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실례인 줄 알면서도 일부러 기척을 드러낸 건, 금기를 범한 대가를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비무를 앞둔 이철수에게 가르침을 주고, 장차 검후 그녀에게 도전할 이철수의 실력을 키워서 그를 고수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무조건 패배할 생각인 검후였지만, 그래도 이철수가 고수가 되어 그녀를 쓰러뜨리는 쪽이 여러 가지 면에서 더 좋은 결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검에 열중하던 상공의 모습, 순식간에 일류를 돌파해서 검기를 발현하던 상공의 모습······. 꺄아. 상공. 빨리 성년이 돼서 소첩을 쓰러뜨리러 오셔야 해요.’
그리고 이철수가 보여준 모습은 그녀의 상상 이상이었다.
이류에 불과했던 이철수는 그녀와의 대련만으로 일류를 돌파했고, 심득을 얻어 결국 그녀가 월녀검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몰아갈 정도로 발전했다.
대련 도중에 무시무시한 속도로 성장하는 상공이었다.
이대로 성년이 된다면, 더 늠름한 청년 고수로 성장할지도 몰랐다.
두근, 두근.
청년 고수가 된 이철수의 모습을, 항산파 산문을 지나쳐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녀를 쓰러뜨리는 이철수의 모습을, 그날 밤 상공의 품에 안기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린 검후의 얼굴이 붉어졌다.
마지막으로 내뱉은 이철수의 말이 검후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뒷말이 생략되었지만, 검후는 그가 말하려던 내용을 알고 있었다.
‘상공이 펼친 공동의 검······. 소첩을 쓰러뜨릴 검······. 오늘 충분히 온몸으로 느꼈어요.’
검후가 눈을 감았다.
이철수가 그리던 아름다운 검의 궤적이 눈앞에 선명했다.
항산의 절학과는 반대인, 공방일체의 직선적이고 실전적인 검로.
은설란은 별호가 검후이며, 검문인 항산파의 장문인인 만큼 누구보다 검을 사랑했다.
아니, 이제는 세상에서 두 번째로 검을 사랑했다. 첫 번째는 오로지 상공의 자리였으니까.
그런 그녀였기에 알 수 있었다.
상공의 검로는 더없이 아름다웠고, 그의 검에 무궁한 가능성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어쩌면 천무지체인 공동검협 유진휘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그뿐만이 아니었다.
은설란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늘 이철수의 수련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이철수의 노력 또한 같이 보았다.
내공에 입문한 고수인데도, 그는 착실히 신체의 기초인 외공을 계속해서 수행하고 있었다.
기초부터 튼실하게, 가장 쉬우면서도 지키기 어려운 힘든 기초 외공 수행을 상공은 매일매일 누가 보지 않아도 구슬땀을 흘리며 계속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검후 은설란.
그녀와의 비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하겠다는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
이철수가 그리던 검의 궤적은, 매일 스스로와의 싸움과 피나는 노력 끝에 탄생한 검인 것이다.
‘소첩, 또 상공한테 반하고 말았어요. 상공, 어찌 이렇게 모든 면에서 멋지고 완벽한 사내대장부이신지······.’
검후 은설란은, 이철수에게 다시 반할 수밖에 없었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당당히 그녀를 본인의 여자로 만들겠다는 포부에 이미 첫눈에 반한 은설란이었다.
하지만 오늘 봤던 그의 노력하는 모습은, 그녀를 반드시 쓰러뜨려 본인의 여자로 삼겠다는 집념이 담긴 일검은 상공을 향한 검후 은설란의 연심을 더 심화하기에 충분했다.
‘상공, 잠깐이나마 흔들린 소첩이 죄송해요. 상공께서는 소첩을 이리 생각해주시는데······.’
능월향과의 통정 소문으로 잠깐이나마 불안했던 검후 은설란이었다.
오늘 그의 개인 수행 장소를 일부러 찾아온 것도, 그러한 불안의 발로였다.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다급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불안함을 이철수는 정면으로 분쇄했다.
이철수가 반드시 여인으로 삼겠다며 말하며 쏘아낸 최후절초는 검후 은설란의 마음마저 꿰뚫어버렸다.
‘소첩의 마음을 이리 완전히 훔치실 줄은 몰랐어요. 나의 상공······. 소첩, 이제는 상공 말고 다른 사내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아요. 오직 상공만이······. 소첩의 지아비가 될 수 있어요.’
그가 너무 좋다.
원래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 상공을 사모하게 되어버렸다.
다른 사내가 아닌 이철수가 좋다.
이제는 다른 사내가 혹시 도전하더라도, 전부 거절할 것이다.
검후 은설란의 지아비는 오직 이철수뿐이니까.
그분을 위한 자리니까.
다른 사내 따위가 감히 앉을 수도 넘볼 수도 없는 자리다.
검후 은설란은 그렇게 다시 맹세했다.
그를 향한 들끓는 연심을 주체하지 못한 은설란이 기감을 통해 주변의 인기척을 파악한 뒤, 무릎을 베고 평온하게 잠든 이철수의 귓가에 아무에게도 안 들릴 정도로 조용히, 달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첩은 기다릴게요. 상공.”
스윽.
검후 은설란의 얼굴에서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무표정 냉미녀로 유명한 평소의 검후와는 정반대인, 오직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보여주는 미소였다.
*
한참 동안 폐 전각에서 이철수를 돌보면서 헤실헤실 웃던 은설란은 노을이 지는 빨간 하늘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공, 감기 걸리시겠어······. 상공과 소첩, 둘만의 시간이 끝나는 건 아쉽지만······. 이제 상공과 헤어져야 할 때인가 봐요.’
이철수는 여전히 잠든 채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힘든 수행을 매일매일 이어가며 누적된 피로가 깨달음을 기점으로 한꺼번에 몰아친 탓이리라.
이제 곧 해가 떨어졌다. 봄이기는 하지만, 밤의 공동산은 다른 산이 그렇듯 제법 쌀쌀했다.
상공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상공을 처소에 돌려보내야 할 때였다.
검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조용히 이철수를 안아 들고는 그가 흔들리지 않게 주의하면서 떼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이끌고 경공을 펼쳤다.
휘이익.
달빛이 내려앉은 공동파의 전경이 그녀의 시야에 보였다.
한때는 찬란했던, 이제는 터만 남은 본산의 폐허를 사뿐한 발걸음으로 넘나든 그녀가 도착한 장소는 청운각.
공동파 제자가 머무르는 전각이었다.
“검후 님?”
전각 입구에는 유진휘가 있었다.
송옥과 반안을 초월한, 천하제일미남을 넘어 고금제일미남과 견줄 만한 미모를 지닌 절세의 미공자.
하지만 그가 아무리 잘생겼다한들, 검후에게는 그저 상공의 사형일 뿐이었다.
오히려 그녀의 시선을 끈 건 서하린이었다.
유진휘 옆에 미묘한 간격으로 서 있는, 검후를 바라보는 백금발의 무표정한 미녀.
장성한다면 현 정파제일미녀인 검후 그녀와도 견줄 만한 미모를 지닌 미소녀였다.
상공의 사형과 사매.
미래에 상공과 백년가약을 맺으면 자주 봐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검후 님이 대체 왜 사제를······.”
유진휘의 시야에 검후의 모습이 들어왔다.
찬란한 달빛이 내려앉은 검후의 은빛 머리카락이 신비롭게 반짝였다.
그야말로 한 폭의 미인도나 다름없는 단아한 미녀였다.
그녀가 되고 싶었던, 하지만 불완전한 몸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이상적인 여인의 모습이었다.
유진휘의 손이 떨렸다.
“낮에 잠깐 일이 있었습니다.”
유진휘의 귓가에 검후의 설명이 들려왔다.
뜻하지 않게 산책 도중 개인 수련을 목격한 이후, 금기를 범한 것에 대한 사죄의 명목으로 대련을 지도했다. 그 도중 이철수가 일류의 경지에 오른 뒤 반동으로 쓰러졌다. 그래서 지금까지 사제를 보살폈다.
그런 설명이 유진휘의 귓가에 흘러들어왔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검후의 설명에 유진휘가 살짝 이를 악물었다.
유진휘의 사고가 끝없이 쪼개졌다. 체감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났다.
분명 축하해야 할 일이었다. 사제가 일류의 경지에 올랐다. 드디어 고수가 된 것이다.
당연히 같은 일류인 검봉 서문청하와의 비무에서 사제의 승산도 늘어날 것이다.
검후의 대처에도 문제가 없었다. 금기를 범한 건 사실이지만, 검후는 정파 무림의 큰 어른이었으니까. 배분에서나 실력에서나 그 정도 선이 합리적이었다.
오히려 화경의 고수와의 대련이라면 대가로는 과분한 수준이었다. 절대고수의 가르침은 아무에게나 받을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어째서······.’
내가 저 자리에 있었어야 했다. 사제를 이끌어줬어야 했다. 옆에 설 수 있게, 누구에게도 손가락질받지 않게.
누구보다 소중한 사제를, 사형인 내가 지켜야만 했다.
그것이, 천무지체라는 저주에 가까운 재능을 타고난 그녀의 존재 의의였으니까.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검후가, 타인이 대신했다.
‘······전부 내가 부족해서야.’
실력이 부족해서였다. 화경, 나아가 현경······.
더 높은 경지로 오른다면, 타인의 가르침 따위는 필요 없을 터.
‘······더 정진해야 돼.’
검후를, 아니 설령 천하제일요녀 적사월이 그 상대라도.
천하 모두가 적이 되더라도, 사제를 지킬 수 있도록.
이제 사제는 그녀의 전부니까.
더 강해져야 했다.
결심을 다진 유진휘의 체감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유진휘가 사제를 조심스럽게 안아들면서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검후 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제가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전부 이 공자님께서 한 일입니다.”
“밤이 늦었습니다. 사제는 이제 제가 돌볼 테니, 검후 님께서는 걱정하지 말고 처소로 돌아가서 쉬십시오.”
“알겠습니다. 염려 감사합니다. 유 공자도, 서 소저도. 편안한 밤 되시길.”
무표정한 얼굴로 인사를 끝낸 검후는 마지막으로 유진휘의 품에 안겨 사랑스럽게 잠든 상공의 모습을 확인한 뒤 경공을 펼쳐 청운각을 떠났다.
‘어떡해. 유 공자님과 서 소저······. 아니 유 아주버님과 서 아가씨한테 나 잘한 거 맞겠지······?’
사형제는 형제와도 같다.
특히 천애고아인 이철수에게 유진휘와 서하린은 진짜 남매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부인인 그녀 역시 사형인 유진휘를 아주버니로, 사제인 서하린을 아가씨로 모셔야 했다.
현모양처라면 마땅히, 시댁 식구를 잘 모셔야 하는 법이니까.
검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얼굴을 잔뜩 붉혔다.
‘소첩······. 상공의 사형제도 잘 모시는······. 완벽한 부인이 될 거예요.’
현모양처를 위해서.
검후는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접객당을 향해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