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벌써 반하면 곤란한데
일부러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검후의 경지라면 얼마든지 내게 안 들키고 내 수련을 관찰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대체 왜 일부러 들켰을까?
‘역시 시험인가.’
검후 은설란.
전생에 그녀와 직접 대면한 적은 없다.
하지만 강호 무림 견제가 주요 업무인 동창의 특성 때문에 나는 그녀의 내밀한 정보를 전부 외워놓고 있었다.
속마음이야 어쨌건, 검후 은설란은 항산파 장문인이라는 역할에 충실하고 대외적으로 엄격했다.
본인을 쓰러뜨린 사내만을 지아비로 삼겠다는 선언을 전생에서는 끝까지 지키면서 독수공방으로 살았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엄격한 은설란이라면, 나를 시험해보려고 일부러 들켰을 수도 있었다.
무공을 봐준다는 핑계로 내가 그녀의 남편감이 맞는지 사전 대련을 해보려는 의도라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나는 은설란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타인의 수행을 훔쳐보는 건 강호 무림의 엄격한 금기입니다. 검후 선배께서 이러한 금기를 모르시지는 않을 터인데······.”
나는 솟아오른 불기둥을 천천히 가라앉히면서 은설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쨌거나 명분은 내게 있다.
그러니 조금 세게 나가도 괜찮다.
“어째서 금기를 범하셨습니까?”
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자 검후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녀가 가슴 위에 손을 올린 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 공자님. 공동파 본산을 거닐며 산책하다 이 공자님의 모습이 보이자 저도 모르게 끌려서 그만···. 공자님의 용태를 제 두 눈에 담고 말았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검후가 저자세로 내게 사과를 구했다.
“비무를 앞둔 이 공자님께 한 수 검을 가르치는 것으로 저의 잘못을 만회하려 합니다. 괜찮겠습니까?”
그녀가 정중하게 말했다.
예상대로였다.
아무리 무림의 금기를 범했다고 해도, 어쨌거나 상대는 나보다 배분이 한참은 높은 정파 무림의 어른이자 구파일방 항산파의 장문인인 화경의 고수 검후.
그런 그녀가 한참 후배인 내게 저렇게 저자세로 나오는 이상, 내가 여기서 더 강하게 나가면 오히려 무례하다고 욕먹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여기서 적당히 받아줘야 했다.
그런데 왜 저렇게 저자세로 나오는 거지?
“강호에 이름 높은 일대검객인 검후 은 여협의 가르침을 받게 되어 영광입니다.”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검후가 고개를 숙인 뒤,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맑은 검명과 함께 검이 뽑혔다.
항산파가 남해 검각이었던 시절부터 역대 검후에게 대대로 전해지던 신물이자 지금은 항산파의 장문영부인 고월검(孤月劍)의 칼날이 투명한 옥빛을 뿌렸다.
심향검(心響劍)과 함께 검각을 상징하던 양대 신물이었지만, 300년 전 검각 멸문 당시 행방이 묘연해진 심향검과 달리 고월검은 검각이 항산파가 된 지금까지 항산파가 보유하고 있었다.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화려하게 반짝였다.
“그럼 공자께 선공을 양보하겠습니다.”
화경의 고수, 검후에게 가르침을 받을 기회는 드물다.
물론 전생의 경지는 내가 더 높지만, 아무튼 대외적으로는 나는 아직 공동파의 소년 제자였으니 그녀의 가르침에 영광을 느껴야 할 포지션인 것이다.
그리고 전생의 나는 구화음백조라는 조법의 고수였지, 검의 고수는 아니었다.
폼도 안 나는 조법에 극음지기나 긁어모으는 고자 무공 규화보전이라니, 그야말로 게이 중의 게이 무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이번 생애에서는 반드시, 여인에게 인기 많은 검법의 고수가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검법으로도 절대의 경지에 올라야 했는데, 전생에 가보지 않은 길이니만큼 새로운 수행을 쌓는 것이 필요했다.
만류귀종은 만능이 아니다. 내가 조법을 현경까지 마스터했다고 자동으로 검술도 현경까지 마스터가 찍히지 않는다는 소리다.
아무리 현경의 심득이 있다 하더라도, 숙련도가 높지 않은 병장기인 검의 수행과 경지 개척에는 새로운 노력이 필요했다.
뭐, 검에는 익숙하지 않아도 노력에는 익숙했다.
잃어버린 양물을 되찾기 위해, 범재의 근골로 현경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영약도 영약이지만 범인의 수준을 뛰어넘는 노력이 필요했으니까.
검을 잡았다.
그동안 강호 인기 절정 아이돌, 만인의 여심을 훔치는 검섹남이 되기 위해 쉴 틈 없이 검법을 수행했던 탓일까, 유난히 손잡이의 그립감이 착하고 감겨드는 느낌이 들었다.
‘좋아.’
혼원공의 실전 테스트도 겸하면 되겠군.
검후 정도면 지금의 내 전력을 사용해도 끄떡없는, 좋은 대련 상대다.
조용히 소양심법과 삼음진결을 동시에 운용했다. 음양이기가 치솟으며 혈도에서 충돌하려던 순간.
유진휘가 개량한 혼원공의 구결을 읊었다. 우웅. 거칠게 날뛰던 음양이기가 충돌 직전 분리되며 음기는 백회혈로 양기는 기해혈로 향했다.
수승화강을 완성한 순간, 폭발적인 정력이 전신에 솟구쳤다. 나는 그대로 검을 들어 검후를 향해 휘둘렀다.
복마검법.
공동파를 대표하는 진산절학, 직선적이며 한 방 한 방이 치명적인 실전적인 투로를 지닌 복마검이 그대로 검후를 덮쳤다.
그 순간.
검후가 검을 들었다.
우웅.
그녀의 고월검에서 맑은 검명이 울렸다.
검후의 은빛 눈동자가 반짝이며 그녀의 검이 내 복마검을 부드럽게 받아쳤다.
쨍!
내가 내지른 강격의 힘이 그대로 칼자루를 타고 찌르르 올라왔다.
‘월향귀로검(月鄕歸路劍)이로군.’
월향귀로검.
공동파의 복마검법, 화산파의 이십사수매화검법처럼 항산파를 대표하는 진산절학.
대대로 검후와 그 후계자인 소검후에게만 전승된다는 최상승 무공인 월녀검법(越女劍法)만큼은 아니지만, 복마검법과 동급의 절학인 만큼 그 위력은 상당했다.
남해 검각이 멸문하고 검각의 후예들이 항산에서 항산파를 건립한 이후, 절강성 보타산으로의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그리던 항산파 초대 장문인이 몇 안 남은 검각의 절학을 조합하고 개량해서 만들어낸 상승절학.
항산파의 절학은 강공 일변도인 공동파와는 달리, 방어 후 반격을 기반으로 하는 검법이었다.
“방금의 일검은 좋았습니다. 이 공자. 하지만 아직 조금 미흡한 부분이 있군요.”
검후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면서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윽!’
번쩍.
달빛을 닮은 은빛 검광이 눈앞에 수십 개 펼쳐졌다.
여중제일검객, 검후의 호칭을 받은 화경의 고수라서 그런지, 내가 검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건지, 내공을 나와 같은 수위로 제한한 상태인데도 나는 그녀의 공격을 전부 방어할 수 없었다.
내 무복 위로 검후가 날린 은빛 검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안 그래도 낡은 무복이 너덜너덜해졌다.
옷이 찢어지며 내 탄탄한 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다.
검후가 나를 상처 안 입히려고 일부러 검광의 궤적을 틀어버린 모양.
조법을 사용한다면 지금 검후를 이길 수 있었을······. 아니다. 이제 와서 다시 하남자처럼 할퀼 수는 없지. 암.
조법으로 검후를 이겨봤자 다들 뒤에서 사내답지 않다고, 손톱으로 검후의 무복을 찢어버리다니 역시 여색에 미친 쌍발색검이라고 손가락질이나 할 게 분명했다.
검후는 검으로 꺾어야 했다. 그래야 검후를 내 여자로 만들 수 있다.
쌍발색검이 아닌, 강호 무림의 영웅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영웅호색을 이뤄야 했다.
지금 나를 시험하려는 그녀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나중에 비무에서 설령 이기더라도 검후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그건 색도에 어긋난다.
검후 은설란의 몸이 아닌 마음까지 전부 얻기 위해서라도, 그녀를 내 여자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이 자리에서 검(劍)의 성취를 그녀에게 보여줘야 했다.
검후의 검광이 다시 번쩍였다.
눈앞에 은빛 검광이 어지럽게 피어올랐다.
나는 다시 검을 들면서, 현경에 이른 정신력으로 사고를 쪼갰다. 끝없이 느려 보이는 시간 속에서 나는 끝없이 성찰했다.
복마검법은 정말 강검인가, 방어를 도외시한 자살 절학인가?
‘아니야.’
감숙은 중원의 변방, 공동산은 고대에는 서융(西戎)으로부터, 명나라 시대 이후부터는 마교의 외침으로부터 중원을 방어하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연히 고대부터 수없이 많은 전란을 겪은 공동산의 무학은 실전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실전적인 기풍은 공동산의 모든 유파를 통합해서 건립된 공동파의 무학에도 계승되어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실전적이라는 말이 단순히 공격만 실전적이라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방어도 마찬가지다.
공동파의 기초공에서는 양을 상징하는 칠살검이 공격을, 음을 상징하는 현천검이 방어를 담당한다.
그리고 상승무공이자 칠살검과 현천검의 발전형인 복마검법은 음양전도를 상징하는 절학. 음양전도는 수승화강을 이루는 수단. 수승화강이 지향하는 건 궁극의 정력, 아니 순극생기이다.
그런데 음과 양이 역전되었다고 음양의 조화도 역전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아니다.
애초에 음양의 조화가 깨진다면, 음양이기가 체내에서 부딪히는 것처럼 주화입마가 올 수밖에 없다.
공동파의 무학은 역혈을 추구하지만, 역천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것이 마교와 공동파의 차이점이다.
그러니 음양전도는 음양의 부조화가 아닌 조화를 추구하는 방법이다. 자연을 뜻하는 대우주가 아닌 인체를 뜻하는 소우주의 조화 말이다.
“흐흐흐.”
공동파 무학에 대한 조그마한 심득을 얻은 나는 웃었다.
태극을 지향하는 무당파와 마찬가지로 공동파의 역태극 또한 음양의 조화, 나아가 혼원으로 향하는 다른 방법일 뿐이다.
단지 대우주를 향하는 것이냐, 소우주를 향하는 것이냐의 차이일 뿐이다.
당연히 대우주 따위를 다루는 무당파의 무공은 나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딴 걸 탐구해봤자 정력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까. 무당파는 게다가 제자들 결혼도 못 하게 하는 소림사에 버금가는 끔찍한 문파다.
하지만 소우주, 인체를 다루는 공동파의 무공은 남자에게 아주 좋았다. 무궁무진한 효용이 있었다. 소우주를 다루는 공동파 무학의 궁극에 이르면 칠주야에 걸쳐 삼처사첩을 상대해도 쓰러지지 않는 절대 정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복마검법은 공격에만 치중한 절학이 아닌, 음과 양이 조화된 공방일체의 묘리와 절대 정력의 정신이 깃든 검법인 것이다.
마치 운우지락에서 공격만이 아닌 방어도 중요한 이치와도 같았다.
심득을 얻은 순간.
시간 감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
혼원공의 경로대로 내력이 폭발적으로 피어올랐다. 나는 그대로 역라순혈공을 운용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빠르게 내공이 전신을 돌면서 폭발적으로 증폭되었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다.
보이지 않던 월향귀로검의 검광 사이로 미세한 빈틈이 보였다.
여기라면······.
할 수 있다.
나는 그대로 복마검법의 최후절초인 위타복마를 사용했다.
우웅. 음양이기가 몸에서 순환하며 폭발적인 내력 상승을 부른다. 검명이 울렸다. 검이 팔다리를 넘어 내 거대하고 꼿꼿이 선 양물처럼 몸의 소중한 일부로 느껴진 순간.
칼날 끝에서 희미한 검은색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검기(劍氣)였다.
마침내 내 목표였던, 서문청하를 상대로 승리를 장담 가능한 일류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나는 그대로 검기를 월향귀로검의 빈틈 사이로 쏘아냈다.
번쩍!
검은 섬광과 함께 월향귀로검의 검광을 전부 튕겨낸 검은 검기가 실린 철검이 그대로 검후의 풍만한 가슴을 향했다.
마침내 드러난 검후의 얼굴. 20대 중반처럼 보이는 아름다운 미모를 보면서 나는 웃었다.
그래.
이거지.
이 정도면 호감 좀 땄겠지? 역시 게이 같은 조법 대신 여심을 흔드는 멋진 검법을 배우길 잘했다.
공방일체의 일검을 본 검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검후의 검이 천천히, 하지만 내 검기로 상대 불가능한 궤적으로 움직였다. 그녀의 검에서 은빛 검기가 피어올랐다.
검후를 상징하는 최상승 절학인 월녀검이었다.
채챙!
그녀의 월녀검이 내 위타복마를 막아냈다. 그와 함께 강력한 반탄력이 칼날을 타고 내게 전해졌다.
검기가 꺼졌다.
힘을 잃은 나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오랜만에 현경의 정신력을 사용한 데다, 일류의 경지에 도달한 탈력감에 처음으로 검기를 발현한 반동까지 겹쳐서 그런지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나는 그 상황에서도, 그녀를 바라보면서 미리 마음속으로 연습해뒀던 멋진 대사를 말했다.
“공동의 검이······. 어떠······. 냐······. 검후 은설란······. 미래에는 당신을 반드시······. 내 여자로······.”
말을 더하지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지만, 상관없었다.
이 정도면 시험은 통과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이거 내 멋진 모습에 벌써 반하면 곤란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