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나의 황상
관무불가침.
대명제국의 태조가 직접 세운 묵계였지만, 표면상으로만 지켜질 뿐 황실과 강호 무림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알력이 존재했다.
황궁무고에 구파일방 육대세가 사도팔문의 진산절학이 보관되어 있으며, 황실에서 주요 문파 무공의 파훼법을 보유하고 있는 건 강호 무림에 우위를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관무불가침의 묵계 때문에 황실이 강호에 공개적인 개입을 하는 건 저어되었다.
그래서 동창이 있었다.
강호 무림에 관한 각종 공작과 견제는 동창이 맡고 있었다. 대명제국의 황제는 대대로 동창을 이용해서 강호 무림의 힘이 황실을 넘어서거나, 무림이 황실을 거스르지 않도록 각종 정보 공작을 통해 제어했다.
어디까지나 강호 무림이 천하 질서 유지에 유용한 도구일 수 있게 말이다.
“동창 첩보망을 은밀히 움직여 강호에 소문을 퍼뜨리거라.”
9세라고는 믿을 수 없는, 마치 수라도를 그대로 담은 듯한 주가율의 눈동자를 보며 우첩형은 벌벌 떨었다.
그의 귓가에 주가율의 지시가 꽂혔다.
“······염희 능월향은 공동괴협 이철수를 일방적으로 사모해서 통정하고 싶어서 가가라고 부르는 것일 뿐이며, 공동괴협과 염희가 통정한다는 말은 염희 능월향의 짝사랑 때문에 만들어진 거짓 소문이라고 말이다. 개방이 한 것처럼 꾸미면 되겠군.”
적사월이 저지른 짓을 수습할 의무가 그녀에게는 있었다.
주가율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 노야의 정실부인으로서, 집안 단속은 그녀의 의무이기도 했으니까.
이 노야의 딸로서,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이 노야의 정인으로서, 사랑하는 사람의 바람을 이루어주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이 노야의 동생으로서, 오라버니를 도와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이 노야의 제자로서, 스승을 위해 일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구주팔황에서 그녀에게 의미 있는 존재는 오직 이 노야 한 명뿐이었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왜냐는 의문은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주가율은 이미 절대복종의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우첩형의 부복을 보면서 주가율은 눈을 살짝 감았다.
두근, 두근.
그녀의 심장이 뛰었다.
‘후후. 이제 노야께서 짐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겠지.’
노야의 영민한 머리라면 범인과 다르게 소문이 바뀌는 즉시 동창이 정보 공작에 개입했고 일 처리가 그녀 본인의 방식과 닮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터.
그렇다면 어렵지 않게 그녀 또한 회귀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노야께서, 드디어.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린다
이건 그녀가 노야에게 보내는 고백이었다.
아주 뜨거운 사랑 고백.
그 사실만으로 주가율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심장이 뛰었다. 온몸이 환희에 젖었다.
‘아아, 노야. 조금만 기다리세요. 짐이 금방 가겠습니다.’
주가율의 입가에 따뜻한 미소가 걸렸다.
*
화정현. 곤화루 2층 특실.
소문 내용이 바뀌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사월의 적안이 흔들렸다.
“뭐라고? 대체 어떤 놈들이냐?!”
이철수.
이대로만 잘 간다면 정파의 동량지재인 그를 그녀의 치마폭에 가둘 수 있는 계획이었다.
소문이 퍼지는 지난 이틀 동안 적사월의 기분은 극락을 거니는 것과도 같았다.
이대로라면 가가의 진짜 정인이 될 수 있다.
‘가가께서도 본녀를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으니까. 후후후.’
싫어하셨다면 향매라고 다정하게 불러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줬을 리도 없다.
물론 그렇다고 진짜 천하제일미 적사월의 마음을 내줄 수는 없었다.
‘그, 그럴 수는 없지! 보, 본녀는 천하제일미니까······. 느, 능월향이라면 모를까······.’
적사월은 그렇게 합리화했지만, 머리와는 달리 이철수를 생각하기만 해도 뛰는 심장은 제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변명했다.
능월향으로서 정인인 거지, 적사월의 진짜 마음을 준 건 아니라고 말이다.
어디까지나 능월향의 정인인 것이다.
‘후후. 가가가 본녀의 정인이 된다면, 이, 일단 손부터 잡아야 할까······? 햐, 향매라고 계속 불러달라고 할까? 혹시 하, 합방을 가가께서 원하면 어쩌지······.’
적사월의 상상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가가에게 향매라고 불리는 본인의 모습. 가가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감촉. 가가와 닿았던 살결.
게다가 가가는 한창 욕망이 들끓는 소년의 나이. 합방을 요구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된다면······.
향초에 불 붙은 방 안, 푹신한 금침 위로 겹쳐지는 두 사람의 몸.적사월의 머릿속에 망측한 상상이 이어졌다.
‘아, 아니야! 그, 그럴 수는 없어! 모, 몸까지 내줄 수는 없느니라! 흥. 아, 아무리 가가라지만 가가는 아, 아직은 어린 소년이니까······.’
그렇게 기분 좋은 상상을 이틀 동안 이어가면서, 가가와 정인이 되면 뭘 할지 생각만 해도 행복하던 적사월이었다.
그런데 지금 찬물이 끼얹어진 것이다.
“어떤 놈들이냐?”
적사월의 적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몸에서 끈적하고 퇴폐적인 기세가 피어오르며 달콤한 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녀의 기세는 여타 다른 고수처럼 패도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부드러움 속에 적을 옭아매는 치명적인 칼날이 숨겨져 있었다.
적사월에게 보고하는 백면암군 매지량의 하얀 가면 안에서 한 줄기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추적 도중 개방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놈들의 소행인 듯합니다. 하지만 목적까지는 모르겠습니다.”
“개방······. 이 빌어먹을 거지 새끼들이 감히······. 본녀의 대계(大計)를 방해하다니!!”
백면암군의 보고를 들은 적사월의 적안에 노기가 타올랐다.
개방이 대체 왜 개입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거지 새끼들이 감히, 가가와 정인이 되려는 대계를 방해했다.
그 사실만으로 적사월은 분노를 느꼈다.
게다가 소문의 내용도 참을 수 없었다.
‘하, 이 천하제일미인 본녀가 가가를 짝사랑한다고? 나 혼자 일방적으로 사랑해서, 가가와 통정하고 싶어서 헛소문을 퍼뜨린 거라고?’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었다.
짝사랑이라니!
세상 모든 사내를 반하게 만드는 천하제일미, 아니 고금제일미인 그녀였다.
누군가를 짝사랑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방적인 사랑은 더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가가가 이쪽에 매달리게 만들 것이다.
통정하고 싶다는 말도 헛소리였다. 어디까지나 정파의 후기지수를 사파의 품에 넣어 타락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그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건, 가가가 그녀의 목전에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조금만 뻗으면, 가가를 치마폭으로 감쌀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밖에 모르는 몸으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흐트러졌다.
그 거지 새끼들 때문에.
뿌드득.
적사월이 이를 갈았다.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
결과적으로 말해서 작전명 서동요는 성공했다.
그러니까, 내 의도와는 다르게 삼국유사 서동요 이야기와 비슷하게 성공했다는 뜻이다.
백제 무왕이 선화공주와 밤마다 잔다는 루머를 퍼뜨려 선화공주와 결혼에 골인한 것처럼, 내가 퍼뜨린 소문 역시 진화해서 서문청하와 내가 연인이라는 소문까지 퍼진 것이다.
현대식으로 하자면 열애설이 터진 것과도 같다.
덕분에 나는 사부 전영과 독대해서 소문에 대해 해명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서문청하와 제가 통정한다는 소문은 헛소문입니다. 능월향과의 통정은······. 일전의 정사지쟁 때 서문세가의 눈을 피해 서신을 보내기 위해 불가피하게 하오문을 이용한 적 있었는데, 그들이 이번 정사지쟁의 패배에 앙심을 품고 저를 음해하기 위해 퍼뜨린 것 같습니다.”
“그 서신을 하오문을 통해 보냈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역시 사마외도의 무리와는 상종할 수가 없구나. 앞으로 되도록 사마외도의 무리와 엮이지 말거라.”
다행히 전영은 엄하기는 하지만, 꽉 막히지는 않았기 때문에 내 해명을 전적으로 신뢰해서 그냥 넘어갔다.
예상대로였다.
이상한 점은 능월향과 내가 연인이라는 소문도 함께 퍼졌다가, 갑자기 소문의 내용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능월향과 내가 연인이 아니라, 능월향이 나를 일방적으로 짝사랑해서 루머를 퍼뜨렸다는 내용이었다.
‘누구지?’
소문 내용이 바뀌는 걸 체크한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적사월이 나와의 열애설을 퍼뜨릴 거라는 사실 정도는 예측한 지 오래였다.
내게 집착하는 그녀가 그런 루머를 안 퍼뜨리는 게 더 이상했다.
문제는 이 소문의 내용을 누군가 바꿨다는 거였다.
하오문은 개방과 함께 강호 무림의 양대 정보 문파.
하오문의 소문을 바꿔놓을 수 있는 문파는 같은 양대 정보 문파인 개방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개방과 아무런 연이 없었다. 개방도 거지 같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문파라는 이름의 이익 집단. 개방이 나를 위해 이런 자원봉사를 할 확률은 없었다.
차라리 서문세가의 편을 들었으면 들었지, 공동파의 편을 들 놈들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서문세가도 마찬가지였다. 놈들에게 있어서 나는 적이다. 적의 추문은 놔두는 게 이득이다. 굳이 돈을 들여 치워주는 건 미친 짓이다.
그러니 개방이 이 짓을 했을 확률은 없다.
개방이 아니면서 이토록 신속하게 하오문의 소문을 바꿔놓을 수 있는 기관은 단 한 군데밖에 없었다.
‘동창이라고?’
동창.
전생에 내가 몸담았던 조직이자 대명제국 황제 직속 정보기관.
동창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대관절 동창 그 고자 내시 변태 놈들이 왜 일면식도 없는 나를 위해 움직여준다는 말인가?
너무 뜬금포다.
물론 명분은 충분히 있다. 동창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강호 무림의 감시와 견제, 이간질 등 각종 공작. 하오문이 최근 너무 나댄다 싶어서 밟아주기 위해 이런 작전을 실행했을 가능성은 있었다.
하지만 너무 타이밍이 공교로웠다. 하필 나를? 도와준다고?
우연치고는 너무 운이 좋다. 내 인생에 이렇게 운이 좋은 적은 없었다.
그러니 의심한다.
동창을 움직일 만한 실세가 나와 안면이 없다면 불가능······.
잠깐, 날 위해 이런 일을 멋대로 저지르는 사람이 딱 한 명 있긴 하다.
나의 황상.
그녀라면 내 소문을 들은 즉시 저렇게 반응했을 것이다.
실제로 일처리도 황상의 일처리와 닮아 있었다. 나 몰래 내 정적들을 숙청하고 내 칭찬을 바라던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황상은 미래에 남겨두고 왔는······.
‘설마······.’
섬뜩한 가정이 떠올랐다.
환생 대법.
나는 그 대법에 실패해서 회귀했다.
하지만 내가 환생 대법을 위해 모은 자료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당연히 황상이 손에 넣기도 쉬웠을 터.
게다가 그녀는 내가 환생 대법을 행한다고 하자, 울며 기절할 정도로 나를 말렸다.
운우지락이 그렇게 좋냐는 망언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녀가 환생 대법을 실행해서 나처럼 회귀했다면?
그래서 동창을 장악하고 소문을 들은 뒤에 소문을 바꾸라 지시했다면?
그녀라면 분명, 이 정보 공작을 통해 본인의 회귀를 알리려 했을 게 분명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모든 정황이 황상의 회귀를 가리키고 있었다.
‘황상······. 정말 황상입니까?’
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그때.
“사제!”
저 멀리서 유진휘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탁.
그가 몸을 날려 내 앞에 착지하면서,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
“서문세가에서 사제 앞으로 비무첩이 도착했어.”
나는 사형이 건넨 서찰을 복잡한 심정으로 받아들였다.
저쪽이 먼저 보낼 줄은 몰랐는데.
뭐 좋은 게 좋은 거다.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니까 말이다.
이제 남은 건 감숙성 챔피언 벨트를 걸고 서문세가와 한 판 붙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