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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 환관이 남성을 되찾음-68화 (68/171)

68화 책임져

사영회 장원은 엉망진창이었다.

마치 이사 당일처럼 짐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어수선한 분위기.

아, 이사하는 날에는 짜장면이 국룰인데. 중세 무림에는 짜장면이 없어서 문제다.

아무튼 장원에서 나는 전에 회주와 만났던 장원 가장 내밀한 방으로 안내받았다.

거기에는 흑사룡 위소련이 있었다.

검은 단발,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미소녀.

선머슴, 요즘 말로는 보이시한 인상, 톰보이 미소녀가 탁자에 앉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드르륵, 탁.

미닫이문이 닫혔다.

“이철수, 여기에는 무슨 일로 왔지? 약조한 대로 사영회 인원들은 전부 관아에 넘겼다. 지금쯤 합당한 처벌을 받고 있을 거다. 네가 빌린 은자 십오 냥을 걱정하는 거라면, 채무는 자동 소멸되었으니 안심하도록.”

나를 바라본 위소련이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스윽 하고 의자를 당겨 그녀 앞에 마주 앉으면서 말했다.

“손님이 왔는데 차도 안 주나. 대흑룡방의 손님 대접이 이래서야. 쯧쯧. 본 파는 네가 방문했을 때 없는 살림에 다과를 내와서 정성껏 대접했건만.”

내 말을 들은 위소련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점등했다.

“그, 그 끔찍한 걸 지금 대접이라고 말할 셈이냐!”

“서 소저의 다과는 우리 어머님께서 어릴 적 내어주신 다과와 같은, 천상의 맛이었지. 설마, 우리 어머님을 모욕할 셈이냐?”

내 말을 들은 위소련의 뺨이 파르르 떨렸다.

뭐 전생에서나 여기서나 나는 원래 고아라서 부모님 얼굴 따위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때 현경의 경지에 이른 연기력으로 어머니를 언급했던 걸 떠올렸는지 위소련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유교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타인의 부모를 모욕하는 건 현대보다 더 심각한, 최상위급 모욕.

그렇기에 위소련은 지금 아무 말도 할 수 없던 것이다.

“물론 아니다. 크윽······. 차는 내주지.”

위소련이 잠깐 나가서 수하에게 지시하더니, 곧이어 김이 풀풀 올라오는 녹차와 다과가 탁자 위에 올라왔다.

탁.

수하가 문을 닫고 들어왔다.

나는 여유 있게 차를 마시면서 과자를 씹었다.

싸구려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한 차군.

“······그래서, 여기 온 용건이 뭐지?”

“내가 동생이 새로 생겼는데 말이야······.”

와작.

나는 과자를 하나 입 안에 넣으면서 말했다.

“분명 오라버니라고 부르기로 약속했는데······. 그러질 않아서······.”

내가 말끝을 흐리자 흑사룡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응. 왜 그런 걸까? 약속했는데. 설마 천하의 사파제일기재 흑사룡 위소련이 본인 입으로 한 약속을 어기는 건······.”

“······라버니······.”

내 말에 흑사룡이 입술을 우물우물했다.

“잘 안 들리는데.”

“오······. 오라버니······. 라고 했다! 이, 이제 됐나?!”

빨갛게 달아오른 흑사룡이 나를 바라보면서 소리쳤다.

그녀의 뺨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래.

바로 이 광경이다.

아주 만족스럽다.

이제 오빠가 여보 되는 걸 기다리면 된다.

“색마······. 음적······. 쌍발색검! 모, 모두 보는 앞에서······. 아녀자의 속살을 그렇게······! 내, 내가 시집을 못 가면 오, 오라버니가 책임져!!”

위소련이 눈을 질끈 감으면서 소리쳤다.

하긴.

본의는 아니지만 비무 도중 흑사룡의 무복을 찢어 속살을 드러냈으니, 현대 기준이 아닌 이 시대 기준으로 시집 못 갈 일은 맞다.

책임.

책임이라.

“그래. 네가 시집을 못 가면 책임지고 내가 거둬 주지.”

못 질 것도 없지.

흑사룡이 톰보이처럼 하고 다니긴 해도 원판은 미소녀 그 자체다. 미래에 화경의 고수가 되었을 때는 미녀였고.

그러니 그녀 정도면 책임지더라도 상관없다.

“?!”

하지만 내 말을 들은 흑사룡의 얼굴은 훨씬 더 빨개졌다.

그녀가 말을 더듬었다.

“무, 무슨?!”

“네 말대로 나는 외간 여자인 너한테 수치를 줬다. 거기에 대해서 내 책임을 깊이 통감하고 있으니, 책임지고 내가 널 거둬서 외간 여자가 아닌 내 여자로 만들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오라버니라고 불러야지.”

나는 흑사룡 위소련을 바라보면서 똑바로 다시 한번 말했다.

이게 어디서 은근슬쩍 오라버니를 빼먹으려고.

“오······. 라버니는 이미 검후 선배한테 청혼한 것 아니었나?! 그, 그런 주제에 나, 나를 책임지겠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위소련이 횡설수설하며 얼굴을 붉힌 채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물론 검후도 내 부인으로 맞이할 거다. 하지만 사내가 한 명의 처만 맞이하리란 법은 없지 않나? 네게 수치를 준 건 사실이니, 검후 선배와 함께 너 또한 내가 사내답게 당당히 책임지겠다는 건데 대체 무슨 문제지?”

이 시대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는 시대.

삼처사첩이 꿈이 아닌 현실이 된 시대.

그렇다면 나는 삼처사첩을 이루겠다.

회귀 전에 50년, 아니 어쩌면 그 이상 동안 못해본 나였다.

이왕 할 거라면 절세미녀를 삼처사첩, 아니 그 이상.

다다익선(多多益善)!

나만 바라보는 여인들로 하렘과 주지육림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 하지만 오라버니는 정파고 나는 사파인······.”

“그게 무슨 상관이지?”

나는 흑사룡의 말을 끊었다.

“나는 정사를 아우르는 강호 무림 전체의 영웅이 될 것이다. 구주팔황이 전부 인정하는 영웅 말이지. 그렇다면 너와 나를 가로막는 정파와 사파의 장벽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어질 것이다. 흑사룡 위소련. 널 내 여자로 품으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나?”

나는 위소련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뭐 영웅은 진짜 내 목표기도 하다.

영웅이 되어야 호색을 할 수 있으니까.

내 말을 들은 위소련의 얼굴이 이제는 짜면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붉어져 있었다.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어디서 거짓말을······. 그, 그렇게 나를 희롱할 셈이냐?!”

“희롱이 아니야, 진심이다. 흑사룡 위소련. 넌 내가 책임지지. 정사 모두가 인정하는 영웅이 되어서라도.”

“······헛소리하지 말고 나, 나가······!!”

내 말을 들은 위소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가 축객령을 내렸다.

사람의 진심을 이렇게 몰라주다니, 슬픈걸.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잘 됐다.

이제 위소련에게 볼일도 끝났으니, 슬슬 곤화루에 들러 비무 토토 배당금을 수금할 시간이었다.

*

드르륵, 탁.

이철수가 나간 뒤.

홀로 남은 위소련의 가슴은 두근두근거리고 있었다.

“으으······. 빌어먹을 오라버니 놈 같으니라고······!!”

오라버니.

분명 그런 약속을 했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찾아와 그런 요구를 할 거라는 사실도.

흑사룡 위소련의 이름으로 약속한 이상, 그를 오라버니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치욕적이었다.

그래서였다.

책임지라는 말을 꺼낸 건. 오라버니라는 말을 강요받은 그녀의 사소한 복수였다.

비무 도중이라 한들 대낮에 모두가 보는 앞에서 속살을 드러내버린 그녀였다.

아무리 본의가 아니라고 한들, 수치스러운 일이다. 중인들이 필시 뒤에서 그녀더러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다 쑥덕대며 손가락질할 터이다.

어쩌면 시집갈 데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물론 아버지는 소방주인 그녀의 신분 때문에 데릴사위를 들일 생각이겠지만.

‘······어차피 데릴사위라고 해봤자 사내답지 못한 놈들이겠지.’

내키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흑룡방을 이어받기 위해, 거친 사내들 사이에서 사내처럼 사란 흑사룡 위소련이었다.

하지만 그녀 마음 한쪽 구석에서는, 여인답고 싶다는 소망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 남몰래 자수를 놓거나, 화장을 해보기도 했다.

물론 전부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그만뒀지만 말이다.

거친 사파에 몸담은 이상, 흑룡방의 소방주인 이상 사내들에게 얕보이지 않게 행동해야 한다. 그런 가르침이 그녀의 욕망을 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거꾸로 그녀의 잠재적 이상형은 그녀를 여인으로 만들어줄, 그 누구보다 사내다운 사내 대장부였다.

적어도 그런 사내 앞에서는, 그녀도 여인으로 있어도 괜찮을 테니까.

어울리지도 않는 사내 흉내는 그만두고 말이다.

그리고 오늘.

‘······뭐가 정사를 아우르는 영웅이야······. 뭐가······.’

단순히 그를 곤란하게 하기 위해 내뱉은 책임지라는 말.

어차피 그는 정파다. 책임지고 싶어도 책임을 질 수 없다. 하지만 아녀자에게 수치를 준 이상, 책임지지 않을 수도 없다.

그런 모순적이고 진퇴양난인 상황을 제시해서 그를 골탕먹이려 했다.

그뿐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이철수가 진지하게 응했을 때부터.

아니, 그녀의 상상을 뛰어넘어 사파인 그녀를 책임지기 위해 정사를 아우르는 영웅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을 때부터.

위소련은 그녀의 심장이 겉잡을 수 없이 뛰는 걸 느꼈다.

세상 어떤 사내가 여인 한 명을 책임지기 위해 강호의 영웅이 된다 말하겠는가?

하지만 이철수는 했다.

그건 위소련이 무의식적으로 바라왔던 진짜 사내의 모습과도 같았다.

이철수의 앞에서는 소방주가 아닌 한 명의 여인이 되는 기분이었다.

설레면서 생소한 기분. 겉잡을 수 없는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으으······. 빌어먹을!!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홀리면 안 된다. 나는 흑사룡. 사파제일 후기지수다! 위, 위선자 정파 놈들, 특히 쌍발색검과는 결코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수 없는 것이야!”

위소련은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앓는 소리를 냈다.

대체 왜.

그런······. 내가 이런······.

위소련이 입술을 깨물었다.

“······망할 오라버니 같으니.”

어차피 그날의 치욕 때문에 시집가기는 글렀다.

위소련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몸을 떨었다.

*

옛 사영회 장원을 나온 이철수는 콧노래를 부르며 화정현 유흥가로 향했다.

대낮이라 그런지 불이 꺼진 주루들을 지난 이철수가 이제는 그에게 익숙한 곤화루 앞에 도착했다.

이철수가 품 안에 있는 목패를 어루만지며 웃었다.

수금할 생각에 신이 절로 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철수가 곤화루의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같은 시각.

곤화루 2층 특실.

특실 너머에 숨겨진 밀실에 적사월은 사천제일미녀 능월향의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가 곤화루로 향한다는 정보는 이미 진작에 들은 뒤였다.

‘흥. 오늘이야말로 그 나쁜 놈의 마음을 내 홀릴 것이야.’

적사월이 동경을 바라보며 옷맵시를 다듬고 머리와 얼굴을 단장했다.

그를 유혹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아름답게 해야 했다.

천하제일미인 본 얼굴에는 조금 못 미치지만, 그래도 능월향의 얼굴 역시 천하에 손꼽히는 미녀.

저번과는 달리 적사월은 꼼꼼히 구석구석 신경 써서 단장했다.

극성의 섭심유혼기를 버텨낸 상대였다.

단장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래. 이 정도라면 그 건방진 아해도 본녀의 매력에 홀딱 빠져 헤어 나올 수 없을 것이야. 다른 사내들처럼.’

이번에야말로 적사월은 이철수의 마음을 사로잡을 생각이었다.

그에게는 언제나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다.

그런 마음을 적사월은 애써 부정했다.

적사월의 기감에 이철수가 곤화루 내로 들어오는 기척이 감지되었다.

두근.

그녀의 심장이 뛰었다.

두근, 두근.

그녀의 얼굴이 붉어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가 왔다. 감히······. 천하제일미를 거부한 그가.

적사월이 황급히 면사를 썼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에게만은 얼굴이 붉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쁜 새끼······. 날 두고······.’

적사월이 입술을 깨물면서 기관 장치를 작동시키자, 벽면이 열리며 특실이 드러났다.

사뿐.

그녀가 발걸음을 옮겨 의자에 앉았다.

드르륵.

기관 장치가 작동하며 벽면이 닫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닫이문이 열리며 그가 나타났다.

이철수.

열네 살 소년의 모습을 본 순간.

두근, 두근. 두근두근. 두근두근두근.

60세 천하제일미인, 적사월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면서, 지금까지 이철수를 유혹하리라 다짐했던 그녀의 모든 각오가 연심의 파도에 휩싸여 사상누각처럼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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