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상공(相公)
공동파가 이 대 삼의 후기지수 비무에서 4전 3승 1패로 흑룡방을 꺾었다!
강호 무림을 한바탕 뒤집는 일대사건의 발생에 천하가 들썩였다.
정파 무림은 서문세가를 제외하고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공동파의 승리를 기대한 사람은 정파 무림에서는 아무도 없었다.
거대 사파 흑룡방과 몰락한 정파 공동파. 누가 봐도 흑룡방의 승리가 명약관화했다. 공동파의 승률은 일 푼, 아니 일 리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이 세간의 평이었다.
그런데도 하오문의 수작으로 이번 비무가 정사지쟁으로 격상됐으니, 무림맹과 구파일방 육대세가는 이번 비무 패배 여파를 어떻게 최소화할지만 골몰하고 있던 판국이었다.
하지만 공동파는 보란 듯이 모든 예측을 뒤엎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있을 수 없는 기적 같은 승리.
그야말로 명문 공동파의 부활이나 다름없었다.
“이번 정사지쟁에서 공동파가 승리했다고 하네.”
“어허, 이 사람. 거짓말하지 말게. 공동파의 승리라니. 지금 농담하는 건가?”
“예끼, 내가 방금 개방 이결제자한테 어렵게 듣고 온 정보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그 과정에서 당연히 승리를 이끈 주역인 이철수와 유진휘의 이름도 널리 퍼졌다.
공동에 두 명의 협객이 있으니 한 명은 그 신위가 천하를 떨어 울린다 하여 신협이요, 다른 한 명은 괴상망측한 수법으로 협을 달성한다하여 괴협이라.
공동쌍협.
공동괴협 이철수와 공동신협 유진휘를 합쳐 부르는 별호였다.
반면에 서문세가는 이겼는데도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분위기였다.
공동파의 승리를 예측한 진천검왕도 막상 공동파의 승리를 마주하자 헛바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무어라?! 이철수와 비무를 약조하였다고?!”
“네, 아, 아버님.”
더욱이 진천검왕이 아끼는 딸인 서문청하가 이철수와 비무를 약조했다는 사실을 바른대로 고해바친 지금의 서문세가는 그야말로 살얼음판을 걷는 분위기와도 같았다.
철부지 딸의 사고에 진천검왕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던 이철수.
그가 흑룡방에서 2승을 따왔을 때 진천검왕은 놀랐다.
유진휘 혼자만이 인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이철수와의 비무 약속이라니.
‘빌어먹을, 내 가문의 선조들을 무슨 낯으로 본다는 말인가?!’
서문세가의 고통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
반면에 공동파와 은원을 맺은 또다른 문파인 항산파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검후 은설란.
투명한 은빛 머리카락과 신비로운 은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하얀 피부의 절세미녀.
아직 화정현에 머무르는 중인 그녀의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아, 이 공자님······. 멋지셨지······.’
두근, 두근.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이철수의 생각밖에 없었다.
화경의 경지에 이른 오성으로 똑똑히 기억한 이철수의 모습이 검후의 머릿속에서 계속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천하가 보는 앞에서 그녀에게 청혼하는 이 공자님.
자격을 증명하겠다며 흑룡방의 후기지수 둘을 쓰러뜨리고 공동파에 복마가 돌아왔음을 선포하는 이 공자님.
그리고 마지막에 흑사룡의 소매를 찢어내는 이 공자님의 모습과, 그의 거대한 대물까지.
절세미남 유진휘에 비하면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녀의 시야에 비친 이 공자님은 충분한 미남이었다.
검후의 심장이 위험할 정도로 계속 뛰고 있었다.
한 번 피어오르기 시작한 감정은 겉잡을 수 없이 그녀의 마음속에 번져가고 있었다.
‘꺄, 어떡해. 이 공자님. 그 정도면 검도 잘 쓰시고, 또 기개도 헌앙하고 용모도 준수하고······. 그, 그런데 정을 통하고 나면 뭐라고 불러야 하지. 역시 가가······. 아, 아니야. 내 나이에 가가는······. 그럼 사, 상공······?’
상공.
그렇게 속으로 이철수를 부른 검후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사, 상공······. 상공······.’
세간에 늘 당당하고 차가운 무표정을 지닌 냉미녀로 유명한 검후 은설란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소, 소첩은 기다릴게요······. 사, 상공이 성년이 되는 그날까지······. 아니, 아니야. 역시 조만간 상공의 검을 직접 지도해줘야겠어. 내조는 부인의 일이니까······.’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상공께서 성년이 되어 그녀를 이길 수 있도록 지도해야 했다.
후우, 후우.
심호흡으로 심장과 감정을 가라앉힌 검후가 제자를 불렀다.
“소빈아.”
“네, 사부님!”
“······공동파와의 교류 경연(競演)을 준비하거라.”
사부의 말에 천소빈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후후. 알겠어요! 역시 사부님도 공동파 놈들의 기를 눌러줘야 한다고 생각하신 거군요!”
그녀의 얼굴에 검후의 붉어진 얼굴은 수치심과 분노로밖에 안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미 견원지간인 공동파와 항산파였다. 거기에 이철수는 배분이 사부 뻘인 검후를 대놓고 모욕하지 않았는가? 사부님의 하해와 같은 자비가 없었더라면 이철수는 그날 두 발로 걷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공동파가 하필 승리해버렸다. 기를 눌러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검후는 제자의 착각을 정정할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아직은 항산파의 장문인이자 검후의 신분.
대외적으로는 세간이 원하는 검후의 모습을 연기해야 했다. 사문을 위해서라도.
아마 상공의 앞에서도 본심과는 달리 차가운 냉미녀를 연기해야 할 테지.
현실을 깨달은 검후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죄송해요. 상공······.’
그녀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소첩의 죄는 나중에 상공과 백년가약을 맺은 뒤에 갚을게요.’
마음만큼은, 아니 이미 본인을 이철수의 약혼녀라 생각하고 있는 검후였다.
*
하남성.
하남성에 있는 거대 문파는 둘이었다.
개봉의 개방과 숭산의 소림사.
하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 실질적인 하남성의 패자는 단연 소림사였다.
강호 무림의 태산북두, 천하공부출소림. 북숭소림 남존무당!
우내삼존의 일좌를 차지하는 정파제일인 신승 원극대사가 머무르는 소림사가 현 정파제일문파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무림인은 아무도 없었다.
숭산 소림사.
고루거각이 즐비한, 향냄새가 배인 소림사 건물의 뒤쪽에는 달마동이 있었다.
소림사의 개파조사인 달마대사가 9년간 면벽수행을 한, 소림사의 성지이자 강호 무림의 성지인 이곳에는 한 명의 동자승이 가부좌를 틀고 참선하고 있었다.
고수는커녕, 범인(凡人)보다 기도도 약하고 체구도 왜소해 보이는 겉보기에는 십 대 소년처럼 보이는 이 승려가 바로 정파제일인 신승 원극대사.
그 무위가 현경에 닿은 절대고수이자, 오십 년 전 오대산에서 전전대 천마를 처단하고 마교의 군세를 막아내서 정마대전을 정파의 승리로 끝낸 정파 무림의 영웅이었다.
범인처럼 보이는 그의 기도는 반박귀진의 경지에 올랐다는 반증이었다.
올해로 100세의 나이에 도달한 신승이 염불을 읊고 있던 그때.
“사조님! 사조님!”
머리를 파르라니 깎고 계인을 박은 승려 한 명이 헐레벌떡 신승을 불렀다.
“무슨 일이냐?”
신승의 눈이 떠졌다.
그의 현기 가득한 눈동자가 소림승을 향했다.
“이번 정사지쟁에서 공동파가 승리했다고 합니다!”
공동파의 승리.
그 소식을 들은 신승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아미타불. 공동파의 승리라니 사필귀정(事必歸正)이로다.”
오십 년 전 정마대전에서 공동파를 지키지 못했다.
공동파의 비급도, 제자도, 어느 하나도 전부 지켜내지 못했다.
그 사실은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신승의 마음속에 빚이자 번뇌로 남아 있었다.
세간에서는 전전대 천마를 처단한 그를 영웅으로 떠받들지만, 신승은 그런 허명에 연연하지 않았다.
공동파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공동파에 도움을 주고 싶어도, 한때 구대문파였던 명문의 자존심 때문에 전대 장문인이 지원을 거부했기도 했고 강호 무림의 알력에 휩쓸려 그럴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공동파가 흑룡방을 이긴 것이다. 이는 공동파 부활의 신호탄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공동이 스스로 일어섰구나. 아미타불.”
신승은 크나큰 수치를 느끼면서 염주를 손으로 굴렸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공동에 복마가 돌아왔다고 합니다!”
복마가 돌아왔다.
그 말을 들은 신승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렇구나. 드디어······. 약조대로 혼원을 돌려줄 때가 된 모양이구나. 공동파에 다음 용봉지회의 초대장을 보내라.”
신승의 말을 들은 소림승이 반장의 예를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다음 용봉지회는 소림에서 열린다.
그때가 공동파에 혼원을 돌려주고, 공동파의 부활을 선포하기에 적기일 터지.
신승은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
반면에 사파는 그야말로 초상집 그 자체였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사영회 장원. 흑룡방의 임시 거처.
털썩.
그곳에서 소방주 위소련이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본 흑룡방주 광마도군이 한숨을 쉬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대패입니다. 저한테 벌을······.”
“······되었다.”
광마도군이 손을 내저었다.
유진휘의 무위는 그도 본 바 있었다.
그건 후기지수가 아니었다. 잠룡, 아니 이미 승천한 용이나 다름없었다. 불합리의 화신.
“······천무지체를 상대로 어떻게 이기겠느냐.”
천무지체의 소유자이자 미래의 천하제일인이었다.
위소련도 일대기재기는 하지만, 하늘이 내린 천재 앞에서는 범인, 아니 둔재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위소련이 입술을 깨물었다.
치욕적이었다. 출수조차 하지 못했다. 위소련의 머릿속에는 아직 그날의 악몽이 생생했다. 기세만으로 공간을 장악해서 모든 투로를 봉쇄하던 끔찍함. 변변한 초식도 전조도 기수식도 없이 빈틈을 찔러오던 검세.
그리고 초점 없는 이질적인 눈동자까지.
그건 악몽이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다.
이철수도 마찬가지였다.
내심 얕본 그의 검은 날카로웠다. 마지막 일격은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다.
‘내 오늘의 패배를 잊지 않겠다.’
위소련은 그날의 패배를 복기하면서 이를 악물었다.
“나는 이만 돌아가겠다. 너는 일을 마무리한 뒤에 공동파에 일처리를 통보하고 뒤따라 내려오너라. 너에 대한 징계는 한 달 근신으로 하겠다.”
“존명!”
위소련은 머리를 쿵하고 박았다.
그 모습을 본 광마도군은 한숨을 내쉬면서 방을 나섰다.
홀로 남은 위소련이 입술을 깨물었다.
‘오라버니라니, 빌어먹을······!’
뒤늦게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날의 빌어먹을 약속이.
*
그렇게 위소련이 손을 부르르 떨고 있던 그 시각.
화정현 곤화루 특실.
일반인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여기에는 그녀가 있었다.
사파제일인 염왕 적사월.
인세의 섭리를 초월한 미모를 보유한 절세미녀가 그림처럼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적사월의 뒤에는 하얀 가면을 쓴 무인인 백면암군과 귀제갈 사마학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천하에서 그녀의 다른 신분을 아는 둘뿐인 심복이었다.
“······흑룡방이 졌다고?”
“그렇습니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습니다. 이철수가 두 번의 승리를 가져간 건 물론, 유진휘는 아예 흑사룡을 압도했습니다.”“공동파 장문제자 유진휘는 천무지체의 소유자로 추정됩니다.”
두 사람의 보고를 들은 적사월의 마음은 복잡했다.
사도련주로서 이번 패배는 사파 전체의 체면에 심각한 손상을 가져온 뼈아픈 패배였다.
흑룡방은 사도팔문의 일좌를 차지하는 거대 문파. 반면에 공동파는 과거의 영광만 남은 몰락한 문파.
질 수 없는 싸움에서 패배했다.
분해야 했다. 하지만 왠지 그렇지 않았다.
이철수가 2승을 가져갔다. 그 사실만으로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적사월이 입술을 깨물었다.
‘내, 내가 왜 그 빌어먹을 나쁜 놈한테 그렇게······.’
사파의 패배인데 대체 왜.
이철수의 환영을 흩어버리면서 적사월이 말했다.
“······천무지체라.”
자연스럽게 색기가 묻어나는 적사월의 말에 귀제갈이 움찔했다.
천무지체.
반드시 천하제일인이 된다는, 인간을 초월한 근골의 소유자. 유진휘가 천무지체라면 패배도 당연했다.
이철수가 2승을 가져가지 않았더라도, 흑룡방은 패배했을 것이다.
“······유진휘가 천무지체라면 무조건 패할 수밖에 없었겠지. 광마도군 아해를 잘 위로해주거라.”
“예. 알겠습니다.”
백면암군이 고개를 조아린 그때.
“다른 특이사항은 없느냐?”
적사월의 질문이 두 사람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그 말을 들은 백면암군이 머뭇거린 그때.
“이번 비무에서······. 이철수가 검후한테 결혼 비무 도전을 천명했습니다.”
귀제갈이 눈치 없이 적사월에게 특이사항을 보고했다.
그 말을 들은 백면암군의 눈이 질끈 감겼다.
“결혼······. 비무라고······?”
파스스.
적사월의 손에 들려 있던 고급 찻잔이 가루로 바스러져 흩날렸다.
그녀의 적안이 떨렸다. 안색이 하얗게 굳었다.
누구한테 뭘 신청했다고?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적사월의 머리가 혼란에 빠졌다. 그녀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검후한테······. 그놈이 결혼 비무를······? 그, 그 말이 정녕 사실이더냐?!”
믿고 싶지 않은 진실.
혼란스러워하는 사부를 보던 백면암군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예, 사실입니다.”
“······이 나쁜 새끼가!!”
백면암군의 확답을 들은 적사월이 소리쳤다.
그녀의 내력이 담긴 외침에 백면암군과 귀제갈의 안색이 굳었다.
각각 화경과 초절정의 고수였지만 현경의 고수가 내지른 일갈에 담긴 내력을 전부 흘려내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적사월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대체 왜······.
내 어디가 모자라서, 내 매력이 뭐가 부족해서······.
천하제일미다. 모든 남자가 품고 싶어 하는 미녀다. 모든 사내가 선망하는 미녀다. 나라를 기울게 할 정도의 절색이다.
수밀도를 닮은 가슴도, 세류요(細柳腰)처럼 가느다란 허리도, 설부화용의 얼굴도 빙기옥골의 자태도 섬섬옥수 같은 손도 전부.
완벽했다.
천하에 그녀를 뛰어넘는 미녀는 없다.
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
침어낙안(浸魚落雁) 폐월수화(閉月羞花)가 가리키는 중원 4대 미녀만이 그녀의 미모와 겨우 견줄 만했다. 아니, 4대 미녀와 조비연까지 중원 역사에 이름을 남긴 전설적인 미녀들과 비교해도 적사월 본인이 미모에서는 우위를 점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건 검후 그년도 마찬가지였다.
정파제일미라고 하지만, 천하제일미인 그녀에 비하면 박색에 불과할 뿐이다.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천하의 모든 미녀를 모아도 적사월의 미모의 발끝조차 따라잡지 못했다.
그런데 대체 왜.
천하제일미인 나를 두고.
그런 빌어먹을 년에게, 자신에게도 하지 않은 공개 고백을 했단 말인가!
화면호검인 나에게는 구름과 비의 즐거움을 논하자고 해 놓고는······. 대체 왜······. 대체 왜!
뿌드득.
이를 갈던 적사월의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완벽한 천하제일미, 어쩌면 고금제일미인인 그녀가 검후 그년보다 부족한 단 한 가지.
그건 바로······.
“······그래, 역시 어린 년이 좋다는 것인가? 이래서 사내들이란······!!”
나이였다.
적사월의 올해 나이 60세, 검후 은설란의 올해 나이 46세.
검후는 적사월보다 무려 14년 연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