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내 여인으로 만들 것입니다
이철수의 선언이 비무대를 쩌렁쩌렁 울린 순간.
죽음 같은 침묵이 맴돌았다.
검후 은설란.
그녀에게 도전한다는 말의 의미가 어떤 건지, 이 자리에 모인 강호인들 중에서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30년 전 용봉지회에서 그녀가 남겼던 말은 그만큼 유명했다.
평소에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전영도, 유진휘도.
관객으로 참가한 서문청하도, 맞수인 흑룡방 방주 광마도군과 소방주 흑사룡도.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개중 가장 충격에 빠진 건, 검후를 우상으로 생각하는 소검후 천소빈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굳었고 뺨은 파르르 떨렸다.
“도전이라고? 지금 저 공동파 제자가 검후님한테 도전한다고 말한 건가?”
“중인환시리에 검후 여협께 도전을 청하다니!”
“믿을 수 없군!”
“이게 몇 년 만이지?”
중인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침묵이 깨어지고 술렁거림이 비무대를 가득 메웠다.
하지만 이철수의 표정은 흔들림 없었다.
그의 눈동자가 검후를 똑바로 향했다.
그의 뜨거운 시선을 받은 검후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도전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지난 10년.
항산파의 장문인과 검후의 이름을 이어받은 이후. 그녀에게 도전하는 사내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이미 그녀가 나이를 먹어서 결혼 적령기가 지난 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녀가 항산파의 장문인이라는 점도 컸다.
구파일방의 장문인이자 경천십칠주의 일좌를 차지하는 검후인 그녀였다. 정치적인 이유에서라도 함부로 도전을 말할 수 없었다. 단순히 개인적인 일이 아닌, 문파와 문파 사이의 쟁투로 확장될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파일방에 속하는 항산파와 도전 신청 같은 사사로운 일로 은원을 맺고 싶어 하는 문파는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거기에서 자유로운 건 문파 없이 무적(無籍)으로 강호를 독보하는 고수였는데, 그중에서 검후를 이길 수 있는 고수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 본인이 화경의 고수라는 점은 덤이었다. 정파 무림에서 그녀와 같은 화경의 고수들은 전부 유부남이거나 종교적으로 금혼(禁婚)을 고수하는 상황이었다.
설령 유부남 고수가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하더라도 후처나 첩실이 아닌 정실의 자리를 보장해야 한다. 하지만 정략결혼을 통한 혼맥 연결로 결혼 자체가 정치적 행위가 된 강호 무림의 상황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10년째 도전자 0명은 그렇게 복합적인 이유로 얽혀서 발생한 것이다.
게다가 이제 그녀를 여인으로 보는 사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모든 상황 때문에 검후 본인이 절벽 위의 꽃을 넘어, 감히 범접해서는 안 되는 천외천의 어른처럼 여겨진 탓이었다.
거기에 이미 강호 모든 여고수의 우상이 원치 않게 되어버린 검후였다. 그런 그녀에게 도전한다면 다른 강호 여인들의 눈총을 한 몸에 받을 터.
46세에 이른, 혼인 적령기가 한참은 지난 나이도 걸림돌이었다. 일찍 혼인해서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 여인의 덕목인 시대였기에 더더욱.
정파 무림의 사내들에게 지금의 검후는 이득은 별로 없고 손해만 큰 악성 재고가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검후 본인은 그 모든 벽을 넘어서 그녀에게 도전할 고수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독신의 지옥에서 그녀를 구원해줄 고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그녀에게 도전장을 던진 소년이 등장했다.
‘아아······.’
두근.
얼어붙은 검후의 심장이 뛰었다.
다른 문파도 아니고 공동파였다.
항산파와는 견원지간인 문파. 그런 공동파의 제자가 다른 자리도 아닌 정사(正邪)가 모두 모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도전을 천명하다니.
이건 강호 무림을 넘어 구주팔황에 본인이 검후인 자신을 색시로 맞이할 것이라고 선언하는 행위와도 같았다.
모든 정치적 난관도, 도전 때문에 발생할 위험도 신경 쓰지 않고 공동파의 소년은 당돌하게 그녀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이 얼마나 사내다운 고백이란 말인가?
지금 이 상황이야말로, 어쩌면 그녀가 바라던 상황일지도 몰랐다.
검후의 손이 떨렸다. 그녀의 환희로 떨렸다.
10년.
무려 10년 만의 도전자였다.
제발 아무나 도전해달라고 그렇게 밤마다 베갯잇을 적시며 빌었다.
검후의 눈빛이 이철수와 마주쳤다.
외모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30년을 홀로 살아오며 이상형의 많은 것을 포기한 그녀였다. 그저 사람 같으면 되었다.
사실 이철수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니 인상은 날카로웠지만, 나름 잘생겨 보이는 것만도 같았다.
그녀가 중요하게 보는 건 용기였다. 그 모든 난관을 타개하고, 스스로의 선언으로 본인을 구속한 철없는 소녀 은설란을 구해줄 용기를 지닌 사내 대장부 말이다.
그의 눈동자에는 젊은 혈기가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30년 전 용봉지회의 그녀처럼.
그녀의 뺨이 달아올랐다. 그녀의 호흡이 가빠지던 그때.
“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아직 비무 결과도 나오지 않았는데 도전, 그것도 감히 공동파의 제자 따위가 사부님한테 도전을 함부로 입에 담다니요! 도전이라는 말의 무게를 알고 하는 말인가요? 사부님은 본 파의 장문인. 사부님에게 도전한다는 건 본 파 전체를 상대하겠다는 말과도 같아요. 정녕 본 파와 은원을 맺겠다는 건가요? 아, 아까 전의 제 무례 때문에 이러는 거라면, 제가 사과할테니 지금이라도 철회하시죠!”
그녀 뒤에 앉아 있던 천소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맞아. 말도 안 되지. 공동파가 한때 구대문파의 일원이었다 하나 이제는 몰락한 문파가 아닌가? 그런 문파에서 도전이라니?”
“검후 님의 배분이 어떤데 감히 도전을 말하다니, 어불성설(語不成說)이 따로 없군!”
천소빈의 말에 동조한 관중들이 술렁거렸다.
그 모습을 본 검후의 가슴이 식었다.
12년 전.
아직 도전자가 1년에 한두명 정도 있던 시절.
그녀에게 도전하려 항산파의 산문을 두드렸던 사내들도 지금 저런 말에 도전을 철회하고 물러갔다.
“사부님은 정파 무림의 큰 어른! 배분을 따지자면 당신한테는 사부 뻘이 되는 분이에요! 그런데도 감히 도전하겠다는 건가요?”
소검후가 벌떡 일어나 씨익씨익대며 이철수를 바라보며 외쳤다.
제자의 말을 들은 검후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럼 그렇지.
저 소년 역시 잠깐의 혈기로 충동적으로 말한 것에 불과할 터.
다른 도전자들처럼 자신의 배분 때문에 주저할 게 분명했다.
사내들은 연하를 선호하니까. 특히 저 나이대의 소년이라면 또래 소녀를 선호하겠지.
이를테면 그녀의 제자인 소검후 천소빈 같은 상대 말이다.
사부 뻘이라는 말에 검후의 가슴에 대못이 박혔다.
사부와 제자 사이는 부모자식의 관계와도 같다. 비록 사승관계는 아니지만, 그녀는 이철수의 어머니 뻘인 것이다. 실제 나이도 그랬고.
만약 그녀가 혼인했더라면 이철수 만한 아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내가 벌써 나이가······.’
직시하고 싶지 않던 현실이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때의 용봉지회에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텐데.
검후의 얼굴이 암운이 드리우던 그때.
그들의 말에 이철수가 웃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천 소저. 검후 님께 도전한다는 건, 곧 그분을 상대로 이겨서 그분의 지아비가 된다는 뜻. 이 결정은 천 소저의 무례 때문이 아닙니다. 그 건과 이 건은 별개입니다. 저는 진지하게 도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철수의 말에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검후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다.
“제 목적은 사문의 재건. 저는 성년이 되어 검후 님과의 비무에서 승리하여 사문의 명예를 되찾고, 나아가 검후 은설란을 내 여인으로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사내와 여인의 만남에 배분과 나이가 뭐가 중하겠습니까? 서로의 마음만 통한다면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습니다. 진정한 사내라면 여인의 전부를 품을 줄 알아야 하는 법. 검후께서도 도전에 나이와 배분을 따지지 않는다 하지 않았습니까?”
이철수의 선언을 들은 소검후의 낯빛이 죽어갔다.
반대로 검후의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나이도 배분도 상관없다.
진정한 사내라면 여인의 전부를 품는다.
무엇보다.
‘내 여, 여인으로 만든다고······.’
그녀의 손이 떨렸다.
이 얼마나 오랜만에 듣는 폭력적인, 날 것 그대로의 고백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눈앞의 소년은 다른 사내들과 달리 현실을 듣고도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강호의 배분, 구파일방 장문인의 신분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오직 그녀를 갖기 위해 도전한다 천명했으니까.
무엇보다 그녀를 여인 취급 하지 않는 천하의 사내들과 달랐다.
저 소년은 자신을 여인으로 보고 있었다.
그 점이 검후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그 과정에서 항산파 전체를 상대해야 한다면, 예, 그리하겠습니다. 오히려 바라는 일입니다. 사문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 정파 무림 전체에서 검후 님의 지아비로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항산파와의 은원을 청산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그러니 저는 제 도전을 철회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 그래도······. 사부님! 사부님께 허락은 맡고 하는 건가요?!”
소검후의 말이 끝난 그때.
검후가 입을 열었다.
“공동파의 제자 이철수······.”
검후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지금까지 검후의 대리자처럼 말하던 소검후마저 입을 닫았다.
심지어 사파 측 관객들마저 시선이 검후에게 향했다.
그녀의 시선이 이철수와 마주했다.
그녀는 이철수의 타오르는 눈빛에서 그녀를 향한 욕망을 읽어냈다.
사내로서 여인을 취하고 싶다는 적나라한 욕망.
그 과정에서 방해하는 모든 것을 치우겠다는 포부.
현실을 신경 쓰지 않는 용기까지.
이제는 다시는 찾지 못하리라 생각한 도전자가 거기 있었다.
거세게 뛰는 심장 소리가 바깥까지 들킬까 두렵다.
검후는 얼굴에 모이는 혈류를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통제하며 간신히 홍조를 막아냈다.
그래. 지금이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적사월 그 요녀처럼 평생 홀로 살다 늙어 죽을지도 모른다.
그런 결말은 싫다.
지금 이 기회를 잡아야 했다.
검후는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본녀는 네 도전을 받아들이겠다.”
검후의 말에 소검후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모두가 술렁였다.
“검후께서 도전을 받아들인다고? 저런 애송이의?”
“검후 님의 자비가 하해와도 같군.”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공동파의 무명소졸 따위, 어차피 검후 님을 이기지 못할 게 뻔해.”
하지만 검후의 귓가에는 주변의 중얼거림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에는 오직 이철수만이 보였다.
그의 얼굴이,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머릿속과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저 사람이다.
앞으로 성년이 되면 도전할 자가.
그녀의 마지막 기회가.
그녀의 지아비가 될 남자가.
‘어쩌지, 말해버렸어. 어쩌지. 뭐부터 해야 하지? 이 공자가 성년이 되어서도 날 못 이기면 어쩌지? 그때까지 검을 지도해줘야 하나? 아니면 일부러 져줘야 하나? 내공을 제한하고 비무하자고 할까?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지지? 이 공자와 저, 정인이 되면 뭐부터 해야 하지······.’
화경의 고수답게 찰나의 시간에도 수없이 많은 심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벌써 성년이 되어 그녀를 이긴 이철수와 정을 통하는 자신의 모습과 아이를 낳고 백년해로하는 모습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이미 손자와 손녀까지 본 그때.
이철수가 포권을 취했다.
“감사합니다. 검후 선배. 그럼 지금부터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이철수가 검을 쥐었다.
스르릉.
칼집에서 뽑힌 그의 철검이 햇빛을 받아 차갑게 빛났다.
“제가 검후 선배의 지아비가 될 자격이 있는 사내라는 사실을. 거기 흑룡방의 제자, 선공을 양보해주지. 덤벼라.”
“흥. 건방지기 짝이 없군. 후회하게 될 거다!”
이철수의 선공 양보 소리를 들은 정지경이 비무대를 박차고 튀어올랐다.
지금 정지경의 심정은 매우 좋지 않았다.
안 그래도 얕잡아보고 있던 공동파였다. 그런데 하라는 비무는 안 하고 검후에게 도전이니 뭐니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늘어놓더니, 이제는 본인을 증명 상대쯤으로 여기고 있지 않은가?
다 망한 문파의 제자 주제에 말이다.
“네 분수를 알게 해주마!”
선공을 양보하다니.
그 선공을 저놈의 무덤으로 만들고, 존경하는 흑사룡의 총애를 얻을 것이다.
정지경은 그렇게 다짐하며 번룡비신(飜龍飛身)의 보신경을 펼쳐 바닥을 박차고 손에 든 박도를 휘둘렀다.
흑룡방이 자랑하는 구절참룡도(九絶斬龍刀)의 패도적인 도광이 번쩍인 순간.
이철수가 미끄러지듯 행운유수의 보법을 밟아 정지경의 공격을 부드럽게 피했다.
‘피했다고?’
일수 만에 놈을 반병신으로 만들 기세로 살벌하게 휘두른 일도였다.
같은 이류라지만 고작 해봤자 이류 초입에 불과한 그의 수준으로는 이류 끝자락에 다다른 그의 전력에 다한 일도를 막는 게 불가능할 터.
그런데 피했다?
정지경이 당황한 순간.
그의 시야에서 이철수가 사라졌다.
행운유수(行雲流水).
공동파의 상승 보신경이다. 공동파가 몰락하기 전에는 복마검수들이 일상처럼 익히고 펼쳤던 경공.
틀에 갇힌 형식을 거부하는 신법, 경공, 그리고 보법.
거기에 전생에 익혔던 동창의 잠행술을 타인에게 드러나지 않는 선에서 섞었다. 이류 끝자락에 닿은 놈의 수준으로는 나를 잡을 수 없다.
“이 자식···?!”
정지경이 당황해 휘두르는 도에서 살벌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도풍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 사이를 은빛 섬광이 관통했다.
“···!”
주르륵.
정지경의 목에 닿은 한 자루 검이 은빛 광채를 흩뿌린다. 정지경의 눈에 들어오는 이철수가 웃고 있다.
동창 비전의 잠행술인 비은잠형(秘隱潛形)에 행운유수를 더하면, 탈출과 회피, 그리고 이목과 기감마저 속여버리는 절세의 경공이 된다.
“어, 느새······.”
행운유수로 상대의 사각을 찔러 현천검법을 펼쳤다.
도풍을 사방에 흩뿌려댄다 해도 별 의미 없다. 투로 정도는 이미 전부 꿰뚫고 있다.
구절참룡도니 뭐니 하는 거창한 이름이 아까운 도법이다.
약해졌다 해도 현경의 고수. 무공의 투로를 꿰뚫어 보는 것 정도는 손쉽다.
“이겼어. 내가. 호호호······. 아니. 흐흐흐.”
이철수가 급히 웃음소리를 정정했다.
음한기공의 절대고수다운 전투법이었다.
정파의 협객보다는 동창의 첩보 요원을 연상시키는 치졸한 전투법과 예상치 못한 승리에 모두가 침묵에 빠졌다.
“스, 승자 공동파의 이철수!!”
뒤이어 서문표의 승자 선언이 울려 퍼졌다.
공동파의 반란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